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숙 평론가의 야만의 시대기]생명 모독이 일상화된 야만의 시대에 문학이 보여주는 날카로운 현실감각
이영숙 평론집 『야만의 시대기』는 고도로 문명화되었기 때문에 야만에 빠져버린 이 시대에 문학의 정체성과 역할에 대해 고민하는 평론들로 이루어져 있다. 저자는 텍스트의 내밀한 언어를 파악하는 동시에 그것을 바깥의 대상들과 연결시켜 주는 게 평론의 본분 중 하나라고 말한다. 제1부에서는 공간의 구조화된 방위를 사용하는 방식이 시적으로 달리 구현되는 지점 등을 통해 ‘시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답하고 있다. 제2부에는 이 책의 중심 주제로서 ‘야만’에 근접한 글들이 실렸다. 일테면, 과거의 동지와 현재의 동료를 적으로 만들어 부를 창출하는 게 정치가 된 현실에서 오로지 나만이 나의 진정한 동지가 되는 세계의 도래를 우리는 목도한다. 제3부에는 문학이 미추를 길어 올릴 때 현실은 도덕을 외재화하며, 문학이 세속에서 신화의 시간대를 지향할 때 현실은 신화를 세속의 시간대로 끌어내리는 현상 등을 다룬다. 문학이 ‘바깥의 대상’과 연결되려는 지점들이 그것이다. 제4부는 아우라와 이미지, 기원과 원본 등 시의 발화점을 드러내는 글이 수록되었다. 평론가는 자신이 느끼는 시의 에너지를 독자들에게 공명시킨다. 태생적으로 야만이 되기 쉬운 구조를 가진 문명이 야만과 동의어라면, 역설적으로 야만의 시대는 다시 조화로운 문명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문학이 그를 위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안과 밖, 주체와 타자, 긍정과 부정 혹은 부정의 부정, 이성과 감성 등의 경계는 무너짐으로써 대립적 개념들을 유통시키는가, 무화됨으로써 가치의 전도를 촉발하는가, 아니면 스스로를 전복시킴으로써 서로를 전복하는 모험을 감행하는가, 아니면 다른 무엇들일까.(46쪽)
학습과 사고와 추론을 위한 인간의 기억 과정은 그 중 의미 있는 것으로 판단되어 대뇌에서 장기 기억으로 전환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망각 속으로 사라진다. 그 와중에도 인간은 집중과 탐구를 통해 자기의 한계를 초월하기 위해 노력해왔고, 그 결과물은 지식과 지혜의 형태로 생산자의 내부에 축적되거나 지적 소비자와 공유되면서 궁극적으로는 인류의 지성을 확산시켜 왔다. 학문, 과학, 예술 등의 영역으로 체계화되고 개념화되고 미시적으로 분류되는 가운데, 과거에 대한 주석과 현재에 대한 해명과 미래에 대한 전망이 상상력을 빌려 글로 표현된 형태를 우리는 문학이라고 부른다.(82~83쪽)
시는 시대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현재적이지만, 현재 너머를 내다보거나 현재 이전을 돌아본다는 점에서 미래로도, 과거로도 뻗는다. 그러나 인간은 과거나 미래를 살 수 없고 시인도 현재-현재-현재를 쓸 뿐이다. 왜 그런가. 정지용의 「향수」나 심훈의 「그날이 오면」이 각각 과거와 미래를 시 속에 아로새겼다 하더라도 고향과 조국 상실이라는 당대적 상황이 결여하고 있는 요소를 희구했다는 점에서 현재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다. 기록된 현재가 곧 역사이므로 현재는 늘 역사의 현장이다. 하지만 모든 현재가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며, 유의미한 현재만이 역사적 사실로 기록되어왔다. 그런 점에서 역사의 산증인이란 당대를 사는 일반 모두가 아니라 유의미한 현장성을 확보한 개인, 혹은 집단일 수밖에 없다. 유의미한 사건을 선택하고, 거기에 개념과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부류에 의해 강자 중심의 역사 기술이 이루어진 것도 그 때문이다. 예외가 있다면 그 여파가 국민 대다수에 전반적이고 보편적으로 작동하는 경우일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민족 전체에 깊은 상흔을 남긴 한국전쟁이 그것이다.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당시 전쟁의 참화를 겪었던 이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역사의 산증인으로 남았다.(144~145쪽)
영화와 현실의 차이점은 전자가 극점으로 치달을 때 후자는 일정 시점에서 멈춘다는 점이다. 전자가 승화, 아니면 파국으로 이행할 때 후자는 타협의 지점을 갖는다. 전자가 이드(Id)나 슈퍼에고(Super Ego)의 면목을 보여줄 때 후자는 대체로 에고(Ego)의 현실감각을 작동시킨다. 문학과 현실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문학이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때 현실은 그것을 은폐한다. 문학이 미추를 길어 올릴 때 현실은 도덕을 외재화한다. 문학이 세속에서 신화의 시간대를 지향할 때 현실은 신화를 세속의 시간대로 끌어내리려 한다. 세속과 신화 사이에서 길항하며 약속이나 사랑도 그 어느 쪽인가로 당겨진다. 당연한 말이지만 시적 상황은 현실이 아니다. 현실을 반영하긴 해도 가공되고 객관화된 지적 공간이다. 그렇다고 하여 시적 상황이 비현실이라는 얘기도 아니다. 시는 정처 없지만, 닻을 내릴 자신의 항구를 갖고 있다.(186쪽)
문학평론가 이영숙의 첫 번째 평론집 『야만의 시대기』가 푸른사상 평론선 45로 출간되었다. 고도로 문명화되었기 때문에 야만에 빠져버린 이 시대에 문학의 정체성과 역할에 대해 고민하는 평론들이 실려 있다. 텍스트의 내밀한 언어를 파악하는 동시에 사회학적 상상력을 시대와 연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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