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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산하 서수라(西水羅), 국토의 최북단 어항(漁港)이자 군사적 요충지:내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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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산하 서수라(西水羅), 국토의 최북단 어항(漁港)이자 군사적 요충지

고영화 향토 고문학 칼럼리스트 | 기사입력 2023/05/01 [09:04]

그리운 산하 서수라(西水羅), 국토의 최북단 어항(漁港)이자 군사적 요충지

고영화 향토 고문학 칼럼리스트 | 입력 : 2023/05/01 [09:04]

우리나라 국토의 최북단 어항(漁港)인 서수라(西水羅)는 함경북도 경흥군(慶興郡) 노서면(蘆西面, 現 나진 선봉시 서수라리)에 있는 항구로 두만강(豆滿江) 어귀의 남서쪽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다. 서수라는 조선시대에 여진(女眞)·야인(野人) 등을 경략(經略)하기 위하여 서수라보(西水羅堡)가 설치되었던 곳이며, 북쪽의 굴포(屈浦)는 고려시대 북벌(北伐) 때 창기지(倉基地)였다. 당시 서수라에서부터 두만강변을 따라 수호파수(守護把守)가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되어 있었고, 강변길을 따라 올라가면 서수라 다음이 조산(造山) 그리고 굴신포(屈伸浦)를 거쳐 무이(撫夷), 원방(原防), 포항봉수(浦項烽燧), 그리고 경흥부(慶興府), 경원부(慶源府) 읍치로 연결되었다.

 

 

서수라 지형은 바닷물에 의해 퇴적된 토사가 근산(根山)을 주산으로 하는 서수라 곶(串)이 육계도(陸繫島)로 변했는데, 서수라는 이 육계도의 목(項)에 해당하는 사주(沙洲) 위에 위치한다. 시가(市街)의 중심부는 사주의 서쪽 연안인 조산만(造山灣) 쪽에 발달하였고, 방파제에 의하여 어항으로 축조되었다. 사주(沙洲)의 동안(東岸)에는 동서수라(東西水羅)가 있는데 주로 어항으로 이용되고 있다.

 

○ 또한 여기 함경북도와 러시아 국경 부근의 동해바다를 예로부터 ‘엄숙하고 곱디고운 호수바다’라 하여 슬해(瑟海)라고 불렀다. 『숙종실록(肅宗實錄)』 41년(1715) 7월 1일 조에 “이른바 슬해(瑟海)는 경흥부(慶興府)에서 동쪽으로 사오십 리쯤 떨어져 있는 바닷가다.”라고 기록되어 전한다.

 

서수라 인근에는 북편에 녹둔도(鹿屯島), 서편에 적도(赤島)가 있는데 적도는 이성계의 증조부 익조대왕(翼祖大王) 이 피난한 곳이다. 오른쪽에는 해망대(海望臺) 또는 망해대(望海坮)가 있고 동쪽 바다 바위섬 오갈암(烏曷巖)이 있는데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여기 모든 바위 봉우리는 각고개(角峙)와 마주하고 있고 두만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입구에 전암(箭巖)이 있다. 또한 봉수(烽燧)대가 위치한 우암(牛巖)이 있고 서수라 바다 가운데에 난도(卵島, 알섬)이 있어 물새들의 서식지로 유명하다.

 

부근 해안에는 좋은 어장이 발달하여 겨울의 어획기에 많은 어선이 모여든다. 대구ㆍ명태ㆍ청어ㆍ문어ㆍ홍합ㆍ해삼ㆍ다시마ㆍ미역ㆍ게 등이 많이 잡힌다. 두만강에는 송어ㆍ연어가 많고 근대에 들어 서수라 등대가 설치되었고 위급 시에 대피항으로서의 시설을 갖추었다. 여기 근해는 조류가 빠르고 짙은 해무(海霧)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각종 수산물 산출이 많아서, 일부는 서수라항으로 실어 날라 오니 부두에서는 수산제조업이 발달하였다.

 

게다가 바로 인근 두만강은 유속이 빠른 탓으로 하천에 의한 하중물질(荷重物質)이 풍부하여 하구에 충적층의 퇴적작용이 왕성하다. 그러나 수심이 깊은데다가 리만해류(海流)에 의하여 운반되는 양이 많아서 큰 삼각주(三角洲)를 형성하지는 못하였다. 이곳은 근년에 이르기까지 습지와 황무지로 돌보지 않던 곳이었으나 8·15광복 전에 배수시설이 갖추어지면서 대규모의 농장이 들어서게 되었다.

 

○ 17세기 말 함경도 6진(六鎭)의 방위(防衛)를 살피는 어사(御史) 임무를 수행했던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은 그의 문집 ≪농암집(農巖集)≫에서, ‘육진(六鎭, 회령 종성 무산 온성 경원 경흥)의 여러 진(鎭)을 두루 다니며 순찰하고 저 끄트머리에 있는 서수라(西水羅)에까지 갔다가 돌아왔는데, 그곳 서수라는 우리나라의 영토가 끝나는 곳으로서 동쪽으로는 큰 바다와 접해 있고 북쪽으로는 사막(오랑캐 땅을 비하한 말)을 바라보고 있다. “천하에 이보다 더한 장관이 없을 것이다(天下之觀 無以加此)” 한(漢)나라 장건(張騫) 박망후(博望侯)가 저 용문(龍門)에 여행했던 것이 과연 이보다 나았을지 모르겠다.’고 찬사를 연발했다.

 

○ 한편 서수라는 최전방 변경 지역이다 보니 약 500년 동안 무수한 침략과 약탈을 당했다. <조선왕조실록> 1552년(명종7년 7월)에 ‘오랑캐가 경흥(慶興) 땅 서수라(西水羅)에 침략하여 40여 사람과 가축을 살략(殺掠)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숙종실록(肅宗實錄)』 41년(1715)에 들이 넓고 땅이 비옥하여 옛날에는 국경 너머 오랑캐 ‘번호(藩胡)’가 많이 살았는데, 어떤 때는 육로(陸路)를 따라 두만강을 건너 침범해 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배를 타고 바닷길을 경유해 와서 서수라(西水羅), 조산(造山) 등의 진보(鎭堡)를 약탈했으므로, 번번이 그 피해를 받았습니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한편 조선말기 제국주의 국가들의 조선 침략이 빈발하자,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하는 서수라 지역의 중요성이 증가하여, 1881년 고종18년 서수라 권관(權管)을 서수라(西水羅) 수군만호(水軍萬戶)로 승격시켰다. 곧이어 1895년 11월14일(음) 연해주 등지로 왕래하는 선박은 반드시 서수라(西水羅)를 경유하여 납세 증명서를 받도록 하고 이를 위반하면 처벌할 것을 공포했다.

 

그리고 구한말 일본이 고종의 강제퇴위와 한일신협약의 체결, 군대를 해산함에 따라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다. 1908년 8월 4일, 함경북도 경흥 출신 엄인섭(嚴仁燮) 의병부대 30여명이, 경흥군(慶興郡) 노서면(蘆西面)에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대성조(大成組) 어장(漁場)의 서수라(西水羅) 및 상어포(霜魚浦) 어막을 습격하여 한인·일본인 포함 23명 사살했던 사건도 있었다.

 

● 그러면 지금부터 서수라(西水羅)의 지리적 역사적 특성에 대해 살펴보겠다. 먼저 서수라는 그 옛날부터 우리나라 최동북단(最東北端)에 위치한 군사적 요충지이므로 보(堡)를 쌓아 수군진영을 설치하고 권관(權管)을 두었다. 우리나라 최북단의 어항(漁港)이며 군항(軍港)이기도 하다. 서수라는 나진시와 선봉군 해안에 있는 조산만(造山灣)의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데, 조산만 안에 비파도와 적도(赤島)가 있고, 어귀에 알섬(卵島)이 있다. 조산만 연안에는 우리나라 자연호수 가운데 가장 큰 서번포(西藩浦)를 비롯한 동번포·만포(晩浦) 등의 호수가 있고, 특히 서수라는 두만강 하류에 있어 러시아와 연결되는 도로가 있다.

 

○ 이 지역이 편입된 것은 고려 말기의 일이나, 본격적인 개발은 1410년(태종 10) 이곳에 경흥부가 설치되어 동북 방면 경영의 본거지로 설정된 이후, 여러 진보가 설치되면서 부터이다. 이어 1449년(세종31) 4군 6진 개척이 완료되면서 북방 오랑캐의 노략질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당시 국경지역의 방비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서수라진(西水羅鎭)을 설치하여 성을 쌓았는데 주위가 874척이었고, 수군만호겸남부장(水軍萬戶兼南部將) 1인을 두었다.

 

이곳의 서수라 봉수(西水羅烽燧)는 경흥과 서울을 연결하는 제1거(第一炬)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곳에서 두만강을 거슬러 올라가 종성ㆍ회령을 지나 서울 목멱산에 다다른다. 또한 보발(步撥)인 서수라참(西水羅站)이 있어 위급한 사항을 경흥과 경성 지역에 알릴 수 있게 하였다.

● 다음 한시 박세당(朴世堂)의 <서수라(西水羅)>는 그의 문집 《서계집(西溪集)》 북정록(北征錄)편에 실린 글이다. 병오년(1666년 현종7) 겨울부터 정미년(1667년) 봄 사이에 함경북도 병마평사(北道兵馬評事)로 부임할 때 지은 것이다.(自丙午冬 至丁未春 以北道兵馬評事赴任時作) 내용을 보니 그는 아마 바닷가 모래벌판을 따라 우리 땅 바닷가 끄트머리 항구 서수라로 왔던 모양이다. 시편에서 나라를 지키는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북방변방의 병마평사(兵馬評事)라는 직책을 수행하고자 애쓰는 모습이 느껴진다. 그는 이 시(詩) 4행의 마지막 글자 ‘地頭苦愁’를 사용해, ‘머리가 땅에 닿도록 지극히 시름하며 고생했다’고 간접적으로 자신의 격무(激務)를 묘사해 놨다.

1) 서수라[西水羅] ‘尤’ / 박세당(朴世堂 1629~1703)

來經白草黃沙地 마른풀만 가득한 모래벌판 지나서

行到天窮海盡頭 이 세상 끄트머리 바닷가에 당도했네

摠說尋常邊塞苦 변방이 고생이라 예사롭게 말하지만

不如身見始堪愁 직접 보고 시름겨운 것 말보다 더하네.

 

●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 1724~1802)는 조선 영조⋅정조 시대 고위관료를 지낸 ‘실학자로서 문명(文名)을 떨친 뛰어난 문장가(文章家)’였다. 그의 현실인식과 실천 가능한 방안의 제시는 실학자로서 실학 전반에 걸친 새로운 모색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는 사상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북학사상 목민사상 역사지리인식 화폐경제론 등의 실학사상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실천 가능한 정책을 구상 제시하였다. 그가 쓴 지방 수령지침서 <목민대방(牧民大方)>는, 1778년(정조 2) 경흥부사로 재임하면서 저술한 것으로, 수령으로 부임하는 사람들을 위한 목민서이다. 그리고 그의 문학론은 자연스런 천기(天機)의 발현으로 집중되었고,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많은 저술을 남겼다.

 

○ 다음 소개하는 가요(歌謠) <서수라(西水羅)>는 실학자 홍양호(洪良浩)의 문집 ≪이계집(耳溪集)≫ 권2(卷二) 『북쇄잡요(北塞雜謠)』에 수록돼 있는 작품이다. 홍양호는 1777년 겨울(丁酉冬)에 경흥부사(慶興府使)로 출보(黜補)되었고 그의 함경도 작품은 대개 1778년에 쓰인 것들이다.

2) 서수라[西水羅] ‘語’ 운(韻) 가요(歌謠)/ 홍양호(洪良浩 1724-1802)

西水羅海望臺 서수라 바다를 살피는 망대

烽火初起處 봉화를 처음 올리는 곳

嗟爾烽臺卒 자, 너희 봉화 망대 수졸들이여~

每日午時宜燃炬 매일 오시(午時)에 마땅히 횃불을 올려야한다.

此去王京三千里 여기서 서울까지는 3천리라,

日暮始過鐵嶺去 해 저물어야 겨우 철령 고개를 지나간다네.

 

○ 조선시대 육진 파수좌(六鎭 把守坐)가 있었는데, 이는 함경북도 6진에서 경계하여 지키는 여러 곳을 일컫는 말이다. 즉 서수라해망대(西水羅海望臺), 조산고두산(造山古豆山), 경흥대우석(慶興大友石) 등이다. 서수라(西水羅)에는 바다를 살피는 망대(望臺)가 있었고 봉화(烽火) 불을 처음 올리는 봉수대도 있었다. 여기에서 한양의 아차산⋅목멱산까지 봉화 불이 약 하루 정도 걸렸다. 매일 한낮에 평온한 상태에서도 불을 피우는 것은, 혹시 봉수대가 적에게 점령당하여 불을 피우지 못할 상황을 가정하여 피우는 것이다. 즉, “오늘도 이 봉수대는 평화롭습니다.”라는 뜻으로 불 하나를 피우는 셈이다.

 

● 홍양호(洪良浩)의 『북새기략(北塞記略)』 <공주풍토기(孔州風土記)>에 의하면, “서수라(西水羅)가 속한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 경내에는 4진(鎭)을 설치하였다. 북쪽 26리에 무이보, 남쪽 35리에 조산보, 서쪽 37리에 아오지보, 남쪽 60리에 서수라보가 있으니 만호와 권관을 두었다. 경흥의 적지(赤池, 길이는 8리, 넓이는 3리 가량)에는 붕어가 많고 조산포에는 숭어와 향어가 많이 난다. 두만강에는 송어 연어가 많은데 연어는 그 길이가 수 자에 이른다. 청어와 대구는 그물로 잡고, 명태는 낚시로, 문어는 작살로, 홍합과 해삼은 갈고리로, 다시마와 미역은 바다 암초에서 3,4월 달에 채취한다. 서수라 바다 가운데 한 섬에 온통 물새들이 서식한다. 풀 사이에 알을 낳는데 그 크기가 주먹만 하고 색깔은 푸르거나 희거나 누렇거나 아롱지거나 다양하다. 어민들이 주워서 갈라먹는데 그 껍질을 잔으로 쓸 만하다. 그래서 난도(卵島, 알섬)라 부른다.” 다음 <서수라기(西水羅記)>는 홍양호가 1778년 경흥부사 재임 시에 직접보고 들은 바를 기록한 것이다.

3) 서수라기[西水羅記] / 홍양호(洪良浩 1724-1802)

함경북도 경원(孔州)에서 동쪽으로 30리를 가면 조산(造山)이 있는데 산에다가 보(堡)를 만들었다. 바야흐로 계곡물이 바다로 들어가는 동쪽 20여리에, 산이 끝나고 물이 바다에 합쳐져 끊어질 듯한 오목한 곳에, 갑자기 솟아난 듯한 석성(石城)이 있는데 산을 등지고 바다를 안고 있다. 쓸개를 걸어 길게 늘어놓은 듯, 마치 날개를 멀리 펼쳐놓은 듯한 바로 이곳이 서수라(西水羅)이다. 그 오른쪽에는 해망대(海望臺)가 있고 왼쪽에는 오갈암(烏曷巖)이 있다. 모든 바위 봉우리가 각고개(角峙)와 마주하고 있고 양쪽 끝에 총총하게 서 있는 바윗돌은 물속에서 서로 분리되어 대나무 묶음처럼 떼로 서 있다. 이를 이름하여 전암(箭巖)이라 한다.[참고 : 전암(箭巖)은 우리나라 국토의 끝이요 두만강이 동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 곳에 있다] 물이 그 안으로 돌아 흐르니 그 형상이 마치 반원형의 패옥 같다. 그 동쪽으로는 이지러진 태양이 솟아오르니 가히 볼만 했다. 거주하는 주민의 집이 백여 호는 될듯한데 모두 고기잡이를 업으로 한다. 어선은 모두 나무못으로 박아 합쳐 만들었는데 대부분 사람 몸길이의 곱절에 불과하다. 물고기는 가자미 대구어 문어가 대다수다. 패류는 담채(홍합)가 있고 진흙의 물고기는 모두 비늘이 없다. 해초류 미역, 곤포(다시마)가 바위를 둘러싸고 아름답게 자라난다. 껍질 있는 조개류는 백합(白蛤), 푸른 소라가 있고, 붉은 대게 큰 것은 마치 동이 같은 갑옷을 입었고 태양 빛에 곧바로 흩어진다. 어떤 물고기가 언제나 떼를 지어 물에서 유영하는데 마치 집 같은 등(背)을 반쯤 드러내고 입에서 흰 물을 뿜어내니 마치 비가 오듯 한다하여, 물었더니 고래라고 한다.

[自孔州東行三十里 爲造山堡山 始入海夾水而東二十餘里 山盡而水束 細欲斷 突如湧 有石城負山抱海 垂若懸膽 ?如張翼 是爲西水羅 其右翼曰海望臺 左翼曰烏曷巖 皆石峰相對角峙 兩端有叢石離立水中簇如束竹 名曰箭巖 水?其內 形如半璧 缺其東 可觀日出 居民可百  皆業漁 船皆全木釘合 長不過倍人身 其魚多比目 大口 八梢 其蟲淡菜泥皆無鱗 其菜水藿昆布 絡石麗生 互物白蛤 翠螺 紫蟹大者 甲如盆 日光初舒 有長魚?游於水 背半露如屋 口噴白浪如雨 問之鯨云]

● 다음 시(詩) <서수라(西水羅)>의 저자 조영순(趙榮順)은 1763년에 약 1년간 종성부사를 역임했다. 그 뒤 호조참판까지 올랐으나 1772년 11월 소론의 영수 최석항(崔錫恒)의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을 상소하였다가 관직을 삭탈당하고 경흥에 약 1년 6개월간 유배되었다가 1774년 5월에 풀려났다.

다음 <서수라(西水羅)> 7언절구는 그가 10년 전 종성부사 시절에 여기 서수라를 방문 했었는데, 1773년 1월(음력)에 경흥부 서수라로 유배되어, 재차 다시 왔던 당시의 감회를 읊은 시이다. 경흥부 서수라에 있는 누각에 올라 광활한 북해(동해)바다를 보고 있자니 온갖 감회가 일어나면서 앞으로 귀양살이 걱정에 수심만 가득하다.

4) 서수라[西水羅] ‘尤’ 운(韻) / 조영순(趙榮順 1725~1775)

三十年來萬里遊 30년 동안 만 리를 떠돌다가 돌아와

春風再度仲宣樓 봄바람 불 때 재차 중선루에 올랐어라.

桑蓬志氣今華髮 큰 뜻과 기개를 품었던 사내가 이제 백발노인이 되어

海?雲長始欲愁 넓은 바다에 장활한 구름 보니 비로소 수심에 빠져드네.

[주1] 중선루(仲宣樓) : 중선은 삼국 시대 위(魏)나라 왕찬(王粲)의 자. 왕찬이 동탁(董卓)의 난(亂)에 형주(荊州)로 피란하여 유표(劉表)에게 의지해 있을 때 강릉(江陵)의 성루(城樓)에 올라가 고향에 돌아갈 것을 생각하면서 진퇴위구(進退危懼)의 정을 서술하여 등루부(登樓賦)를 지은 데서 온 말이다.

[주2] 상봉지기(桑蓬志氣) : 남자가 세상을 위하여 공을 세우고자 하는 큰 뜻과 기개

● 다음 시(詩)의 저자 김창협(金昌協)은 17세기 말에 함경도 육진(六鎭)의 방위(防衛)를 살피는 어사(御史) 임무 띠고 강원도를 지나 함경남도 영흥, 북청, 마운령, 함경북도 마천령, 길주, 명천, 귀문관, 경성, 무산, 회령, 방원, 종성, 동관진, 황자파, 훈융진, 동성, 무이보, 경흥, 서수라에 도착하였고 이후 경성으로 곧장 되돌아갔다. ‘서수라(西水羅)는 경흥(慶興) 남쪽 60리 지점에 있는데 지세가 외지고 바다 속으로 곧장 뻗어 있다. 육진(六鎭)의 막다른 곳이다.(在慶興南六十里 地勢孤絶 直入海中六鎭窮處也)’

다음은 ‘先’ 운(韻)의 5언율시 <서수라(西水羅)>이다. 김창협(金昌協)이 함경도 6진을 둘러보는데, 태평한 세상에 든든한 국경의 수비에다, 산천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니 마음에 사무치는 감정이 그지없음을 그려낸 시편이다.

5) 서수라[西水羅] / 김창협(金昌協 1651∼1708)

列鎭橫千里 천리 땅 여러 진이 뻗어 있는데

孤城寄一偏 성채 하나 한쪽에 솟아 있구나

華夷地俱盡 중국 땅 오랑캐 땅 모두 끝나고

東北海無邊 동북으론 바다가 끝이 없어라

防戍猶平世 국경 수비 덕택에 태평한 세상

登臨且壯年 장년 나이에 국토 승지 유람하네

茫茫今古意 아득하다 고금 세월 생각해보니

感慨此山川 무엇보다 이곳 산천 감개무량해

 

●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은 위 시의 저자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의 동생이다. 그는 병신년(丙申年, 1716년 숙종 42년) 봄에 함길도 지역 역리 길을 따라 북방 6진(六鎭)을 약 4개월에 걸쳐 모두 둘러보았다. 그는 국토의 최북방을 유람하면서 자신이 들리었던 곳마다 간단한 기행시(紀行詩)를 남겼다.

 

다음 소개하는 2편의 <서수라(西水羅)> 7언 율시로 그 여행 도중에 쓴 글인데 국토의 최북단 항구 서수라(西水羅) 주위의 오갈암(烏曷巖), 녹둔보(鹿屯堡), 슬해(瑟海), 팔지(八池), 적도(赤島), 난도(卵島, 알섬) 등의 명승지를 전부 언급하여, 당시의 지리를 살필 수 있는 유익한 글임에 틀림없다.

6) 서수라[西水羅] 첫번째(之一) ‘尤’ 운(韻)/ 김창흡(金昌翕 1653~1722)

征鞍離合豆江流 나그네 안장을 다시 장착하고 흐르는 두만강을 따라

屈曲隨身到海頭 이리저리 꺾이는 길을 쫓아가니 바다 초입에 이르렀다.

烏渴峰前乍明滅 오갈암(烏曷巖) 봉우리 앞에 불빛이 보였다 안 보였다하나

鹿屯堡下莫夷猶 녹둔보(鹿屯堡) 아래에선 머뭇거리지 말라

山河主客新盟在 산하(山河)에서 주인과 객이 새로운 맹세를 한 바 있는데

漢虜輸?古壘留 한나라 군사와 오랑캐가 다투던 옛 성곽만 남았네.

誰拓靑丘呑瑟海 누가 슬해(瑟海)를 삼키는 청구(靑丘)를 개척하랴마는

八池容我采蓮舟 나를 연밥 따는 배를 타고 팔지(八池)로 가도록 해줬다.

[주1] 오갈암(烏曷巖) : 서수라(西水羅) 동쪽 바다에 있는 바위 섬.

[주2] 녹둔보(鹿屯堡) : 우리나라 최북단 두만강 하류 녹둔도에 있는 농보(農堡)

[주3] 청구(靑丘) : 예전에,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이르던 말. 남해에 신선이 살고 있다는 곳. 동방에 있는 땅의 이름.

[주4] 슬해(瑟海) : 우리나라 함경북도와 러시아 국경 부근의 동해를 가리킨다.

[주5] 팔지(八池) : 두만강 하류 너머 중국 땅 8개 못을 일컬음. 경흥 서봉대에 오르면 들 가운데 보인다. 경흥에서 동북으로 30리 거리에 위치한다.

 

○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은 형 김창협(金昌協)과 함께 성리학과 문장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고, 이기설에서는 이황(李滉)의 주리설(主理說)과 이이(李珥)의 주기설(主氣說)을 절충한 형 김창협과 같은 경향을 띠었다. 즉, 선한 정(情)이 맑은 기(氣)에서 나온다고 말한 이이의 주장에 반대하고 선한 정이 오직 성선(性善)에서 나온다고 말한 형 김창협의 주장에 찬동하였다. 또한 사단칠정(四端七情)에서는 이(理)를 좌우로 갈라 쌍관(雙關)으로 설명한 이황의 주장에 반대하고, 표리(表裏)로 나누어 일관(一關)으로 설명한 이이의 주장을 찬성하였다. 신임사화로 거제도에 유배된 형 김창집(金昌集)이 사사되자 지병이 악화되어 그 해에 죽었다.

7) 서수라[西水羅] 2번째(之二) ‘魚’ 운(韻)/ 김창흡(金昌翕 1653~1722)

玄??交析木墟 정북방으로 오고가던 해 돋는 동쪽 끝 땅인데

豆江流盡地無餘 두만강물이 흐르다 땅이 끝나는 지점에 있다.

北來足目今俱到 북으로 와서 충분히 빈틈없이 둘러 보고난 후

東望天溟一太  바라본 아득한 동쪽바다는 일대 우주의 허공이었다.

白鳥多圍征馬舞 백조들이 먼 길 가는 말을 둘러싸고 춤을 추고

彩霞遙逐晩帆舒 아름다운 노을이 멀리서 따라와 저물녘 돛을 펼치네

明朝赤島尋王跡 내일 아침 적도(赤島)에서 제왕의 공업(功業)을 찾아보려니

分付?師利涉余 나이 든 뱃사공이 말하길, 때를 기다려 건너는 것이 이롭다네.

[주1] 현효(玄?) : 이아(爾雅) 석천(釋天)에, “玄?虛也”라 한 그 주에, ‘정북방에 있는 별의 이름이다.’고 했음. 즉 허성(虛星)의 별칭. 또는 12월에 모이는 별이름

[주2] 석목(析木) : 별자리 이름. 기성(箕星)과 두성(斗星) 사이 은하수 가에 있다. 해 돋는 동쪽 끝을 일컫기도 한다.

 

[주3] 적도(赤島) : 서수라 서쪽 바다에 위치한 섬으로, 이성계의 증조부 익조 대왕(翼祖大王) 이 피난한 곳이다. 섬에는 붉은 바위가 솟아 있고 울창한 숲 가운데 움푹 들어간 굴이 있다. 익조가 살던 굴이라고 한다. 섬 남쪽에는 난도(卵島, 알섬)이 있고 북쪽에는 세 개의 기암이 옆으로 나란히 서 있다. 수천 마리 백로 떼와 갈매기가 무리지어 왕래하는 모습이 장관이다.<북정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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