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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화의 고문학여행]현실의 질곡에서 벗어나 이상세계를 꿈꾸며 상상의 세계를 노래한 ‘유선시(遊仙詩)’:내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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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화의 고문학여행]현실의 질곡에서 벗어나 이상세계를 꿈꾸며 상상의 세계를 노래한 ‘유선시(遊仙詩)’

고영화(高永和) | 기사입력 2021/07/03 [08:34]

[고영화의 고문학여행]현실의 질곡에서 벗어나 이상세계를 꿈꾸며 상상의 세계를 노래한 ‘유선시(遊仙詩)’

고영화(高永和) | 입력 : 2021/07/03 [08:34]
고영화(高永和) 칼럼
고영화(高永和) 칼럼

인간은 언제나 저 너머 이상세계를 꿈꾸어 왔다. 시공간의 구속에서 벗어나 인간의 욕망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는 초월적 세상을 동경하였다. 고대로부터 중세봉건사회까지, 고난의 현실공간에서 벗어나 하늘로 날아오르거나 땅속이나 바다세계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 동양에서는 가장 보편적으로, 지금까지 오랫동안 초월 공간이 된 것이 바로 신선(神仙)세계 즉, 도교사상이었다. 샤머니즘 불교 유교 천주교 기독교 등이 이 땅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이어져도 언제나 주변부에서 꿈꾸듯 맴돌며 이어 온 것이 바로 도교였다. 최치원 김부식 이규보 김극기 임춘 이인로 원천석 김시습 서경덕 허난설헌 허균 이수광 이달 조여적 양만고 등등.... 수많은 우리네 선조들이 그들의 작품 속에서 신선세계를 꿈꾸었다. 고통스러운 현실세계와 동경하는 이상세계로 가고픈 열망을 절절히 드러내었다. 현실의 질곡에서 벗어나 내면의 평화를 얻고 높은 영혼의 경지에 도달하고자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현실의 굴레를 벗을 수 없는 인간의 슬픈 자화상을 담고 있는듯하다. 특히 나라에 전쟁이나 기근, 정쟁, 사화, 민란 등 사회가 어지럽거나 희망이 사라지는 환경에서 도가사상이 활발히 유행하였다.

○ 다음은 사람의 목숨이 부추 위에 서린 이슬처럼 덧없다는 한나라 때 악부시(樂府詩) <해로(瀣露)>이다.

瀣上露 풀잎 위 이슬

何易晞 너무 쉽게 마르네.

露晞明朝更復落 내일 아침 이슬은 또 내리겠지만

人死一去何時歸 한번 떠난 사람은 돌아올 줄 모르네.

○ 중세시대 지식인들 중에는 먼 변방으로 귀양살이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이들은 유배지에서 절망의 끝에 서서, 의지할 데라곤 없는 현실에 초탈적 성향이 강한 도교와 신선사상에 눈을 돌렸다. 시적화자인 자신이 직접 신선이 되어 노닐기도 하고, 자신의 유배지인 섬을 신선이 사는 선계로 설정해 마음의 위안을 받고자 했다. 상상의 세상은 억압은 물론 구속도 없고 두려움과 공포도 없는 즐거운 도피처이자 황홀한 유희의 세계였다. 신선이 된 자신이 구름과 용, 고래타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선계를 자유로이 비상한다. 정치적 인간적 갈등이나 결핍도 없는 그야말로 유토피아였다. 현실의 부조리 앞에서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초월을 꿈꾸며 글을 쓰고 자신을 억압하고 왜곡하는 귀양살이를 이를 통해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현실 환경의 극복은 정신적 자유해방과 자신의 내면 정화와 안정을 꾀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선세계 선계(仙界)는 봉건사회 지식인들이 현실 일탈에 대한 욕망을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양식 세계였다. 그 옛날 거제도로 유배 온 정과정곡의 정서, 이행, 홍언충, 김진규, 정황, 황경원 선생은 거제도의 적선(謫仙)이라고 감히 칭할 수 있다. 그들은 귀양살이를 초월해, 자신 스스로 봉래 섬의 신선으로 살기를 원했다.

1) 노를 돌려(反棹) / 황경원(黃景源,1709~1787). 1761년作 거제도

石門雲正杳 구름은 아득아득 피어오르고

潭島日方低 섬 너머 나직하게 해는 지려네.

漁夫回舟去 어부는 배를 돌려 저어 가는데

仙源路更迷 신선 사는 무릉도원 찾을 길 없네.

2) 술 취해 노닐며 부르는 노래[醉遊歌] 中. /이행(李荇) 1506년 거제도.

下視悠悠又可愕 아래를 굽어보니 아득하여 놀랄 만하니

安得吾身生兩  어찌하면 이내 몸에 두 날개가 돋아나

蓬萊方丈歸去來 봉래산이며 방장산에 맘껏 다니며 놀다

更向人間撫金狄 다시금 인간 세상에 와서 금적(金狄) 어루만질꼬.

 

시적화자는 귀양살이 자신을 되돌아보며, 외롭고 쓸쓸한 거제도에서 문득 신선이 되어 유배에서 벗어나 마음껏 노닐고 싶어 한다. 금적(金狄)은 금으로 만든 사람, 즉 금인(金人)으로, 진시황(秦始皇) 때 열두 개의 금인을 주조하여 궁문(宮門) 앞에 두었는데, 그 무게가 각각 24만 근이었다. 그런데 후한(後漢) 때 선인(仙人) 계자훈(?子訓)이란 사람이 한 노인과 함께 이 금인을 어루만지면서 “이것을 주조하는 것을 본 지 이미 오백 년 가까이 되었구나.” 하였다.

  적선(謫仙)은 선계(仙界)에서 인간 세상으로 쫓겨 떨어진 선인(仙人) 신선(神仙)을 의미한다. 하늘에 사는 신선은 비록 죄를 지어 인간 세계에 얼마동안 머물게 되지만, 언젠가는 하늘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또한 시인(詩人) 이백(李白)을 일컫기도 한다. 당서(唐書) 이백전(李白傳)에 이백이 처음 장안에 들어갔는데, “하지장(賀知章)이 이백의 글을 보고 감탄하며 “그대는 적선인(謫仙人)이로다.” 하고 그를 현종(玄宗)에게 천거한 데서 비롯된 말이다. 예로부터 이태백(李太白)이나 소동파(蘇東波)등이 적선(謫仙)이라 불리었는데, 둘 다 귀양살이를 했던 공통점이 있고 또한 그들의 문재(文才)가 인간이 마치 하늘의 신선들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3) 불일암 인운 스님에게[佛日庵贈因雲釋] / 손곡(蓀谷) 이달(李達 1539~1612)

寺在白雲中(사재백운중) 절집이 구름 속에 완전하게 묻혀 살아가기로

白雲僧不掃(백운승불소) 구름이라고 하면서 스님은 비로 쓸지를 않네

客來門始開(객래문시개) 지나던 손이 와서 가만히 문을 열어보니

萬壑松花老(만학송화로) 온 산의 송화 꽃 만발하여 하마 머리 쇠었겠지

손곡(蓀谷) 이달(李達)은 당시(唐詩)에 능해 최경창(崔慶昌) 백광훈(白光勳)과 함께 ‘삼당(三唐)’이라 불린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였다. 위 시에서 화자는 날마다 스쳐지나가는 구름을 스님이 비를 들고 쓸 리 없다고 말한다. 객이 왔기에 문을 열어보니, 흰 구름 사이로 보이는 수 없는 골짜기에 송화가 금새라도 가루 되어 흩어질 듯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적정(寂靜)에서 깨어나 문 밖의 이 장엄한 광경을 바라본 지은이는 한없는 환희심(歡喜心)을 일으켰고, 그것을 주체할 길이 없기에 마침내 이 시를 읊게 되었다. 노스님의 머리가 희어진 것도 이런 원인에서 찾는 시적 화자의 착상도 기발하다. 이 시는 풍부한 시정(詩情)을 자유분방하게 드러낸 시인데, 그 중 2구 “흰 구름을 스님이 쓸지 않았네”는 기묘함이 극치에 이른 시구이다.

4) 꿈에 광상산을 노닐며(夢遊廣桑山詩序) /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

하늘이 내린 시선(詩仙), 허균의 누나 허초희(난설헌)는 나이 27살에 선계를 그리는 시를 남기고 죽었다. 시 내용은 이랬다. '부용화 스물일곱 송이 붉게 떨어지고 달빛은 서리에 차네‘

碧海浸瑤海(벽해침요해) 푸른 바닷물이 옥 바다에 스며들고

靑鸞倚彩鸞(청난의채난) 푸른 난새가 오색 난새와 어울리네

芙蓉三九朶(부용삼구타) 연꽃 스물일곱 송이 붉게 떨어져

紅墮月霜寒(홍타월상한) 달빛 서리위에 차갑기만 하여라

허난설헌(許蘭雪軒)은 이 시를 쓰기 전날 밤, 꿈속에서 서왕모(西王母)의 사자인 난새에게서 옥황상제(玉皇上帝)의 조서를 받고 그녀가 원래 살던 세계로 신선이 되어 떠났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허균은 이 싯귀에 주(註)를 달아, 그녀가 스물일곱 송이의 연꽃과 맞추어 자살하였다고 암시한 것이다. 허나 허균이 그 배경이나 연유를 달리 내세우지 못하는 것으로 미루어, 아마도 그의 시인기질이 안타까운 누이의 죽음을 미화하였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동생인 허균, 오빠 허성(許筬), 허봉(許蓬)과 함께 난설헌은 조선조 최고의 문장 4남매로 꼽히고 있다. 이러한 가정에서 태어난 난설헌은 이미 5살 때 시를 짓기 시작했고, 커가면서도 오빠, 동생과 함께 시를 겨루되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한다. 당대의 풍습으로 보아 여자아이들에겐 현모양처의 교육이 고작이었다. 허나 난설헌의 출중한 천분과 문장 집안의 분위기 때문인지 그녀의 시 공부는 억제되지 않았다. 우리 문학사로는 다행스러운 일이나 그녀 개인으로서 비극적 삶의 실마리가 마련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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