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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피해를 동반하는 물 폭탄 여름철 ‘집중호우(集中豪雨)’ 시로 본 옛사람들의 집중호우

우리의 옛 선조들은 여름철 ‘폭우(暴雨)’를 보고 어떤 시상(詩想)을 떠올렸을까  조선 말기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

고영화 향토 고문학 칼럼리스트 | 기사입력 2021/08/03 [10:23]

여러 피해를 동반하는 물 폭탄 여름철 ‘집중호우(集中豪雨)’ 시로 본 옛사람들의 집중호우

우리의 옛 선조들은 여름철 ‘폭우(暴雨)’를 보고 어떤 시상(詩想)을 떠올렸을까  조선 말기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

고영화 향토 고문학 칼럼리스트 | 입력 : 2021/08/03 [10:23]

▲ 고영화 향토학자    

 

 

며칠 전 토요일, 경북 안동 신도시에 머물던 오후 6시경, 갑자기 쏟아지는 집중호우(Heavy rainfall)로 인해 도로가 침수되고 시냇물이 범람하였다. 근데 약 50분 가량 퍼붓던 억척스런 장대비가 이내 잠잠해졌다. 폭우가 쏟아질 때는 소위 ‘하늘에 구멍이 뚫렸다’라고 표현할 정도로 쏟아 내리니, 건물 주위에 주차된 모든 차량들을 대피시키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그런데 나는 도리어 폭우 속의 흙 내음 나는 공기와 서늘한 기운이 나로 하여금 기분 좋게 만들었다. 그리고 장대비가 경쾌하게 막무가내로 씻어 내는 도로를 보면서 순간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런 다음 그 엄청난 폭우는 마음 속 담장까지 범람하여 ‘문명 속에 때 묻은 나’까지도 휩쓸고 지나갔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세상 모든 것이 빗물에 잠겨버린 온 천지 속에서, 나의 감각만이 하늘아래 물아래 놓여 있는 듯, 먹먹한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었다.

하지만 폭우 속의 카타르시스는 어디까지나 폭우 속에만 느껴진 감정 일뿐이다. 이내 들어온 방에서 본 텔레비전 뉴스에선, 산사태, 꺼진 도로, 범람한 하천의 TV화면에서, 사망자와 실종사 수를 긴급 속보로 전하며 주의를 당부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물에 빠진 생쥐 마냥, 돌아본 내 몰골이 말이 아님을 알았다. 늘 그렇지만 갑자기 쏟아지는 집중호우를 인간이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당부컨대 우리 모두 철저한 대비와 안전수칙을 준수하여 인명⋅재산 피해를 최소화해야 할 것이다.

● 우리의 옛 선조들은 여름철 ‘폭우(暴雨)’를 보고 어떤 시상(詩想)을 떠올렸을까  조선 말기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 선생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는 ‘괴상한 바람과 큰비(?風暴雨)’에 대해서 언급한 내용이 있다. 폭우가 생기는 것은, “교룡(蛟龍)과 조개가 연못 가운데 숨어 있다가 때를 타서 일어나 서로 싸우는 것이다. 무릇 괴상한 바람과 급한 우레와 큰비는 모두 괴상한 요물이 장난을 치는 것[泓坎之中時起而怒?也凡?風迅雷暴雨皆是異物之作?]”이라고 적고 있다.

1) 폭우(暴雨) 도중에[途中暴雨] / 임춘(林椿), 고려학자 죽림칠현(竹林七賢)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넓은 들판에 폭우가 쏟아진다. 맹렬한 기세로 산 너머 달려온 장대비가 구슬이 튀듯 온 사방을 휘저어 놓을 때는 사방이 어두컴컴하여 아무 것도 보이질 않는다. 중국 부견(符堅)의 87만 대군이 싸움에 패해, 비수(?水)의 강물로 달아나던 그 모습을 연상케 한다.

天低野闊雨跳珠 하늘은 낮고 들판은 넓어 비가 구슬 튀듯 내리고

猛勢橫空望却無 맹렬한 기세로 공중을 가로지르니 아무 것도 보이질 않네.

想得符堅初戰退 생각해보니 마치 부견(符堅)이 처음 전쟁에 패퇴하여

千兵萬馬一時趨 온 병사와 말들이 일시에 다 달아나는 것과 같구나.

○ 5호16국 시대 전진(前秦)의 3대 왕 부견(符堅)은 내치에 힘써 전진의 최절정기를 열었다. 전연(前燕)·전량(前凉)·대(代)를 차례로 정벌해 북방지역 대부분을 통일했으며, 서역(西域)으로 진군하고, 동진의 양주(梁州)·익주(益州)를 정복해 각 민족의 우두머리에게 융화정책을 썼다. 그러나 382년, 동진(東晋)을 공격하려고 하는데 이때 누군가가 동진은 장강(長江)이라는 험난한 지역을 확보한데다가 백성들도 기꺼이 앞장서서 힘을 내고 있어 승리하기 힘들다며 공격하지 않는 게 좋다고 건의 하였다. 그러나 부견은 우리 쪽 숫자가 많아 “말채찍만 던져도 강을 막을 수 있고, 발만 담가도 그 흐름을 끊을 수 있다” 동진이 무슨 수로 우리를 막느냐며 충고를 무시했다. 이듬해 부견은 무려 87만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동진을 공격, 비수(?水)에서 전투를 벌였다. 결과는 87만 대군이 8만 군에게 대패를 당했다. 자기 숫자만 믿고 상대를 얕잡아본 결과였다. 그는 대패를 당한 후, 나라가 분열된 가운데 385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 폭우[暴雨] / 서거정(徐居正 1420∼1488)

雨脚垂天白似  장대 같은 흰 빗줄기가 주룩주룩 쏟아져

瓦溝流水響春江 기왓도랑 물소리가 봄 강물을 방불케 하누나

柳陰打罷鶯聲一 버들 그늘을 때려 꾀꼬리 소리를 멎게 하고

葦岸敲驚鴨睡雙 갈대 언덕을 두드려 조는 오리를 놀래 키네.

動地豪聲能?屋 땅을 진동한 큰 소리는 지붕을 흔들 만하고

隨風猛勢亂穿窓 바람 낀 맹렬한 기세는 창을 마구 뚫어 대네

須臾平地江湖漲 잠깐 사이 평지에 온 강호의 물이 넘실대니

寒?蕭蕭骨欲 쓸쓸한 백발에 뼛속까지 소스라쳐 놀랐네.

● 조선 중기의 시인⋅학자인 윤선도(尹善道 1687~1671)의 『고산유고(孤山遺稿)』 에 ‘孤山’이라는 윤선도(尹善道)의 호(號)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고산(孤山)’은 양주에 있는 산인데 윤선도의 별장이 있던 곳이며 ‘퇴매재산’이라 불렀다. 특히 홍수가 나서 범람하면 평야지대 전체가 물에 잠기는데 유독 이 산만 항상 그 가운데 우뚝 솟아 보였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물바다가 된 양주 들녘에 외로운 섬처럼 솟아 있는 이 산을 가리켜 ‘고산(孤山)’이라고 하였고, 윤선도는 이 ‘孤山’이 세상의 비난과 비방에 맞서 홀로 선 자신의 고고한 기상은 물론, 외롭고 고독했던 자신의 인생과 닮았다고 해서 자호(自號)로 삼았다. 이러한 윤선도의 심정을 대변해주는 시 한편이 『고산유고(孤山遺稿)』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3) 고산만 홀로 잠기지 않았기에[孤山獨不降] / 윤선도(尹善道)

滄浪便作靑溟闊 푸른 물결이 갑자기 푸른 바다로 변하니

莫辨長郊與大江 넓은 들과 큰 강을 구별할 수가 없네

底事玆山不埋沒 무슨 일로 이 고산(孤山)만 물에 잠기지 않았는지

千岡萬阜忽騈降 천 개의 언덕과 만 개의 구릉 돌연 모두 가라앉았는데

○ 강물이 범람해 온통 물바다로 변한 세상에서, 홀로 우뚝 솟아 있는 고산(孤山)과도 같았던 윤선도의 삶은, 그의 나이 30세 1616년(광해군 8)에 권신(權臣) 이이첨의 난정(亂政)과 박승종·유희분의 망군(忘君)의 죄를 탄하는 상소를 올렸을 때부터 험난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이로써 경원(慶源)·기장(機張)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풀려났다. 1638년 인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죄로 영덕(盈德)으로 유배를 당해 다음해 풀려났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산릉(山陵)문제와 조대비복제(趙大妃服制)문제가 대두되었다. 남인파인 윤선도는 송시열·송준길 등 노론파에 맞서 상소로써 항쟁했으나 과격하다고 하여 삼수(三水)로 유배를 당했다. 1667년(현종 9) 그의 나이 81세에 이르러 겨우 석방된 뒤 여생을 한적히 보내다가 1671년(현종 12) 낙서재(樂書齋)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는 성품이 강직하고 시비를 가림에 타협이 없어 자주 유배를 당했다. 한편 그는 음악을 좋아하는 풍류인이기도 했다. 특히 그가 남긴 시조 75수는 국문학사상 시조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지며, 정철·박인로와 더불어 조선 3대 시가인(詩歌人)의 한 사람으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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