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환의 여행 스케치]올올이 얽힌 질곡같은 이야기, 수덕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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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환의 여행 스케치]올올이 얽힌 질곡같은 이야기, 수덕여관
  • 편집부
  • 승인 2016.01.17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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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삶, 그 이전에 사랑과 애증이 있으며, 그 사이에 애절한 그리움이 있다. 수덕여관의 겉모습은 예전과 같지 않지만, 아직도 그들의 삶의 향기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아담한 집이다.

 

[질퍽한 삶, 사랑과 애환 그리고 그리움이 뭉친 실타래처럼 얽힌곳]

 

충청남도 기념물 제103호, ‘이응로선생 사적지’, 소설 속에서나 있을법한 이야기들을 간직한 수덕여관, 수많은 묵객이 지났으며, 객들이 지나며 많은 이야기가 있었을 ‘’수덕여관‘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중심의 등장인물이 있다. 그 이야기들은 소설 속의 잘 꾸며진 것 같은 실제의 이야기들은 지금도 구구절절하다.

 

수덕여관의 중심에는 한국미술의 거장 ‘고암 이응로’ 선생이 있다. 1944년 화백은 수덕여관을 구입하고 1959년 프랑스로 떠나기 전까지 작품 활동을 하던 곳이다. 그의 뒤에는 본처인 ‘박귀희’ 여사가 있었으며, 오로지 사랑만을 쫓은 20살이 어린 ‘박인경’ 여사가 있다.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오르면 올라가면 고암 선생의 미술계 선배이자 신여성 ‘나혜석’이 있으며, 여성해방운동에 앞장섰었으나, 여승이 되어 수덕사에 머물던 나혜석의 친구 ‘일엽스님’의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일엽스님의 아들 ‘김태신’의 이야기가 있다.

 

[나혜석, 금기에 저항한 과격함, 스스로를 나락으로 떨어트리다.]

 

1935년 10월, 신여성으로서의 사회적 고립으로 인한 정신적인 피폐, 화가로서의 전시회 실패와 경제적인 궁핍, 여기에 아들의 죽음이 더하면서 지칠 대로 지친 심신을 이끌고 40에 가까운 여성이 수덕여관을 찾았다.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서양화가 나혜석(羅蕙錫, 1896~1948)이다. 당대 최고의 여성으로 자칭하던 그녀가 어찌 이 깊은 곳까지 찾아왔을까?

 

봉건적 인습에 반대하던 그녀는 ‘자유연애’, ‘남녀평등’의 신여성운동을 하며 여성인권향상을 위하여 힘썼던 인물이다. 그러면서 스스로도 자유연애를 갈구하게 된다. 그러나 첫 사랑이었던 시인 최승구는 유부남이었으며, 촉망받던 시인이었으나 요절을 하게 된다. 독립운동을 계획하다가 체포되어 5개월의 옥고를 치루고 나서는 자신보다 10살 많은 변호사 김우영을 만나게 된다. 이미 3년전 아내와 사별한 그에게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조건(평생 나만을 사랑할 것이며,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 말 것이며, 시어머니와 전처의 딸과는 별거를 하게 하시오. 신혼여행은 내 첫사랑의 묘지로 갈 것이며, 그 자리에 석비를 세워주시오.)을 내세우며 1920년 결혼 생활을 하게 된다.

 

이 후 남편의 전폭적인 후원 속에 개인 유화전을 열기도 하였으며, 이즈음에 일엽스님을 만나 동인지 ‘신여성’, ‘폐허’를 창간하였다. 또한 조선 여성 최초로 유럽 일주여행에 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화려함과 행복은 길지 않았다. 김우영은 법률공부를 위해 유학길에 오르게 되면서 친형제에 다름없는 독립선언 33인중 한명이었던 최린에게 그녀를 돌봐줄 것을 부탁하게 된다.

 

그러나 교양이 풍부하고 풍류가였던 최린과 불같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이 사실은 남편 김우영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니 끝내 이혼을 요구하게 된다. 일련의 사건으로 최린 역시 그녀의 곁을 떠나게 된다.

이즈음부터 나혜석은 서구 사회의 파격적인 모습들을 거침없이 날것 그대로 주장하면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게 된다. 남녀평등에 의해 남자들은 첩을 들이는데, 여자라고 외간남자를 사귀지 말라는 강요는 불평등하다는 주장에 이르렀고, 이 후 ‘실험결혼론’의 주장, 최린을 상대로 한 ‘정조유린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등은 당시 시대상황에서 파문과 논란을 야기했으며, 급기야 나혜석을 고립시키게 된다. 재판에 패소하고, 가정의 평안과 행복을 깨려는 발상이라며 사회에서 내몰리게 된다. 결국 이즈음의 전시회는 완전히 실패하면서 사회적 고립과 멸시에 폐인이 되어가며 방황을 하다가 수덕사를 찾게 된 것이다.

 

이 즈음, 13살의 젊은 청년이 현해탄을 건너 수덕사를 찾았다. 일엽스님이 출가하기 전 일본에서의 첫사랑 사이에서 사생아가 되어버린 아들 김태신이 찾아온 것이다. 아들은 생모를 보고 왈칵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라고 부르지만 그녀는 냉정하게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마라, 이곳은 절이니라, 스님이라 불러라." 한다. 어머님과의 해후를 기대하던 아들의 꿈은 산산이 부서지고 그날 밤 아들은 수덕사 아래의 수덕여관을 찾게 된다.

 

일엽의 친구인 나혜석은 그 모습을 보고 모정에 목말라 있는 아들에게 어찌 저렇게 냉정하게 내칠 수 있는가 라며 아들이 잠자리에 들 수 있도록 팔베게를 해주고 젖무덤을 만지게 해주었다. 이러한 모습을 본 일엽스님과 만공스님은 속세의 연민을 끓지 못하는 나혜석을 보고 비구니가 될 수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임자는 중노릇을 할 인물이 아니야]

 

절친한 친구였던 나혜석이 수덕여관에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일엽스님이 반갑게 맞이한다.

“너처럼 중이 되겠다.”
“너는 안 된다.”

 

과거 일엽스님이 나혜석에게 여승이 되겠다고 했을 때 “현실 도피의 방법으로 종교를 선택해서는 안 된다.”며 만류했던 나혜석이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큰 스님을 뵙게 해달라는 간청에 어쩔 수 없이 수덕사 조실스님과의 만남을 주선한다. 그러나 만공스님은 “임자는 중노릇을 할 인물이 아냐.”라며 거절한다. 이 후 나혜석은 “중이 되게 해 달라.”며 수덕사 아래 수덕여관에 수시로 머물게 되는데, 그녀가 수덕사 아래에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화가가 되고자 하는 젊은이들이 사찰을 찾아왔고, 그들에게 유화와 조각을 가르쳤는데 그 중 고암 이응노가 있었다.

 

말년의 그녀는 파킨슨병으로 고통스러워했다. 결국 1944년 수덕사를 떠난 그녀는 자식을 만나려 했으나 남편에게 쫒겨 났으며, 오빠의 집을 찾았으나 여기서도 쫒겨난다. 양로원과 서울 친지들을 찾아왔다가 사라지는 행동을 되풀이하자 사람들은 그녀를 정신병자 취급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던 1948년, 공주의 마곡사에 잠시 머물다가 병세가 악화되자 스스로 절을 나와 서울 용산의 시립자제원을 찾았으며, 그해 12월, 혹독한 추위 속에 무연고자 병동에서 사망한다. 당시의 그녀는 질병으로 대화가 불가능하였고, 소지품 하나 없이 병사하여, ‘무연고자’, ‘행려병자’로 처리되었다.

 

[청춘을 불사르고, 일엽으로 살리라]

 

아들을 냉정하게 내치고, 절친 나혜석에게 중이 될 수 없다던 일엽은 누구인가?

 

‘일엽스님(一葉, 1896~1971)’,속명은 ‘김원주(金元周)’로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김용겸 목사의 맏딸로 결혼 후 6년만에 얻은 딸은 아들 못지않은 후원속에 자랐다. 개신교 목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기독교계의 학교를 다니게 되었는데, 11살에는 윤심덕을 따라 진남포 삼승보통여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신문학을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나이 12세 때, 결핵을 앓던 어머니가 남동생을 출산하면서 세상을 떠났고, 동생도 3일만에 죽고 말았다. 어린나이에 죽음을 접한 그녀는 통탄의 마음을 글로 적었는데, 그것이 한국문학사 신시(新詩)의 효시라 불리는 '동생의 죽음'이다. 이 후 재혼한 아버지마저 그녀가 17세 되던 해에 별세를 하게 되면서 동생들과 어머니 아버지를 차례로 잃은 그녀는 신앙에 대한 회의를 갖기 시작한다. 이 후 외할머니의 도움으로 21살에 이화학당 예과를 졸업하고, 간호원 강습을 수료하고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 때 그녀는 첫사랑을 만나게 되니 일본인 청년 오다 세이조다. 그들은 서로 결혼을 하려 했으나 당시의 정세로는 용납이 되지 않는 연민이었다. 결국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무너지고 만 첫사랑은 둘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만이 남게 된다. 그가 바로 오다 마사오, 한국이름 ‘김태신’이며, 화승 일당스님이다.

 

유학에서 돌아온 그녀는 가족들의 중매로 연희전문학교 이화학 교수와 결혼하였다. 남편의 지원과 이화학당 빌링스 부인의 재정 후원을 받아 나혜석등과 함께 1920년 조선 최초의 여성종합지 '신여자'을 발간하게 된다. 그러나 남편은 의족을 한 장애인이었으며, 첫번째 여자가 그것을 알고 놀라 파혼하였으며, 그녀도 결혼 직후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면서 처음부터 결혼생활 자체가 순탄치가 않았다. 결국 파혼에 이르면서 '신여성'은 4호를 끝으로 폐간 되었다. 이 후 그녀는 화가 나혜석과 '자유연애론'과 '신정조론'을 주장하며 개화기 여성운동을 주장했다. 그러던 그녀가 불가와 인연을 맺은 것은 중앙불교전문학교의 백성욱교수를 알게 되면서 부터이다.

 

불가에 그녀가 신여성운동을 주장하면서 꿈꿔왔던 자유와 평등의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된것이다. 1928년, 그녀의 나이 33세 되던 해, 불문에 들어선 김원주, 아니 일엽스님은 만공스님의 지도로 수행하며 목사의 딸로서 비구니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일엽스님은 불가에 귀의한 후 각고의 수행정진에 매달리게 된다.

[어머니라 부르지 마라]

 

그로부터 14년이 지나고 일본에서의 첫사랑 사이에서 사생아가 되어버린 아들 김태신이 찾아오게 된 것이다. 아들은 생모를 보고 왈칵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라고 부르지만 일엽은 서릿발 같이 호통을 쳤다. “울음을 그쳐라! 이곳은 산중의 절이다. 절에 왔으니 절의 풍속과 예를 갖추어야한다. 너는 나에게 다신 어머니라고 불러서는 안된다. 스님이라 해야 한다.”

 

어머님과의 해후를 기대하며 현해탄을 건넌 아들의 꿈은 산산히 부서지고 그날 밤 아들은 수덕사 아래의 수덕여관을 찾게 된다. 수덕여관에는 일엽의 친구인 나혜석이 머물고 있었다.

 

한편, 일엽스님은 중생제도와 비구니의 위상을 회복하는 일에 앞장서며 '어느 수도인의 회상', '청춘을 불사르고'등의 수많은 저서를 이루어 낸다. 또한 비구니 수행처가 변변하던 한국불교에 비구니 총림원을 추진하는 등의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한 평생을 고집처럼 자신을 위해 살아 간 일엽스님은 1971년 1월 28일 법랍43세(76세)로 입적했다.

 

[고암, 수덕여관의 주인으로 머물다.]

 

그리고 수덕여관에는 고암 선생과 박귀희 여사와 박인경 여사, 세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비구니가 되겠다고 수덕여관에 나혜석이 머물고 있을 때, 그녀의 명성을 알고 있는 많은 젊은이 들이 화가가 되기 위해 그녀를 찾아 왔다. 그 가운데 이응노가 있었다.

 

‘고암 이응노(顧菴 李應魯, 1904~1989)’화백, 충남 홍성 출생으로 본관은 전의(全義), 호는 죽사(竹史), 고암(顧菴)이다.

 

우리나라 미술계의 거장이자 우리미술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린 장본인이다. 22세 되던 1926년 당시 19세이던 박귀희 여사와 결혼을 한다. 고암과 수덕여관의 인연의 시작은 ‘중이 되겠다’며 친구 일엽을 찿아온 신여성 나혜석이 머물며 시작 된다. 당시 나혜석은 고암의 선배이자 누나이자 그림 스승으로 고암에게 파리의 환상을 심어주는 계기가 된다. 일엽의 아들 김태신과의 만남도 그 즈음이다.

 

그렇게 늘 함께 하던 나혜석이 수덕여관을 떠나자 1944년, 고암은 수덕여관을 구입하여 놓고 그림공부를 한다는 이유로 부인인 박귀희여사에게 맡겨 놓고 집을 비워 두는 날이 더 많았으니 박귀희 여사의 망부가가 전해진다.

 

당시 화단에 주목을 받던 고암은 서울에서 미술대 교수로 재직하며 생활하던 중, 제자였던 이화여대 박인경씨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1957년 본 부인을 두고 고암은 21살 연하의 박인경씨와 함께 독일을 거쳐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게 된다. 그곳에서 고암선생은 버려진 종이로 콜라즈를 형상하고 먹물등의 은근한 색상과 동양적인 형상창조의 활동으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게 된다.

[프랑스 국적으로의 사망, 그리고 본처의 애절한 망부가]

 

자유와 꿈과 같은 파리 생활을 하는 고암, 그러나 그 뒤에는 본 부인인 박귀희여사의 서러움과 망부가 서린다. 망설임 없이 떠난 두 사람에 비해 박귀희 여사는 변함없는 애정으로 고암을 그리며 수덕여관을 지킨다. 그리고 10년 뒤, 친자가 없던 고암은 양자 둘을 두었는데 그 중 장남이 한국전쟁 때 납북이 되었다. 파리에 머물던 고암은 장남이 북한땅에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아들을 만나기 위해 윤이상과 함께 방북을 한적이 있었는데 이것이 동베를린 공작 사건, 이른바 '동백림 사건'이 발생한다. 그 일로 고암은 대전 교도소와 전주교도소에서 옥살이를 하게 된다.

 

동백림 사건에 휘말린 고암이 옥살이, 옥살이의 뒷바라지를 한 것은 다름 아닌 버림받은 본부인 박귀희 여사 였다. 비록 그에게 버림을 받았으나 아직 남은 망부의 한을 풀기 위해서라도 여사는 1년여 시간동안 물심양면으로 고암의 옥살이를 뒷바라지를 한다. 1년뒤 출옥한 고암은 수덕여관의 뜰에 있는 바위에 한글의 자모음을 엉켜가며 조화를 부리며 ‘1969년 이응로 그리다’ 라고 암각한다. 문자추상화를 새겨 놓고는 다시 박인경 여사가 있는 파리로 훌쩍 떠나게 된다.

 

고암은 아마도 조강지처를 버린 고암의 죄의식 이었으리라,

 

21살이나 어린 여자와 떠나버린 자신을 말없이 돌봐주는 박귀희 여사를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으리라, 그리고, 그것이 끝이었다. 박귀희 여사는 언젠가 다시 돌아올 것 이라는 희망으로 고암을 기다렸으나, 1989년 파리에서 회고전을 열던 고암은 끝내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파리에서 세상을 뜨고 만다. 고암의 마지막 국적은 ‘프랑스’였다.

 

장례식에도 못간 박귀희 여사, 그녀의 마지막 소원은 고인의 유골을 돌려받아 자신이 함께 묻히길 바랬으나, 고암이 파리로 떠날 때 그의 앞길에 걸림돌이 될까 염려하여 ‘이혼 수속’을 허락해준 것을 후회하였다. 법적으로 남남이었으니 아무것도 주장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고암은 영영 살아서는 다시 볼수 없는 사람이 되었으나 옛 고암과의 추억을 간직하며 시어머니를 모시며 수덕여관을 옛모습 그대로 지켜 오게 된다. 1989년 충청남도에서는 수덕여관을 도지정문화재 제 103호로 지정한다.

 

그러던 2001년 2월 24일 밤10시, 박귀희 여사는 한 많은 세상에 마음 편히 놓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야 만다.

[고암의 미망인, 그늘에 가려 얼굴 없이 살아온 삶]

 

그리고 남은 한사람이 있으니 고암의 현 미망인 박인경 여사다. 그 분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내 짐작은 가능해 지리라.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이 통하여 21살이나 차이가 나는 고암을 따르다 사랑에 이르게 되었고, 고암만을 믿고 이국땅으로 떠남은 그리 쉽게 결정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고암을 믿고 사랑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다 10년후, 동백림 사건으로 예기치 못하던 이별을 하게 된다. 머나 먼 이국땅에 홀로 남은 어린 부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리고 돌아온 고암, 그러나 다시 10년후, 피아니스트 백건우, 영화배우 윤정희의 북한 납치미수사건의 배후로 몰린 고암, 이를 바라보는 박인경 여사의 마음은 또 얼마나 애간장을 태웠겠는가.

 

그렇게 곤욕을 치루던 화백은 대한민국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1983년 프랑스로 귀화 한다. 그로부터 7년, 1989년 회고전이 열리던 때 고암은 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국만리 타향땅 에서 홀로 남은 박인경 여사, 본 부인과 고암의 뒤편 그늘에 가려져 얼굴 없이 살아온 여린 여인, 고암을 만나 사랑을 하면서도 마음 조리며 살았을 어리고 가녀렸던 고암의 현 부인이신 박인경 여사는 현재 대전 이응노 미술관의 명예관장님이시다.

 

[일엽스님을 향한 애증도 사라지다.]

 

1921년, 동경으로 유학을 떠난 ‘김원주’, 열차에서 규슈국제대 법학과 출신의 학생은 한국인 유학여성을 보고 첫눈에 반하게 된다. 그의 이름은 ‘오다 세이조’, 세계적인 은행가의 아들로 운명적인 만남은 결혼을 전제로 하게 된다. 그러나 오다 가문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출정한 일본군의 명장이었으며, 일엽의 부친은 독립운동가이자 목사였다. 이룰 수 없는 운명이었으나, 오다세이조는 “그녀의 뱃속에 오다 가문의 핏줄이 자라고 있다”면서 결혼 승낙을 받으려 하였으나 돌아온 것은 ‘낙태’를 시키라는 고함뿐이었다. 이에 오다 세이조는 가문과의 절연을 선언하였고, 일엽에게 아들을 낳고 일본에서 살자고 한다. 이듬해 1922년 9월, 일엽은 사내아이를 낳으니 일본이름 ‘오다 마사오’, 한국이름 ‘김태신’, 훗날 화가이자 승려인 ‘일당’스님이다.

 

그러나 일엽은 연인의 앞길을 막았다며, 천륜을 끓을 수는 없는 일이라는 편지를 남기고 조선으로 돌아오게 된다. 1936년 오다는 아들을 데리고 조선으로 들어와 일엽을 찾아 결혼 하려 하였으나 이미 출가하여 스님이 된 것을 알고 좌절하여 황해도의 친구에게 양자로 보내게 된다. 아들 김태신은 이 때 양어머니로부터 생모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일엽스님의 아들로 일본의 권위있는 미술상인 아사히상을 수상하였으며, 김일성 종합대학에 걸린 김일성 초상화를 그린것으로 유명하다.

 

한국 근현대사의 역사를 온 몸으로 받아낸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 역시 어머니를 따라 67세에 불가에 귀의 하여 80세 노스님이 되어 화승으로 명성을 떨치며 양산 법수사에서 그림을 그리고 김천 직지사 중암에 머물고 계시다가 2014년 12월 25일, 향년 93세로 원적에 드셨다.

 

1971년 어느날, 병으로 누워있는 일엽에게 한 노신사가 찾아온다. 70대의 노신사는 병들어 누운 일엽을 만나기 청하고 방문 앞에서 큰절을 올리고는 방에 들어서 누워있는 일엽의 옆에 무릎 꿇고 앉았다. 말없이 횐 손수건을 그녀위에 올리고 그 위에 자신의 손을 얹으면서 손을 꼭 잡았다.
바로, 자신의 첫 사랑을 잊지 못한 ‘오다 세이조’다.

 

젊은 시절, 가문과의 절연을 선언하고 일엽과 가까이 있기 위하여 총독부에 한국행을 지원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외교관으로 일하면서 평생 가문과 절연하며 살았다. 평생을 독신으로 일엽을 평생 잊지 못하고 홀로 살아온 그는 결국 타국에서 쓸쓸히 살다갔다.

 

[모두 떠나고 남은 자리, 수덕여관]

 

소설 속에나 있을법한 이야기들을 간직한 수덕여관, 그 이야기들은 지금까지도 구구절절 전해져 내려온다. 그리고 이제 수덕여관과 함께 있어야 할 사람들은 모두 떠났다. 가지런한 초가집만으로 남은 수덕여관에는 그렇게도 깊고 깊은 이야기들이 머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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