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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선생의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의 해석에 대한 비판

이종철 교수 | 기사입력 2021/07/14 [10:56]

신영복 선생의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의 해석에 대한 비판

이종철 교수 | 입력 : 2021/07/14 [10:56]

신영복 선생의 <강의>를 eBook으로 읽고 있다가 나의 생각과 다른 점이 있어서 몇 자 적어본다.중국의 고전들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해석한 선생의 글은 읽기가 좋아 틈나는 대로 보고 있다. 동양의 고전과 철학을 감옥에서 독학으로 공부하고 사색한 선생의 사유는 깊이도 있고 단단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간혹 전문가의 시선으로 볼 때 적절하지 못한 대목도 없지 않다. 이 책에서 선생은 서양의 존재론과 달리 동양은 철저히 관계론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선생이 서양을 존재론으로, 그리고 동양은 관계론으로 해석한 것 자체에 대한 의도는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존재론은 실체론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서양의 존재론은 그것을 그것이게끔 해주는 원인, 즉 아르케(arche)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했다.

사진 이종철 교수 제공
사진 이종철 교수 제공

이런 아르케를 개별자와 보편자 같은 실체(Substance)로 볼 것인지 아니면 변화하고 운동하는 관계로 볼 것인지에 따라 존재론의 성격이 달라진다. 물론 서양에서는 실체 존재론이 주류를 이루었고, 이런 현상은 근대의 합리론자들이나 경험론자들에 이르기까지 대세를 형성했다. 서양의 존재론이 운동이나 변화 그리고 관계를 인정하는 것은 비주류의 해석에서만 나타난다. 반면 동양의 존재론은 <주역>에서 드러나듯 모든 것을 변화의 도이자 관계의 그물망으로 인식한다. 그런 의미에서 신영복 선생의 취지를 정확히 반영한다면 서양은 존재를 실체로 이해한 전통이 강했고, 동양은 관계로 이해한 전통이 강했다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런 문제는 아마추어로서 독학한 선생의 연구 배경을 이해하는 것으로 족하다. 그런데 오늘 <논어>에 나오는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에 대한 선생의 해석에서 상당한 오류가 엿보여 지적하고자 한다. 물론 이것은 나의 해석이고, 선생이 살아 계신다면 다르게 논박할 수 있다고 보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쉬울 수 있다.

선생은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중국의 고전을 일관되게 관계론과 실천의 관점에서 해석한 선생의 입장에서 충분히 붙일 수 있는 제목이다. 선생은 이 부분을 "학學하되 사思하지 않으면 어둡고, 사思하되 학學하지 않으면 위태롭다."고 해석했다. 그런데 이 정도 번역으로 그 의미를 드러내기 힘든 것은 학學과 사思의 대비형식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사思의 구성도 전田과 심心, 즉 밭의 마음이고, 밭은 노동의 현장, 실천의 현장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한자의 특성상 이런 글자 풀이가 의미는 있겠지만 그 글자가 들어 있는 문장의 맥락이나 선생이 늘 강조하는 다른 글자와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는 상태에서 단순히 글자 자체를 해석하는 것은 오히려 선생이 경계하는 실체론적 사고에 갇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선생은 자신의 이런 해석에 대해 전문 연구자(누군지 밝히지 않는군요)의 반론을 언급하면서 그는 전田은 어린아이의 두개골에 있는 숨구멍이기 때문에 사思는 두뇌와 마음을 합한 것이라고 친절하게 이야기하는데 사실 이런 이야기는 거의 자다가 봉창두들기는 해석이기도 하지요. 여기서 두뇌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사고가 가슴이 아닌 뇌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밝히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선생이 학學을 보편적 사고로 간주하고 사思는 관념 보다는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하는 과거의 실천이나 그 기억 또는 주관적 관점으로 해석한 것이지요. 선생은 學而不思則罔에 대한 개인적 체험 이야기를 끌어들여 설명도 합니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 무릅 위에서 배운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즉 할아버지는 책을 읽고 나서 반드시 30분 정도는 생각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나중에 감옥에서 곰곰히 생각하면서 깨닫게 된 것이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책을 읽고 생각을 해도 머리에 남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책을 읽고 생각하는 것 모두가 실천과 유리된 관념의 소요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를 경험과 실천의 의미로 읽는 것이 옳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선생은 내놓고서 학이 보편적인 것(generalism)이고, 사는 특수한 것(specialism)이라고 규정합니다. 따라서 "'학이불사즉망'의 의미는 현실적 조건이나 실천이 사상된 보편주의적 이론은 현실에 어둡고, '사이불즉태'는 특수한 경험적 지식을 보편화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주장합니다. 내가 보기에서 여기서 선생의 해석의 결정적인 오류가 나타납니다. 선생은 학과 사를 정 반대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학學은 배움이고 탐구라는 의미에서 개별적인 것과 관련됩니다. 논어의 맨 앞에 나오는 '학이시습지'라는 구절에서도 학은 무수한 개별적인 것들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런 배움은 주로 외부 세계에 대한 경험을 통해 얻는 것입니다. <논어>를 일관해서 학學은 배움의 과정이지 체계화된 학문(Wissenschaft)의 의미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개별적인 배움이 의미를 이해 못한다면 단순히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뿐이고, 그런 수동적 경험은 최초의 경험에 대한 인상(impression)이나 지속에 대한 기억(memory)으로만 주어지지요. 근대의 경험론자들이 지식의 습득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이런 경험은 아무리 많이 쌓아도 그것이 보편적인 것에 대한 확실성을 부여하지는 못하지요. 반면 합리론자들은 경험 이전에 선험적으로(a priori)으로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틀이 있다고 본 것이지요. 사실 이런 틀을 형이상학적인 것이라 배격할 수도 있겠지만, 인식과정에서 우리는 일정한 개념적 틀이 없을 경우 이해와 인식을 하지 못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가 말하는 사思는 합리론자들이 말하는 인식의 틀이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요. 칸트가 나중에 <순수이성비판>을 쓰면서 경험론자와 합리론자의 사유를 비판적으로 종합할 때 이런 표현을 사용합니다. 즉 "개념이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고, 직관이 없는 개념은 공허하다." 여기서 개념은 지성의 활동이고, 직관은 감성의 활동입니다.

이런 직관이 인식의 재료인데, 공자식으로 표현하면 외부세계에 대한 배움이지요. 이런 배움이 없으면 아무리 30년 면벽을 해도 깨우치기가 쉽지가 않지요. 공자가 그와 비슷한 말씀을 하셨지요. “내가 전에 하루 종일 먹지 않고, 밤새 자지도 않고 생각해보지만 이득이 없었고 역시 배우는 것만 못했다.” 주자도 그런 의미에서 대학의 '격물치지'를 해석할 때 격을 사물(대상)에 다가가 그 이치를 탐구하는 것으로 봅니다. 이러한 태도는 실재론 혹은 객관주의로 볼 수 있지요. 반면 왕양명은 격자를 마음 심자를 바로 잡는 것으로 이해해서 심학혹은은 관념론이나 주관주의로 발전했고요.

다시 칸트와 공자 이야기로 돌아간다면, 경험적 자료에 일정한 형식을 부여할 수 없으면 그것을 이해하기가 힘들고, 이러한 형식이나 개념도 인식의 개별적 소재들이나 배움이 없다면 그저 공허한 형식에 불과하다는 의미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공자가 말한 학과 사의 대비가 칸트에게서는 직관과 개념의 대비로 유추될 수 있지요. 그런데 신영복 선생은 이런 대비를 이해하지 못하고 뜬금없이 실천 이야기를 끌어들이면서 반대로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물론 모든 이론을 실천의 입장에서 일관되게 해석하려는 선생의 태도는 존경받을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맥락과 상황을 무시한 채 무조건 실천의 잣대를 들이 대미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선생은 여기서 자신의 이런 실천주의를 강조하기 위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끌어온 내용을 인용합니다.

"자기의 경험적 사실을 곧 보편적 진리로 믿는 완강한 고집에서 나는 오히려 그 정수의 형태는 아니라 하더라도 신의와 주체성의 일면을 발견합니다...경험이 비록 일면적이고 주관적이라는 한계를 갖는 것이긴 하나, 아직도 가치중립이라는 '인텔리의 안경'을 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는, 경험을 인식의 기초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공고한 신념이 부러우며, 경험이라는 대지에 튼튼히 발 딛고 있는 그 생각의 '확실함'을 배우고 싶습니다...경험 고집은 주체적 실천의 가장 믿음직한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몸소 겪었다는 사실이 안겨주는 확실함과 애착은 어떠한 경우에도 쉬이 포기할 수 없는 저마다의 '진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선생은 여기서 경험주의적 실천의 신의와 주체성을 인텔리들의 가치 중립보다 위에 놓고 이런 경험고집이 주체적 실천의 가장 믿음직한 동력으로 생각하고 나아가서 그것을 포기할 수 없는 '진실'로 까지 신뢰합니다. 이러한 선생의 생각을 이해는 할 수 있지만 경험주의의 완고한 고집은 맑스나 엥겔스도 비판했듯 경험추수주의에 빠질 수 있고, 공자식으로 말하면 '학이불사태망'이고 칸트식으로 말하면 '개념이 없는 직관은 맹목(blind)에 빠지"는 격이지요. 선생이 이렇게까지 생각한 데는 사思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를 하지 못한 때문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공부를 할 때 혹은 책을 읽을 때도 마찬자기지만 어떤 컨셉이나 사유의 틀을 이해하지 못하면 한참을 공부하거나 책을 읽어도 그 의미가 들어오지 않지요. 그러니까 선생은 어렸을 때 할아버지한테 제대로 배웠으면서도 감옥의 경험 속에서 오히려 정 반대로 곡해를 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감옥에서는 생각을 가르쳐주는 선생이 없는 한계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선생의 이런 곡해는 일관되게 학이 경험의 울타리를 벗어나게 해주고, 사물이나 현상 상호 간에 맺고 있는 관계성을 깨닫게 해준다고 말합니다.

선생은 여기서 학을 학문의 체계, 체계적이 인식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지요. 여기서 말하는 학은 학이불사태망에서 처럼 공부를 해도 그것을 이해하게 해주는 개념적 사유의 틀이 없으면 어둡다(망)는 의미일 뿐입니다. 선생이 말하듯 관계성에 대한 자각과 성찰은 단순히 공부만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성과 사색을 통해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사유의 형식이나 틀이 만들어져야만 가능한 것이지요. 사思는 개별적인 것에 대한 배움이 아니라 전체성 통일성 혹은 맥락과 관계성에 대한 반성적 이해이지요. 그런데 정 반대로 생각을 하다 보니 선생은 이론을 관념적으로만 생각하고 실천은 무조건 객관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맑스가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포이어바흐의 추상적 유물론에 대해 그것이 대상, 현실, 감성을 단순히 객체로만 파악한 것을 비판합니다.

오히려 맑스는 그것을 주체적이고 실천적으로 파악한 것은 관념론에서 왔다고 말합니다. 때문에 이론이나 사思 혹은 개념이 없는 경험 추수주의는 독단, 선생이 말하는 완고한 고집에 빠지는 오류를 보일 수 있는 것이지요.

내가 다소 장황하게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에 대한 선생의 해석을 비판해봤습니다. 물론 나의 이러한 비판으로 인해 <강의>라는 중국고전에 대한 선생의 빼어난 책의 가치가 손상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선생이 살아계셨다고 한다면 이런 형태의 비판을 반기셨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 모두 진리와 진실을 향해 가는 길동무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 길에서 서로 비판을 통해 배우고 새로운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이 책의 1/3 뿐이 보지 못했지만 앞으로도 내가 생각하기에 문제가 있다면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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