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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에 출정한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암울한 원성 ‘정부원(征婦怨)’..고문학을 통해 본 과거 전쟁사:내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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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에 출정한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암울한 원성 ‘정부원(征婦怨)’..고문학을 통해 본 과거 전쟁사

모두 합치면 약 80 차례 정도의 전란(戰亂)

고영화 향토 고문학 칼럼리스트 | 기사입력 2023/05/10 [07:56]

전란에 출정한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암울한 원성 ‘정부원(征婦怨)’..고문학을 통해 본 과거 전쟁사

모두 합치면 약 80 차례 정도의 전란(戰亂)

고영화 향토 고문학 칼럼리스트 | 입력 : 2023/05/10 [07:56]

 

변방의 요새(邊塞)로 수자리 살러간 정부(征夫)들의 괴로움과 함께, 고향과 처자에 대한 그리움을 읊은 시를 <변새시(邊塞詩)>라고 한다. 반면에 전쟁에 나갔거나 변방에 수자리 살러 간 정부(征夫)의 홀로 사는 아내인 정부(征婦)가 한탄하며 읊은 작품을 <정부시(征婦詩) 또는 정부사(征婦詞)>라 부른다. 이 노래들은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날 우리에게 애잔한 울림을 준다. 게다가 변방의 노래 <새하곡(塞下曲)>은 변새(邊塞) 지역의 정경, 병사의 생활이나 향수를 읊은 작품이다.

 

이처럼 <변새시><정부시><새하곡><석석염><야야곡><규원시> 등과 같이 우리 선현들이 쓴 한시에는 별리(別離)를 노래한 운문(韻文)이 상당히 많다. 이별(離別)은 가장 아픈 정한(情恨)으로 표현되어서 이 과정 모두는 슬픔이고 아픔인데, 수천 년 우리 역사 속에서 유유히 이어져오면서 민족의 정서가 되었다. 그러니 그때마다 다시 만날 기약을 한다면 시문(詩文)에다 그 애절함을 담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남편이 군역으로 나가 소식도 없고 생사조차 알 길이 없었다면 더욱 말할 필요가 있으랴.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봄날도 가고 사람도 가고 그리고 기약이 없어도, 그들이 읊은 시가(詩歌)는 민중의 가슴 속에 흘러 지금까지 회자(膾炙)되고 있다.

 

옛날 왕조시대의 노역 제도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상상을 초월한다. 군역으로 변방에 갔다하면 전쟁이 끝나야 돌아올 수 있었고, 노역으로 끌려갔다하면 대역사(大役事)가 마무리 되어야 귀향할 수 있었다. 이것이 당시의 제도이고 관례였다. 중국의 만리장성을 쌓는 일도 그랬고, 한 전쟁에서 수십 년 동안 병사나 노역으로 전쟁을 치렀던 우리의 역사에도 그런 기록을 여럿 만난다. 개중에 해안가 수군진영(水軍鎭營)이나 북방 오랑캐와 접한 병영(兵營)에 수자리를 살았던 장정들은 대다수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그 지역에서 가정을 꾸리고 대대로 살 수 밖에 없었다. 옛날 조선시대 일본과 접한 거제도의 경우에도, 섬을 빙 둘러 수군7진영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거제도에 처음 입도(入島)한 분의 절반 정도가 이러한 경우에 해당된다. 그러다보니 거제도민은 천민이나 노비가 거의 없고 병역의 의무를 져야만 하는 양인이 거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특별한 변새(邊塞)지역이었다.

 

○ 우리나라는 역사시대가 시작된 이후로 이민족 국가와의 전쟁이나, 또 정치적 집단인 홍건적 등의 대규모 침략을 모두 합치면 약 80 차례 정도의 전란(戰亂)이 있었다. 게다가 같은 동족국가인 부여 옥저 동예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후백제 고려 사이의 전쟁이나, 정변 반란 혁명 반정 등과, 북방 야인들이나 왜구 등의 소규모 침략 또는 노략질의 기록은 각기 수백 번 이상을 찾을 수 있다. 그런고로 기록에 없는 일부 사건과 소규모 노략질을 모두 포함한다면, 규모에 관계없이 족히 1000회 이상의 전란(戰亂)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보니 우리나라 선조들은 자신이 사는 일생 동안, 자질구레한 것을 포함하여 약 10번의 크고 작은 국가 비상사태에 직면했을 것이다. 게다가 군역을 지는 남자의 나이가 보통 15세 이상부터 60세 까지였으니, 전쟁이 일어나 소집령이 내리면, 어느 양인 집에서는 할아버지 아들 손자 3대가 함께 출정하는 일도 벌어졌을 것이고, 살아남더라도 전쟁이 끝나야 겨우 돌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병역의 고통을 마치 ‘구덩이 속에 파묻혀 죽는 것처럼(如坑穽)’ 여겨 온갖 구실과 핑계를 대서 죽기를 각오하고 빠져 나간다”고 했을까. 그런데다가 양인이 병역의 의무에서 벗어나고자 천민이 되려고 자청한 일도 있었다. 너무 가난해서 병역을 감당할 수 없으니 제발 노비로 살게 해달라”고 호소를 했다고 하니 얼마나 병역이 괴로웠으면 노비 신분이 되려고 했을까.

우리나라에 태어난 양인 남자는 보통 15세~60세까지 현역 군인인 정군(正軍)이나 정군의 비용을 부담하는 보인(保人)으로 편성되었으니, 평균 수명을 고려하면 한마디로 죽을 때까지 군역의 무거운 짐에서 허덕이다가 고통스럽게 생을 마감했다. 그들의 아내나 자식들 또한 그 옭아맨 삶속에서, 아픔과 원망을 켜켜이 쌓은 한(恨)으로 대물림하며 수천 년을 이어왔던 우리의 지난 역사가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한다.

 

● 한편 오늘 지면에 소개하는 <정부원(征婦怨)>은 한시의 한 형식인 악부시(樂府詩) 중에 신악부(新樂府)이다. 악부시는 민간에서 가창(歌唱)할 수 있는 시(詩)라는 뜻에서 시가(詩歌) 또는 가사(歌辭)라고도 부르는데 한마디로 노래가사이다. 내용은 남녀 간의 애정, 전쟁과 종군으로 빚어지는 인생의 비극, 집 떠난 나그네의 향수와 고독, 신세계에 대한 동경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무엇보다 악부시의 특징은 형식의 자유로움과 다양함, 그리고 뛰어난 문학성에 있다. 한 구(句)의 글자 수도 다양하고 음악적 요소가 다분했다. 그러나 갈수록 곡조는 없어지고 가사만 남아서 민간 시가의 한 부분을 이루게 되었다. 이에 당나라 때부터 음악과는 관계없이 가사만 따로 쓰게 되어 신악부(新樂府)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어찌되었건 통상 <정부원(征婦怨)> 같은 신악부(新樂府)는 송나라 곽무천(郭茂?)의 《악부시집(樂府詩集)》 중에 〈신악부사(新樂府辭)〉에서 “신악부(新樂府)는 모두 당나라 때 새로 지어진 노래이다. 가사는 실상 악부이면서도 음악에 쓰이지는 않았으므로 신악부라 한다.(新樂府者 皆唐世之新歌也 以其辭實樂府 而未嘗被于聲 故曰新樂府也)”고 설명했다. 민간 악부는 그 표현이 지극히 소박하고 통속적이지만, 격식이나 수사(修辭)에 얽매이는 문인(文人)의 시(詩)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자유로움과 사상의 단순함과 진실함, 직설적인 표현 등이 장점으로 꼽힌다.

 

○ 특히 <정부원(征婦怨)>이라는 제목의 시(詩) 중에는, ‘변경의 낭군이 꿈속에서도 매일 밤 보인다’는 당(唐)나라 맹교(孟郊 751~814)의 시가 유명하다.

“비단 휘장 아래에서 곱게 자라서, 어양으로 가는 길을 알지 못한다오. 수자리에서 돌아오는 우리 낭군이, 밤이면 밤마다 꿈속에서 보이누나. 어양 땅은 천리 길이지만 중문(中門)의 턱보다 가깝다네. 국경의 중문은 통과하는 때가 있지만 어양은 늘 내 눈 속에 있으니.(生在綠羅下 不識漁陽道 良人自戍來 夜夜夢中到 漁陽千里道 近如中門限 中門逾有時 漁陽長在眼)”

맹교(孟郊)는 숭산(嵩山)에 은거하다가 나이 50에 진사(進士)에 등제(登第)하여 한유(韓愈)와 망년(忘年)의 교우 관계를 맺었던 시인이다. 그의 시에는 이치(理致)가 깃들어 있어 한유로부터 가장 칭찬을 받았으나 일반적으로 사고기삽(思苦奇澁)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 다음 시는 당(唐)나라 문인(文人) 장적(張籍 768~830)의 〈전장에서 죽은 남편의 아이를 가진 아내의 원성(征婦怨)〉이다. 전쟁의 참혹함을 드러낸 시(詩)로 흉노가 한나라 라오허 강(遼河)에 침범하여 변방의 군사가 전몰하였다. 시신을 거둘 수가 없어 초혼장(招魂葬)을 치루었다. 지어미는 남편과 아들에 의지하는 법인데 남편은 죽고 아이는 뱃속에 있다 보니 여인은 비록 살아있다 해도 대낮의 촛불 같이 삶의 빛조차, 희망조차 잘 보이질 않는다.

1) 전장에서 죽은 남편의 아이를 가진 아내의 원성(征婦怨) / 장적(張籍)

九月匈奴殺邊將 구월에 흉노가 변방의 장수를 죽이니

漢軍全沒遼水上 한나라 군대는 요수 강가에서 전몰하였지.

萬里無人收白骨 만 리 먼 곳이라 백골 거두는 사람 없이

家家城下招魂葬 성 아래 집집마다 초혼장을 치루구나.

婦人依倚子與夫 지어미는 자식과 남편에 의지하는 것인데

同居貧賤心亦舒 가난해도 함께 살면 마음은 편하다네

夫死戰場子在腹 남편은 전장에서 죽고 아이는 뱃속에 있으니

妾身雖存如晝燭 소첩이 비록 살아있다 해도 대낮의 촛불 같은 걸.

● 군대에 간 소식 없는 남편을 기다리며 홀로 사는 아내의 원망을 노래한 〈정부원(征婦怨)〉을 읽을 때마다, 가수 백설희가 노래한 <봄날은 간다>가 떠오른다. 검색해보니 손로원 작사·박시춘 작곡·1953년 발표라고 한다. 내가 아는 대중가요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랫말이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 오늘도 꽃 편지 내던지며 /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 /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우리나라 대중가요 <봄날은 간다>는 중국 남조(南朝)의 악부민가(樂府民歌) 《자야의 4계절 노래(子夜四時歌)》 중에 <봄노래(春歌)>와 전체 정서가 많이 닮아 있다. “봄 동산의 꽃은 곱기도 한데 봄날의 새는 슬피도 우는구나. 봄바람은 다정도 하여서 내 비단 치마를 불어 젖히네.(春林花多媚 春鳥意多哀 春風復多情 吹我羅裳開)”

여튼 오늘도 ‘봄날은 간다’를 흥얼거리면서 서럽고 아쉬웠던 지난 추억을 돌아보며, 인간과 영원히 함께 할 고전을 음미(吟味)해 본다.

● 다음 시편은 고려 말의 충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의 <군역에 끌려간 후 소식 없는 남편을 향한 아내의 노래(征婦詞)>인데, 노역을 위해 변방으로 간 남편에게 겨울옷과 편지를 보내는 아내의 정성이 스며있다.

유복자 아들이 장성하고 생사여부도 알 수 없는 남편에게 매번 옷 한 벌을 지어 보내는 한국 여인네의 인고의 표징(表徵)을 담아내었다. 더욱이 기막힌 사연이 있다. 심부름을 보내는 아이는 남편이 떠날 때 뱃속에 있었는데 그 아이가 장성하여 아직 생면도 하지 않는 아버지 옷을 부치려 다닌다. 그 지나간 세월이 얼마였는지  내용의 구구절절함은 여인의 기다림이라는 단어에서 엿보게 되는 은근과 끈기로 참아낸 한국 여성의 전형을 보게 된다.

2) 군역에 끌려간 후 소식 없는 남편을 잊지 못한 아내의 노래[征婦詞] 절구 2수(二絶) / 정몽주(鄭夢周 1337~1392)

一別年多消息稀 한번 이별한 뒤로 여러 해 소식이 드무니

塞垣存歿有誰知 변방에서의 생사 여부를 누굴 통해 알겠소

今朝始寄寒衣去 오늘아침에야 이 애 편에 겨울옷을 부치오니

泣送歸時在腹兒 울며 보내고 돌아올 때 뱃속에 있던 아이라오

織罷回文錦字新 회문(回文)을 짜고 보니 비단 글자가 새로운데

題封寄遠恨無因 봉함하여 부치려 하나 인편 없어 한스럽소.

衆中恐有遼東客 사람들 중에 혹시 요동 나그네 있을까 하여

每向津頭問路人 매양 나루터 머리에서 행인들에게 묻는다오.

[주1] 정부(征婦) : 변방에 수자리 살러 간 사람이나, 군역에 끌러간 후 소식 없이 홀로 사는 아내를 일컫는 말이다.

[주2] 회문(回文) : 한시체(漢詩體)의 하나인 회문시(回文詩)의 준말로, 남편을 그리워하는 아내의 편지 혹은 시편을 뜻한다. 전진(前秦) 때 두도(竇滔)가 진주 자사(秦州刺史)가 되었다가 멀리 유사(流沙)로 쫓겨나자, 아내 소씨(蘇氏)가 그를 그리워하여 〈회문선도시(廻文旋圖詩)〉를 비단으로 짜서 보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직금시(織錦詩)라고도 하는 이 시체는 시구(詩句)를 바둑판의 눈금처럼 배열하여 끝에서부터 읽거나 또는 중앙에서 선회(旋回)하여 읽어도 문장이 되고 평측과 압운도 서로 맞는다.

○ 위 <정부원(征婦怨)>은 ‘支’ ‘眞’ 운(韻)의 칠언절구(七言絶句) 2수(二絶)이다. 저자 정몽주(鄭夢周)의 강남곡(江南曲)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고악부(古樂府)를 모방한 의고악부(擬古樂府)로, 수자리 간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간절한 소망을 편지형식으로 띄운 시이다. 수자리 간 남편은 한번 가더니 생사여부도 소식도 없다. 날씨가 추워지면 해마다 그러했듯이 남편에게 겨울옷을 부치는데 그 옷을 부치러 관청에 가는 사람은 다름이 아니라 남편과 울며 헤어질 때 뱃속에 있던 아이다. 그 유복자가 이렇게 자랐으니 남편과 헤어진 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수광(李?光 1563~1629)은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이 시는 결구는 아름답지만 기구가 매우 졸렬하여 결코 당조(唐調)가 아니다.’라고 혹평했던 시(詩)이다.

● 다음 시 <군인 아내의 원성(征婦怨)>은 ‘微’ 운(韻)의 칠언절구(七言絶句)이다. 전형적인 ‘선경후사(先景後事)’의 시상(詩想)을 전개하는 방식인데, 전반부는 자연 또는 사물을 묘사하고 후반부는 그것을 보고 느낀 시인의 감정이나 생각을 서술하였다. ‘음력 9월의 변방에는 날이 추워져 서리도 내리고 기러기도 남으로 날아간다. 적과 대치하고 있는 전장(戰場)은 한창 전투 중이다. 군인의 아내는 남편이 죽은 줄로 모르고 겨울옷을 손질하고 있다. 여인의 안타까운 심정을 읊었다.

3) 전쟁에 나간 남편을 둔 아내의 노래[征婦怨] / 석주(石洲) 권필(權  1569~1612)

交河霜落雁南飛 교하(변방)에 서리 내려 기러기 남쪽으로 날건만

九月金城未解圍 구월에도 금성(金城)은 포위가 풀리지 않았어라

征婦不知郞已沒 아내는 낭군이 이미 전몰한지도 모르고

夜深猶自?寒衣 밤 깊도록 여전히 겨울옷을 다듬질하누나.

○ 한양대 정민 국어국문학 교수는 “한시(漢詩)에 한정해서 말한다면 석주(石洲) 권필(權?)이 그의 스승 송강(松江) 정철(鄭澈)에 보다 더 뛰어나다 할 수 있으며 조선을 통 털어서 다섯 손가락에 드는 대문장가다.” 그리고 “선생은 44세의 길지 않은 삶을 사는 동안 격동하는 역사의 중심에서 시대의 모순과 질곡에 맞서 평생 포의(벼슬이 없는 선비)의 꼿꼿한 선비정신과 방외인적 처세로 일관한 삶을 살았다.”고 했다.

● 다음 한시 <군역을 간 남편을 둔 아내의 원성(征婦怨)>은 ‘支’ ‘眞’ 운(韻)의 오언시(五言詩)이다. 이 글의 저자 삼탄(三灘) 이승소(李承召 1422~1484)는 조선전기 문신으로, 사서의 간행·보급 및 교육의 강화와 함께, 신숙주(申叔舟)·강희맹(姜希孟) 등과 함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편찬했던 인물로, 문장으로도 이름이 높았으며, 예악·병형·음양·율력(律曆)·의약·지리(地理) 등에도 능통한 만능 재능인이었다.

이 시의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4구에서는 봄날 원림(園林)에 맑은 정취 일 때, 변방에 군역으로 보낸 남편을 둔 여인이, 섬돌 앞 꽃떨기 위에 쌍쌍의 나비가 장난치는 모습을 통해 그리운 남편을 보고픈 애틋한 마음을 그렸다. 다음 4구에서는 만 리 밖 변방에서 군역의 의무를 행하는 남편의 소식이 없자, 여인은 남편이 언제 돌아올는지  점을 쳐보기도 한다. 마지막 2구에선 ‘세월은 흘러가고 곱고 젊던 얼굴은 어느새 쇠하여 주름져간다. 깊은 봄날 밤에 거울 잡고 남모르게 절로 눈물을 흘린다.’ 애잔한 여인의 안타까운 심정을 노래했다.

4) 군역에 변방을 간 남편을 둔 아내의 원성[征婦怨] 왕유의 운을 썼다(用王維韻) / 이승소(李承召 1422~1484)

淑景動園林 좋은 경치 원림 안에 일렁이거니

閨婦多幽思 규방 속의 여인 깊은 생각이 많네

階前??花 섬돌 앞에 달려 있는 꽃떨기에는

留連雙蝶  쌍쌍으로 나비 날며 장난치누나

夫壻在萬里 남편 멀리 만 리 밖에 나가 있거니

揚鞭隨驃騎 채찍 치는 날랜 말 뒤를 따라가리라

擲錢卜歸期 돈을 던져 돌아올 날 점을 치고는

?望何時至 어느 때나 올까 슬피 바라다보네

容華日以減 고운 얼굴 날로 더욱 쇠하여지니

擡鏡暗垂淚 거울 잡고 남모르게 눈물 떨구네

[주1] 왕유(王維, 699~759) : 중국 성당(盛唐)의 시인·화가로서 자는 마힐(摩詰)이다. 그는 자연시의 대가이면서 설경산수화로도 유명했으며, 가장 유명한 작품은 〈망천도 輞川圖〉라는 화권(畵卷)이다.

[주2] 돈을 던져 점을 치고 : 돈을 던져서 육효(六爻)를 구성하여 길흉화복을 점치는 것을 말한다.

● 다음 한시는 조선전기 대표적인 관료 문인이었던 허백당(虛白堂) 성현(成俔 1439~1504)의 <전쟁에서 죽은 남편과 아들을 원망하며(征婦怨)> ‘庚’ 운(韻)의 칠언율시(七言律詩)이다. 이 시(詩) <정부원(征婦怨)>는 악부 中에 신악부사(新樂府辭) 잡제(雜題) 중의 하나로써 앞서 소개한 당나라 맹교(孟郊), 장적(張籍) 등의 작품이 있는데, 남편과 아들을 전쟁터에서 잃은 여인의 한스러운 마음을 서술한 것이다.

명나라 서사증(徐師曾)은 《시체명변(文體明辨)》에서 시문체(詩文體)를 101류로 분류하였는데, 그 중에 “가슴에 응어리가 맺혀 있지만 노여워하지 않는 것을 원이라고 한다.(憤而不怒曰怨)”면서 이런 분노와 원통한 시체(詩體)를 ‘원체(怨體)’라고 분류했다.

5) 전쟁에서 죽은 남편과 아들을 원망하며[征婦怨] / 성현(成俔 1439~1504)

夫從軍去子從行 지아비와 아들이 함께 전쟁터에 나가는데

妾今來送啼呑聲 따라 나가 전송하며 소리 죽여 울었으니

不如從軍備晨炊 전쟁터에 동원되어 밥이라도 지으면서

一身衣食同死生 먹고 입고 죽고 삶을 함께함만 못했어라.

昨夜夫爲驕虜  어젯밤에 지아비가 적군에게 찔려 죽고

今朝子亦死亂兵 오늘 아침 아들이 또 반군 손에 죽었다네

中流失船無所倚 강 위에서 배를 잃듯 의지할 곳이 없어

呼天掩淚難爲情 하늘 향해 통곡하니 이 슬픔을 어이할꼬.

● 조선중기 한문4대가(漢文四大家)였던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 1564~1635)는 어디까지나 조정의 관리로서 소임을 다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던 문신이었다. 그는 치군택민(致君澤民 임금을 도와서 백성을 윤택하게 한다)의 이상과 이문화국(以文華國 글로써 나라를 빛낸다)의 관인문학을 성실히 몸으로 실천해갔다. 이 점에서 그는 사대부 문학의 전범(典範 모범)을 보였다.

그의 이러한 태도에서 보듯 다음 소개하는 시(詩) 또한 알찬 내용과 세련된 문장으로 창작되긴 하였으나, 실제 일어난 역사적 사건, 즉 1619년 심하전투(深河戰鬪)를 배경으로 그려냈기에 극도로 자제한 시어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정부사(征婦詞)>는 ‘刪’ 운(韻)의 칠언절구(七言絶句)로, 전반부 2구에서는 남편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여인의 초췌한 모습을 그렸고, 후반부 2구에서 심하전투는 우리 군사가 대부분 몰살당했던 아픈 역사인데, 그때 참전한 20살 남편이 아직도 돌아오질 않는다고 눈물 아롱거리며 우리에게 하소연하듯 한다.

6) 전쟁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征婦詞] / 이정귀(李廷龜 1564~1635)

白?荊釵不整  흰 댕기 나무 비녀 쪽진 머리 엉클어지고

紅顔憔悴淚痕斑 초췌한 홍안에는 눈물 흔적이 아롱졌어라

郞君二十從征戍 스무 살 낭군이 전쟁터로 나갔는데

去歲深河戰未還 지난해 심하의 싸움에서 돌아오지 않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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