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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艱難), 그 지긋지긋한 질곡(桎梏)의 사슬, 농가의 실상(田家詞:내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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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艱難), 그 지긋지긋한 질곡(桎梏)의 사슬, 농가의 실상(田家詞

고영화 향토 고문학 칼럼리스트 | 기사입력 2023/04/27 [11:22]

가난(艱難), 그 지긋지긋한 질곡(桎梏)의 사슬, 농가의 실상(田家詞

고영화 향토 고문학 칼럼리스트 | 입력 : 2023/04/27 [11:22]

▲ 고영화 향토학자    

 

옛날 절대 왕정 시대에는 웬만큼 토지를 소유한 농민층이라 할지라도 과도한 조세의 부담과 관리들의 횡포에 더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며 살았다. 혹여 가뭄이나 홍수 등의 천재지변이라도 당하는 날에는, 굶주림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재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위민농정(爲民農政)의 부재와 아울러 부패한 관리 지배층의 발호와 그들이 자행하는 횡포였다. 이는 불행하게도 시대를 초월해,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대까지 이어진 고난의 인간사(人間史)였고, 시대마다 민중이 지배계층으로부터 받았던 수탈은 농민들에게 한결같이 부여되는 질곡(桎梏)이었다.

 

교활한 서리(胥吏)들이 농간을 부려, 본래 구휼을 위하여 설치한 상평창의 곡가를 조작하고 그 틈을 이용하여 관청의 물건을 사사로이 착복하였다. 그들이 포흠(逋欠)한 많은 돈이나 방탕하게 소비하는 재물은 모두 가난한 백성들에게서 온갖 방법으로 착취한 것이다. 때문에 백성들은 이리저리 법망을 피하여 포악한 짓을 거침없이 저지르는 이들 아전들을 가리켜 간사한 족제비 같은 존재라고 비난하였다.

 

곡식도 없고 옷도 없는 비참한 생활에, 야반도주하는 유민들이 속출하고 내팽겨 친 처자식은 고사리 칡뿌리를 캐먹다 보니 누렇게 뜬 얼굴에 퉁퉁 부은 배를 감싸 안고 굶주림에 죽어갔다. 아직 덜 여문 보리밭에서 뿌리 채 뽑은 보리를 삶아 먹는데, 당장 배고픔에 내일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 이런 참혹한 백성들의 기근에도 세금을 내라고 독촉하니 아내와 자식까지 팔아넘길 수밖에 없다. 피눈물을 흘리다가, 마른 눈물에 통곡소리 또한 낼 수도 없는 비참한 생활이었다. 그러나 부잣집 식탁에선, 난로회에서 고기 굽는 냄새 풍기고 어포가 여물다고 뱉는 소리 들린다. 화려한 다갈색 모자에 산초계수나무 향기 풍기고 신선한 봄채소 기다린다. 백성은 굶주려 죽어가도 권력층과 부잣집의 곳간은 빈틈이 없었던 바, 이는 수천 년을 이어온 참담한 현실이었다.

 

○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대기근이 발생할 때마다 백성이 기근(饑饉)을 견디지 못하고 인육을 먹는 식인행위가 발생했다고 적고 있다. “세금 부과는 죽으면 그만이지만 죽지 않으면 응당 매를 맞는다네. 집을 팔아도 자식을 팔아도 걸식은 끝나지 않으니 누구에게 의탁하랴. 아내에게 머릿속 이를 잡게 하노라니 두 줄기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네.” 낙하생(洛下生) 이학규(李學逵 1770~1835) 선생이 19세기 초에 직접 목격한 바를 적은 글이다. 당시 마을 사람들이 이웃에게 말하길, “차라리 인륜을 폐할망정 아전과는 혼인하지 말라.”고 그 분노를 표출했다고 한다.

반면 문벌양반들은 무슨 집안의 가문의 자랑스러운 선비랍시고 학자랍시고, 허황되고 실체도 없는 형이상학적인 성리학이나 읊으면서, 명분이나 의리를 방패삼아 그들만의 세상을 살았던, 옛 선조들의 한심한 작태를 생각하면 부아가 치민다. 텅 빈 나라의 곳간과 궁핍한 백성을 위해 고뇌하고 그들의 안정을 위해 애썼던 선비는 사실 역사상 극히 일부에 불과했던 것이 우리의 부끄러운 참 역사였다.

1) <농가의 원망(田家怨), 매달 해 오는 일(月課)> 임제(林悌 1549~1587)

曉月??驅黃牛 새벽 달빛에 황소 모는 소리 요란스레

披草歸耕壟上土 풀잎 헤치고 언덕으로 밭 갈러 올라가네

隣家乞米?婦遲 이웃에 양식 빌어 들밥은 더디고

日晩將何慰飢  해는 지는데 주린 배를 어이하나.

今年之旱去年同 금년의 가뭄은 지난해와 마찬가지

春盡未足添蓑雨 봄이 다 갈 때에 약간 비를 더하지만

下濕初苗高已乾 낮은 곳에 어린 싹 높은 곳은 이미 말라

阡陌荒榛接村塢 두둑에 메마른 개암나무 마을에 접해 있네.

扶將羸弱薄言鋤 시들고 약한 것 붙들어 잠시 김을 매어주나

汗滴田中日當午 땀방울이 밭 가운데 떨어지고 한낮이 되었구나

辛勤無計望秋成 애쓰고 고생하나 가을 결실 막연하다

千畝收來不盈釜 천이랑 거두어도 솥 안에 차질 않네.

官家租稅更相催 관가에선 조세를 또다시 재촉하고

里胥臨門吼如虎 마을 아전은 문 앞에서 범처럼 들볶는다

流離不復顧妻  이리저리 흩어져 처자조차 돌볼 수 없어

昨一戶亡今一戶 어제 한 집 오늘 한 집 또 떠나가는구나.

南州轉運北徵兵 남으로는 짐 운반 북으로는 징병일세

我生之後何愁苦 내 평생 어찌하여 한숨과 고생인가

朱門酒肉日萬錢 고관 댁에선 술과 고기에 하루 일만전(一萬錢)

君不見田家苦(缺) 그대는 못 보는가  농가의 괴로움을

이 시를 보면 당시 농촌의 생활상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구체적으로 고발되고 있다. 농민들은 몇 년째 계속되는 가뭄으로 기근(饑饉)에 시달리며 양식(糧食)을 빌어가며 끼니를 때우고 있다. 그들은 종일토록 뜨거운 태양아래 김매며 땀을 흘리지만 가을이 되면 추수(秋收)할 것이 별로 없다. 더구나 과중(過重)한 조세(租稅)와 군역(軍役)은 유망민(流亡民)을 만들어, 급기야 농촌이 피폐(疲弊)해져가는 비참한 실정(實情)이다. 그런데 고관(高官)들은 술과 고기로 하루에 일만전(一萬錢)을 쓰며 향락(享樂)을 일삼고 있다. 임제(林悌 1549~1587)는 이러한 현실을 보고 구황(救荒)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無能力)에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는 당시의 어지러운 파쟁(派爭)과 관료사회(官僚社會)의 부조리(不條理)가 어느 정도로 심각했는지를 지적한 임제의 현실에 대한 예리(銳利)한 통찰(洞察)이라고 볼 수 있다. 임제(林悌) 자신도 사대부 계층의 지배계급이지만 어떻게 할 수 없는 능력 밖의 일이었다. 다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사회적 실상을 적극적으로 고발하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여러 문학 작품을 통해 봉건사회(封建社會)의 근본적인 모순(矛盾)과 부조리(不條理)를 과감히 매도(罵倒)하고 있다.

2) 농가의 현실[田家詞] / 강위(姜瑋 1820~1884)

暮入晨還出(모입신환출) 밤중에 들어와 새벽에 또 나가니

乳眠常??(유면상후후) 젖먹이는 항상 색색거리며 자고 있다

作得一年農(작득일년농) 일 년 농사 끝내어 추수하고 나니

峽兒啼避父(협아제피부) 산골 아이는 울며 제 아비를 피한다.

조선시대 일반 민중들이 호롱불로 밤을 밝히는 집은 거의 드물었다. 대부분 관솔불로 어둠을 밝혔다. 관솔이란 소나무 송진이 엉긴 가지나 옹이다. 매일 일 하느라 이른 새벽에 나갔다가 밤중에 돌아오니 농사꾼이 집안에 있을 때면 아이들은 잠들어 있게 마련이다. 가을추수가 끝나야만 비로소 한가해진다. 모처럼 날이 훤할 때, 집에 들어가니 젖먹이 아이는 제 아버지가 낯설어 울면서 피한다. 비록 과장이 섞여 있다손 치더라도 이는 불과 100년 전 우리 농민들의 모습이었다. 이 시의 저자이자, 조선말기 한학자 및 개화사상가였던 고환당(古?堂) 강위(姜瑋)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제자로서 당대의 지식인이라 할 수 있다.

3) <전가사(田家詞)> 농가의 실상 / 중국 당나라 원진(元  779-831)

牛?  田?  소를 이랴 몰지만 밭은 자갈밭 땅이라

旱塊敲牛蹄?  가문 땅 흙덩이에 소발굽 채는 소리

種得官倉珠顆穀 종자는 구슬처럼 관가창고에서 얻어온다

六十年來兵?  육십 년만에 병사를 모으러 다니고

月月食糧車?  다달이 식량은 수레로 끌어간다.

一日官軍收海服 어떤 날은 관군이 해복까지 거둬가고

驅牛駕車食牛肉 소가 끄는 수레엔 소고기만 가득하이

歸來收得牛兩角 돌아와 소의 두 뿔을 거두어서

重鑄鋤犁作斤  무거운 쇠붙이로 날을 깍아 만든다

姑?婦擔去輸官 시어머니 방아 찧고 며느리는 관가에

輸官不足歸賣屋 관가에 바칠 것은 집 팔아도 부족하니

願官早勝?早覆 관가는 좋겠지만 오히려 원수로고

農死有兒牛有犢 농사는 작파되고 아이와 송아지만

誓不遣官糧不足 관리를 보내지 마소 식량조차 부족하오.

결국 이 시도 당시의 가난한 농촌의 실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농민들은 농사를 짓고자 하나 가뭄이 들어 어려움을 당하고 있으며 더구나 밭을 갈지만 흙먼지만 일어날 뿐이다. 또한 종자를 비싸게 구해와 경작(耕作)하지만 결국에는 전쟁에 동원된 군량미(軍糧米)로 관가(官家)에 수탈(收奪) 당한다. 농촌의 실상과 탐관오리의 학정을 고발하고자 하는 작가의 동기가 드러나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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