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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프로야구의 레전드 스토리 헐크-이만수를 만나다.:내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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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프로야구의 레전드 스토리 헐크-이만수를 만나다.

이승재 | 기사입력 2012/06/03 [11:00]

한국 프로야구의 레전드 스토리 헐크-이만수를 만나다.

이승재 | 입력 : 2012/06/03 [11:00]


이만수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강타자들 중 제일 윗선을 차지하고 있으며 한국 프로야구 제1호 안타와 1호 홈런,타점,득점을 기록한 선수다.

거포라는 수식어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그의 포지션은 포수였다.

한게임에서 4번의 타선 중 한번정도만 안타를 쳐도 그럭저럭 공격이 되어 준다고 말하는 포수라는 포지션에서 대한민국 프로야구 전체를 통틀어 그처럼 눈부신 기록을 쌓은 선수는 한·미·일 삼국에서도 몇손가락 안에 꼽히는 그다.

한국프로야구 원년멤버들 중 가장 오랫동안 선수생활을 했던 선수.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MLB 1군 코칭스테프로 발탁되어 처음으로 코칭스테프로서 우승반지를 껴본 유일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만수가 싸은 눈부신 기록들뒤에는 그가 야구인생을 시작하면서 흘렸던 한없는 땀방울과 핏방울이 숨겨져 있다.

1958년 9월 9일 이만수는 군인이셨던 부친이 철원에서 근무를 하던 당시 그곳에서 태어났다.

중학생이 되던해 대구로 이사를 했고 대구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첫 번째 야구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야구부 입단시험을 보게된 이만수는 빠른발로 무난히 야구부 입단시험을 통과한다.

그러나 야구를 처음 대해보던 그는 당연히 기존 선수들에 비해 부족한 실력이었고 유니폼도 받지 못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오기와 근성을 지닌 이만수는 좌절하지 않고 배트를 밤낮으로 휘두르면서 자신만의 스윙폼을 찾으려 노력했고 끝없는 연습으로 손에 피가 마를 날이 없었지만 그상황속에서도 이만수는 자전거 튜브를 손에 감고 배트를 휘두르는 열정을 보이게 된다.

3년간 대구중학교 생화을 마친 이만수는 대구상고에 입학하게 된다.이때 이만수는 이미 초고교급 대형타자로 발전해 있었다.

이만수는 1977년과 78년 연속해서 청소년국가대표팀의 주전포수로 발탇되어 있었고 ‘78년부터’81년까지 수위타자 자리를 놓쳐본적이 업었다.

대구상고를 졸업한 후 한양대에서 빨간장갑의 마술사로 불리는 故 김동엽감독을 만나 진짜포수로서의 경험을 하게 된다.

한양대를 졸업하던해 프로야구가 처음으로 만들어졌고 이만수를 대구에 연고지를 둔 상태라 삼성라이온스의 지명을 받아 프로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프로야구 첫 개막전이던 1982년 3월 27일 MBC청룡과의 대결에서 2회초 MBC의 투수 이길환의 공을 받아쳐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첫 홈런,첫안타,첫 타점,첫득점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게 된다.

이만수는 다음해인 83년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꽃피우기 시작한다.

처음으로 홈런왕과 타점왕 타이틀을 차지하면서 포수부문 골든 글러브도 차지하게 된다.또한 정규리그 MVP의 영예까지 안게 된다.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로 100개의 홈런을 기록한 사나이.5년연속 포수부문 골든글러브를 거머쥔 사나이 그의 기록은 대단하다.

그러나 ‘97년 시즌을 끝으로 구단에서 방출 된 이만수는 미국으로 건너가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갖은 고생을 했지만 결국 트리플 A를 거쳐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소속팀인 화이트 삭스의 코칭 스테프가 된다.

그리고 2005년 화이트 삭스는 90여년만에 월드시리즈 우승에 성공했고 이만수는 화이트 삭스의 월드시리즈 A급 우승 공신으로 선정됐다.

이만수는 선수생화 중 홈런을 치면 기뿨하면서 관중들에게 손을 흔들었고 환호하면서 야구를 즐길거리로 만드는데 공헌한 선수다.

이만수, 그는 분명 비범한 선수다.그러나 그 비범함 속에 그가 잠까지 줄여가면 휘둘렀던 스윙의 흔적이 숨어있었고 또한,후보로 밀려나면서 주전으로 올라서기 위해 흘렸던 땀방울,핏방울들이 숨어있었다.

SK 와이번스 이만수 감독 인터뷰

№1.처음 야구를 시작하게된 동기는?

친구따라 강남간다더니....친한 친구랑 중학교 야구장에 놀러갔다가 중학교 야구부 감독님이 하고싶은 사람은 야구를 해도 좋다고 해서 무작정 좋아서 야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2.1980년대를 대표하는 포수겸 타자이신데 선수시절 거머줬던 타이틀을 소개한다면 

제가 기억하는 가장 대표적인 수상경력입니다.

3년 연속 홈런 및 타점왕(1983~1985년),

1984년 타격 3관왕 (타격,홈런,타점),

1983년 선수권대회(페넌트레이스) 최우수선수,

5년 연속 골든글러브(포수)

16시즌(1982~1997년)동안 1,449경기에 출장해 타율 0.296, 1,276안타, 252홈런, 861타점을 기록했습니다.

№3.고향이 대구가 아닌 철원인 것으로 아는데 대구에서 야구를 하게된 동기는?

저는 야구를 중학교 때부터 시작해서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경우입니다.

철원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다니던 중에 대구로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아버님이 직업군인이셔서 근무지가 대구로 이동되면서 제가 대구로 가게 되었습니다.

№4.중학교때 야구를 시작한 것으로 아는데 실력은 어땠나요  이후 대구상고 때까지 어떤 각오로 연습을 하셨는지?

야구를 시작하고 나서 중학교때는 형편없었죠...하하

중,고,대학 11년 간(중학교 1년 유급) 하루 4시간만 자고 나머지는 야구에 모든 집중을 하였습니다. 노력만이 살길이라는 생각으로 정말 열정과 혼신을 다해 휘둘렀습니다. 야구외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야구에 빠져 살았습니다.

№5.1977년부터 청소년 국가대표팀 주전포수로 발탁되셨죠  이후 수위타자자리를 놓치지 않은 것으로 아는데 대학때 김동엽감독을 처음 만나셨죠  그당시 얘기를 좀..

네...열심히 노력한 결과죠...김감독님...빨간장갑의 마술사죠...(웃음)

얼마나 엄하신 분인지 참 많이 맞았습니다. (웃음)

야구의 정신을 많이 강조하셨고 규율을 잘 지키고 약속을 잘 지키라는 간단하면서도 중요한 것들에 대해 많이 역설하시던 분이죠....참 그립네요...

№6.90년대 후반 은퇴를 선언하고 미국으로 건너가셨죠  그후 얘기를 좀 해주시죠

하아...이 얘기만 해도 한시간을 떠들어도 모자랄겁니다.

요약하자면, 문화적차이 특히 음식과 언어 때문에 참 고생 많이 했었습니다. 동양야구만 접한 저에겐 문화적 충격만큼이나 야구의 충격도 꽤 컸습니다.많은 고난을 극복할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가족이었습니다. 참 좋은 경험이고 재산입니다.

№7.한국으로 돌아오신 후 SK에서 코치생활을 하면서 지난해 결국 감독으로 등극하셨는데 그동안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면?

비하인드 스토리는 특별히 없고 명문팀으로 더 강하게 만드는 역할을 해야겠죠.

리더로서 선수들에게 더욱 친근하게 다가가서 소통을 중시하는 리더가 되고 싶습니다.

사람마다 호불호가 있기 마련이죠...열심히 일할테니 좋게 봐주십시오...(웃음)

№8.감독이 되신 후 좋은 성과가 보여지고 있는데 나름의 노하우가 있다면?

기본, 집중, 팀... 이 세가지가 저에겐 감독으로서 화두입니다.

이 세가지만 충실한다면 선수구성원 전부가 좋은 성과를 낼수있다고 확신합니다.

감독으로서 선수들과 희노애락을 같이 하는 눈높이를 맞추는 지도자가 되고 싶어요.

권위적인 지도방식은 그렇게 좋아하진 않는답니다.

№9.마지막으로 팬들에게 한말씀

팬여러분~ SK와이번스를 더욱 사랑해주시고 야구장에도 많이 오셔서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한국최고가 아닌 세계최고의 팀을 만드는데 일조하고 싶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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