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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조 이희보(李希輔), 시적 재능을 왕의 유락(遊樂)에 영합하다?

궁녀를 애도하며[輓宮媛] / 이희보(李希輔 1473~1548)

고영화(高永和) | 기사입력 2021/07/02 [08:07]

연산조 이희보(李希輔), 시적 재능을 왕의 유락(遊樂)에 영합하다?

궁녀를 애도하며[輓宮媛] / 이희보(李希輔 1473~1548)

고영화(高永和) | 입력 : 2021/07/02 [08:07]
궁녀를 애도하며[輓宮媛] / 이희보(李希輔 1473~1548)
고영화(高永和) 칼럼리스트 

 

연산조 이희보(李希輔), 시적 재능을 왕의 유락(遊樂)에 영합하다 고영화(高永和)

조선조 폭군 연산군(燕山君 1476~1506)이 시인(詩人)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연산군은 수많은 한시를 지은 시인이었으나 중종반정으로 인해 그의 자제시집(自題詩集)이 불태워졌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의 실록인 "연산군일기"에 120여 편의 시가 등재되어 있어 그의 시적 재능을 살펴보는 데는 아무 불편함이 없다. 비록 연산군의 치세가 난정의 시대임이 분명하다고 해도 그가 시적인 상상력과 시적인 감수성으로 무장한 시인이었음에는 틀림없다.

그러한 난세(亂世) 연산군 시절에 왕의 총애를 받고 왕의 유락(遊樂)에 영합한 문신 안분당(安分堂) 이희보(李希輔 1473~1548)가 있었다.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 1454~1504)의 문인이자, 오천군(烏川君) 이사종(李嗣宗)의 사위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고 기억을 잘하였고 글재주가 있었다. 1501년(연산7) 문과에 급제하여 1503년 주서가 되었다. 그의 장인 이사종이 연산군의 나인 장녹수(張綠水)의 딸을 길렀다. 이로 인해 연산군의 총애를 받아 홍문관수찬, 이조정랑, 내수사별제가 되었지만, 1506년 중종반정 후, 직제학이 되었으나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이듬해 파직되었다. 1509년 다시 기용되어 연서도찰방·선산부사·나주목사·여주목사·부평부사·파주목사 등등 외직을 역임하다가 동지중추부사를 끝으로 공직을 마감했다.

● 조선전기의 문신 이희보(李希輔)의 <안분당시집(安分堂詩集)>은 2권 1책으로, 고시(古詩) 37편, 율시 절구 등 67편, 총 104편의 한시가 실려 있다. 문장에 아주 능했던 그는 머리도 명석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는 폭군 연산군에게 자신의 문학적인 재능을 헌사하고 총애를 받았던 과오(過誤)를 저질러 결국 외직을 전전하다 잊혀져간 문사(文士)로 역사에 남았다. 그런고로 그는 자신의 시편을 통해서 연산조 시절에 자신의 시적 재능이 이백에 비견될 정도로 자부심을 내비쳤지만, 폭군의 시대를 반성치 못한 그의 태도와 처신은 비판받아도 마땅하다 하겠다. 그러나 중종 때 그가 지방관으로써 보여준 애민정신은 그나마 그를 조선조 문인(文人)으로서 당당히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만들었다.

○ 다음 소개하는 두 편의 7언 절구 ‘궁녀를 애도하며(輓宮媛)’, ‘병중에 감회를 쓰다(病中書懷)’는, 궁중 문인 이희보(李希輔)가 연산조 때 왕이 총애하던 희첩의 만시(輓詩)를 써서 연산군의 상찬(賞讚)을 받았던 애도시(哀悼詩) 한 편과, 만년에 지난날 자신의 시적 재능을 회상하면서 연산조의 일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늙고 병든 몸으로 다시 시를 짓는 감회를 드러낸 시(詩) 한 편이다.

1) 궁녀를 애도하며[輓宮媛] / 이희보(李希輔 1473~1548)

宮門深鎖月黃昏 궁문이 깊게 닫히고 달은 황혼이더니

十二鍾聲到夜分 열두 번 종소리에 한밤이 되었네.

何處靑山埋玉骨 청산 어느 곳에 옥 같은 뼈를 묻으려나?

秋風落葉不堪聞 가을바람 낙엽 소리 차마 듣지 못하겠네.

[주1] 궁원(宮媛) : 궁중에 있는 여관(女官). 곧 궁녀.

[주2] 월황혼(月黃昏) :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달이 뜰 때 그 빛이 어슴프레하면서도 누런데, 그것을 월황혼이라 한다고 했다.

[주3] 청산(靑山) : 여기서는 묘지를 가리킨다. 소식(蘇軾)의 시에 용례가 있다.

○ 칠언절구로 ‘문(文)’ 운(韻)인 이 시는 연산군이 총애하던 궁녀가 죽자 슬퍼하다가 신하들을 불러 애도하는 시를 짓게 했는데, 그때 이희보(李希輔)가 이 시를 지어 바치자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이 시로 인해 선비들의 비난을 받았다. 그는 글재주가 있어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으며 중국사신의 접반사(接伴使)로도 활약했다. 그러나 중종반정 이후 사헌부의 반대로 중앙관직에 오르는 데 여러 번 좌절을 당하였고 지방의 수령으로 돌았다. 그러한 고난의 빌미가 된 것이 이 시다.

기(起)구는 궁궐의 적막한 분위기다. 해가 져서 궁궐 문이 닫히고 달이 떠올라 어슴푸레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사랑하는 궁녀를 잃고 슬픔에 잠긴 왕의 심정을 담았다. 승(承)구는 몹시 슬퍼하는 왕의 모습이다. 왕은 슬픔에 빠져 한밤중이 되도록 잠들지 못하고 열두 번의 종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이수광(李?光)은 <지봉유설>에서 “이른바 열두 번 종소리의 출처를 알 수 없다. 억지로 지어낸 말이 아닌가?(所謂十二鍾聲 未詳出處 豈强造語耶)”라고 의심했다. 한밤중이 되도록 상심해 잠 못 들다가 여러 번의 종소리를 들었다는 뜻일 게다. 전(轉)구는 궁녀의 죽음을 의문법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사랑하던 궁녀의 옥 같은 뼈가 청산 어느 곳에 묻혔느냐고 물어 궁녀를 잃은 임금의 슬픔을 강조하였다. 결(結)구는 임금의 지극한 슬픔이다.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낙엽 소리가 아리땁던 궁녀의 죽음을 상기시키므로 그 소리를 차마 듣지 못하겠다고 했다. 궁녀를 잃은 임금의 슬픔을 절절하게 표현해서 시를 알았던 연산군의 마음에 들었고, 그로 인해 벼슬이 올랐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2) 병중에 감회를 쓰다[病中書懷] / 이희보(李希輔 1473~1548)

金花?上牧丹詞 꽃종이 위에 모란사를 지으니

太白聲名動彩眉 이태백의 명성이 임금님을 감동시켰지

病裏如今輸歲月 지금은 병들어 세월만 보내는데

一年聊復一題詩 일 년 만에 다시 한 번 시를 지어보네.

[주1] 금화전(金花?) : 금니(金泥)로 장식한 종이. 《양태진외전(楊太眞外傳)》에 의하면 당 현종(唐玄宗)이 일찍이 밤중에 양귀비(楊貴妃)와 함께 모란을 완상하면서 갑자기 이귀년(李龜年)에게 명하여 이백(李白)에게 금화전을 내려서 청평사(淸平詞)를 짓게 했다고 한다.

[주2] 모란사(牡丹詞) : 이백이 지은 〈청평조사(淸平調詞) 3수〉를 가리킨다. 개원 연간 궁궐에 모란을 많이 심었는데, 침향정 앞에 꽃이 화사하게 피었을 때 현종이 이백에게 시를 짓게 하자 지어 바친 작품이다. 양귀비가 이를 기뻐하며 칠보 술잔에 포도주를 담아 건넸다 한다.

[주3] 채미(彩眉) : 팔채미(八彩眉)의 준말. 《공총자》 ?거위(居衛)?에서 유래. 성인(聖人)이나 임금의 대칭(代稱)으로 쓰였다.

○ 연산군이 총애하던 희첩의 만시를 써서 연산군의 상찬(賞讚)을 받았던 궁중 문인 이희보(李希輔)가 만년에 지은 칠언절구로 ‘지(支)’운이다. 지난날 자신의 시적 재능을 회상하면서 늙고 병든 몸으로 다시 시를 짓는 감회를 드러내었다. 전반부(기구, 승구)는 당나라 현종 개원(開元) 연간에 궁궐의 침향정(沈香亭) 앞에 모란꽃이 화사하게 피었을 때, 이백(李白)이 황제의 명에 따라 ‘청평조사(淸平調詞)’ 세 수를 지어 금니(金泥)로 장식한 금화전(金花?)에 써 바치니, 양귀비(楊貴妃)가 이를 기뻐하며 칠보 술잔에 포도주를 담아 건넸다는 이야기를 쓴 것이다.

이 고사를 인용한 것은 자신이 연산군의 명에 따라 궁녀의 죽음을 애도한 시를 지어 칭찬을 받은 사실을 암시하기 위해서이다. 자신의 시적 재능이 이백에 비견될 만했다는 자부심에서 비롯된 말이다. 후반부(전구, 결구)는 앞 구절에 대한 대조다. 지난날은 영광스런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늙고 병들어 시(詩)도 1년에 한 편을 지을까 말까 한다는 탄식이다. 자신의 영광과 쇠락을 작시 능력에 연결하여 대조시킨 점에 묘미가 있지만, 그가 연산조의 일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은 폭군의 시대를 반성치 않았다는 증거이므로 그의 태도와 처신에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3) 봄날 우연히 읊다[春日偶吟] / 이희보(李希輔 1473~1548)

錦繡千林鳥亦歌 비단에 수놓은 듯한 온 숲에 새들 또한 노래하고

天工猶自喜繁華 하늘이 가히 스스로 조화를 부려 번화하니 기쁜데

門前枯木無枝葉 문 앞의 고목(枯木)엔 가지와 잎이 없었으나

春力無由著一花 봄의 힘으로 괜스레 한 송이 꽃을 피웠네.

● 다음 소개하는 두 편의 서사적 기사시(記事詩), ‘농사짓는 늙은이의 노래(田翁歌)’와 ‘겨울비에 탄식하다(冬雨嘆)’는 이희보의 <안분당시집(安分堂詩集)>에 나오는 애민시로써, 그가 지방관으로 전전할 때 지은 시편들이다. 첫 번째 작품은 관의 횡포로 위기에 몰린 늙은 농민의 삶을 그렸고, 두 번째는 폭우로 쏟아진 겨울비와 관리들의 횡포를 풍자적으로 그려내었다. 두 편 다 지역 아전들의 횡포와 자연재해로 인해 살기 어려운 실상을, 시골의 한 촌로(村老)를 화자로 삼아, 민중의 고난과 그들의 실상을 고발하였다.

4) 농사짓는 늙은이의 노래[田翁歌] / 이희보(李希輔 1473~1548)

窮鄕歲暮霜霰集 궁한 시골 세밑에 서리 싸락눈 쌓이고

孤鴻抱飢鳴相及 외기러기 주린 배 안고 우는 소리 들리네.

西隣老翁夜不寐 서쪽 이웃 노인 밤에 잠 못 이루고

聞雁起坐中夜泣 기러기 소리 듣고 일어나 한밤중에 흐느끼네.

年荒田畝少所收 흉년들어 밭이랑에 거둘 것 적으니

千頃穫盡無一粒 천 이랑 다 거두어도 나락 한 톨 없네.

老翁卒歲嘆無資 늙은이 세밑에 양식 없음을 탄식하고

里胥催科星火急 마을 아전 세금 독촉이 성화처럼 급하네.

脫袴買鷄犁買漿 바지 벗어 새옷 입고 닭, 쟁기, 간장 사서

慮淺欲緩須臾殃 세금 덜자던 얕은 생각이 곧 재앙이 되었네.

但願速死不對吏 다만 빨리 죽어 아전 보지 않기 바라고

不願生見明年康 살아서 명년에 풍년 보기 원치 않네.

年康不見實老腹 풍년에도 노인 배부른 것 보지 못했고

年凶不聞虛官倉 흉년에도 관의 창고 비는 것 보지 못했네.

倉實徵租更急急 창고가 차도 세금징수 더욱 급하고

腹虛驅役愈忙忙 배를 주려도 몰아대기는 더욱 바쁘네.

若實官倉實老腹 만일 관청 창고도 차고 노인의 배 부른다면

一生終莫充飢腸 일생 주린 창자 끝내 채우지 않으리.

[주] 탈고(脫袴) : 바지를 벗다. 해진 바지를 벗어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으라는 뜻. 울음소리를 본떠서 지은 뻐꾸기의 별칭이다. 탈고조(脫袴鳥)라는 새는 바지를 벗은 새란 뜻으로, 털이 하나도 안 난, 살덩이만 있는 새다.

○ 위 시는 1527년 이희보(李希輔)가 나주목사로 있을 때 지은 것으로 짐작되는 칠언고시로, ‘집(緝)’, ‘양(陽)’ 운을 썼다. 흉년을 만나 살아나가기 어려운 실상을 한 촌로(村老)의 경우를 들어서 나타낸 것이다. 민중의 고난을 제재로 삼아 그들의 실상을 고발하는 내용인데, 그가 이런 시를 쓴 데에는 까닭이 있을 것이다. 고려 중기 김극기(金克己) 이후 선비들이 농민의 실상을 고발하는 시를 써온 전통이 있고, 그의 경우 연산조의 총신(寵臣)이라 하여 지방관으로 밀려났는데 농민의 실상을 밝힘으로써 민생정치가 이루어지지 않음을 보여주려 한 것이기도 하다.

처음 두 구는 상황설정이다. 세밑에 눈 오는 추운 날, 배고픈 기러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잠 못 이루는 노인이 자신의 신세를 생각하고 흐느끼는 것으로 시상을 일으켰다. 그 다음 세 구는 흉년과 세금 독촉에 시달리는 농민의 실상이다. “늙은이 세밑에 양식 없음을 탄식하고(老翁卒歲嘆無資)”는 암담한 현실이다. 흉년들어 쌀 한 톨 수확이 없는데 세금 독촉이 성화같고 세금을 덜어 보려는 궁리도 도리어 재앙이 되었다고 하소연하였다. 또 그 다음 세 구는 노인의 절망이다. 그는 오직 빨리 죽어서 세금 독촉하는 아전을 보지 않기를 바라며 풍년도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풍년에도 노인 배부른 것 보지 못했고 흉년에도 관의 창고 비는 것 보지 못했네(年康不見實老腹 年凶不聞虛官倉)”라는 대목에서 수탈은 강화되고 구휼은 도외시되는 실정이 대조적으로 제기된다. 그것은 풍년이 들어도 백성은 고통스럽고 흉년이 들어도 관청은 풍족하기만 하다는 것으로 정치가 잘못된 것에 대한 백성의 피맺힌 절규다. 추운 겨울에 입고 있는 의복과 생산수단인 농기구까지 팔아서 미봉을 하다니, 관의 횡포가 얼마나 가혹하고 괴로운 것이었나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관청과 관리에 대한 증오심을 드러내었다. 마지막 구는 지방 수령인 자신의 심정이다. 관의 창고도 차고 백성의 배도 부르게 된다면 자신은 차라리 굶주려도 좋다는 말이다. 당시 농민 일반 백성의 삶이 얼마나 위기상황이었던가를 이 시를 통해 그 심각성을 알려주고 있다. 이희보가 이러한 기사시(記事詩)는 쓴 이유는 아마도 당시에 정권을 장악했던 중앙집권 세력에 의해 지방외직으로 전전하는 자신의 불평을 내뱉는 말일 것이다.

5) 겨울비에 탄식하다[冬雨嘆] / 이희보(李希輔 1473~1548)

冬雨凄冬雨凄 매정한 겨울비여~ 매정한 겨울비여~

炊絶夜哭山翁妻 밥 짓는 불 꺼져 밤새 통곡한 산 늙은이 아내는

欲?橡栗充朝飢 도톨밤을 찧어 아침 허기 채우려 하는데

杵漂砧沒泥飜蹄 공이는 떠다니고 절구통은 잠겼으며 진흙은 발까지 차올랐네.

兒女索?柴門東 딸아이는 사립문 동쪽에서 저녁밥을 빌리려가고

縣吏催科柴門西 현의 아전은 사립문 동쪽에서 오며 세금을 재촉하네.

白髮山翁坐無策 흰머리 산 늙은이는 무대책으로 멍하니 앉아

怒指蒼天?白日 화를 내며 하늘 향해 손가락질 하며 밝은 해를 나무라네.

蒼天有雨不澤春田時 푸른 하늘은 비를 가지고 봄밭을 때마다 적시지 못하고

白日有光不照懸?室 밝은 해는 빛을 가지고 빈한한 집구석을 비쳐주지도 못하네.

冬雨凄 매정한 겨울비여~

陂塘水滿堤防缺 방죽에 물이 차서 제방 터질 지경이라,

明年?穰未可知 내년의 풍년일지 흉년일지 알 길이 없지만

山翁凍死唯可必 산 늙은이는 얼어 죽으리라는 것을 기필할 수 있겠네.

○ 이 시는 겨울에 때 아닌 비가 억수로 쏟아진 특수한 상황을 설정해놓고 가난하고 고생스러운 농민의 삶을 해학적 수법으로 그린 것이다. 앞의 시 ‘농사짓는 늙은이의 노래(田翁歌)’에서처럼 촌로(村老)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서술해 나간다. 촌로의 집에 양식이 거들 나서 도톨밤을 빻아 먹으려는데 물이 발까지 차서 공이는 떠다니고 절구통은 잠겼다. 이웃에 양식을 구하려 해도 조세를 독촉하는 아전이 들이닥친다. 촌로는 하늘을 가리키며 “푸른 하늘은 비를 가지고 봄밭을 때마다 적시지 못하고, 밝은 해는 빛을 가지고 빈한한 집구석을 비쳐주지도 못하느냐.(蒼天有雨不澤春田時 白日有光不照懸?室)”고 원망의 소리를 내뱉는다. 하늘과 해는 예로부터 임금을 상징한다. 자연재해라 할지라도 그 원망은 임금에게 돌아감을 알 수 있다. 전반적으로 작품 전체가 암울하고 처연한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웃음과 익살을 담고 있다. “딸아이는 사립문 동쪽에서 저녁밥을 빌리려가고 현의 아전은 사립문 동쪽에서 오며 세금을 재촉하네.(兒女索?柴門東 縣吏催科柴門西)”라는 장면을 극적으로 만들어 절망적인 상황을 익살스런 화폭으로 그려내었다. 마지막 구에 “산 늙은이는 얼어 죽으리라는 것을 기필할 수 있겠다(山翁凍死唯可必)”는 울분을 삭이는 풍자의 결어로 느껴진다. 서사적 내용은 간결해도 그 의미는 심대하며, 참담함에도 삶은 그래도 계속되어야한다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

●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남편이 지은 시를 도망시(悼亡詩)라 한다. 도망시의 목적은 실용적 기능보다는 사별한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내면 정서의 표출이라고 하는 순수 서정적 측면에 놓여있다. 유교철학으로 탄탄히 규격화된 사회에서 벗어나 아내의 안타까운 삶이나 애틋한 부부의 정, 그리고 아내를 잃은 절통한 심정을 최대한 자세하게 그리고 핍진하게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6) 죽은 아내에게 곡하며 슬퍼 애도하는 시[哭亡妻悼亡詩] / 이희보(李希輔)

“늙은 고목 거친 잡목 속에 구천 잠겼거니 고운 당신 세상 떠나 무덤 속에 잠들었네.

산머리의 밝은 달은 당신 얼굴인 것 같고 바위틈에 우는 샘물 당신의 말소리 같네.

화공 불러 그려봐도 진면목은 못 그리고 향 피워도 옛날 정혼 오게 하기 어렵다오.

당신 부디 내세에서 다시 부부 되자고 한, 우리 둘의 그 약속을 지하에서 잊지 마소.“

○ “내세에도 부부 되잔 말 잊지마소”라는 이희보의 애잔한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돈다. 소동파도 도망시(悼亡詩)를 지어 먼저 죽은 아내를 그리워했다. “슬프구나, 저 물가는 십 리에 봄인데 한 차례 꽃 지자 또 다시 꽃 피네. 저녁노을 속 작은 누각은 예와 같건만 그 당시 춤추던 사람 보이질 않네.” 아내를 잃고 홀로 남은 남자의 쓸쓸하고 허망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7) 스스로 마음을 달래다[自遣] / 이희보(李希輔 1473~1548)

爲農身老懶 농사를 짓기에 이젠 몸이 늙어 움직이기 힘든데

從宦命蹉  운명인지 벼슬길에서 헛되이 시간을 보내었다.

兩道俱相  두 길이 모두 서로 장애가 되었으니

一生餘幾何 한 생애 남은 날이 얼마나 될는지?

追隨漁釣伴 물고기를 잡으려고 낚시 친구를 뒤쫓아 가며

漂泊野人家 떠돌다 보니 시골 사람들 집에 이르렀다.

托宿無枝擇 가릴만한 것도 없는 집에 투숙하여

眞同棲後鴉 참으로 까마귀와 함께 한집에서 거처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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