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신앙의 적을 노골적인 악에서 찾는다.
그러나 성경은 훨씬 교묘한 적을 지목한다. 따뜻함, 합리성, 관용, 그리고 ‘좋은 의도’다. 이들은 겉으로 보기에 악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오히려 성숙하고 인간적인 선택처럼 보인다. 문제는 그것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설 때 벌어진다. 그 순간 따뜻함은 미덕이 아니라 함정이 되고, 관용은 사랑이 아니라 불순종이 된다.
아람 왕 벤하닷과 이스라엘 왕 아합의 대치는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공허한지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벤하닷은 “은도 내 것, 금도 내 것, 아내와 자녀도 내 것”이라며 압박한다. 아합은 “갑옷 입는 자가 갑옷 벗는 자처럼 자랑하지 못한다”며 맞선다.
두 사람 모두 각오와 말의 힘으로 승부를 보려 한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는 그들의 의지에서 결정되지 않는다. 여호와의 말씀이 개입하는 순간, 인간의 목소리는 힘을 잃는다. 성경은 반복해서 말한다. 인생은 의지로 밀어붙여서 이기는 게임이 아니라, 말씀에 의해 방향이 정해지는 전장이라고.
이 지점에서 첫 번째 착각이 드러난다. 의지의 착각이다. “마음만 먹으면 된다”는 구호는 사람을 고무시키지만, 동시에 사람을 무너뜨린다.
자기 실력과 경험을 절대 영역으로 믿는 순간, 작은 균열 하나가 인생 전체를 흔든다. 하나님은 우리가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고 믿는 지점을 흔들어, 그곳이 사실은 우리의 우상이었음을 드러내신다. 의지가 나쁜 것이 아니라, 의지가 하나님을 대체하려 할 때 문제가 된다.
두 번째는 방법의 착각이다. 우리는 실패하면 곧바로 방법을 바꾸려 한다. 더 좋은 전략, 더 효율적인 시스템, 더 검증된 성공 공식을 찾는다.
그러나 성경은 묻는다. 이긴 이유가 방법 때문이었는지, 하나님이 그 방법을 명하셨기 때문이었는지. 지방 고관의 청년들로 싸우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전략적으로 허술해 보인다.
하지만 그 방식이 효력을 가진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방법 자체에는 힘이 없다. 말씀이 떠난 방법은 그럴듯해 보여도 결국 사람을 소진시킬 뿐이다.
세 번째이자 가장 위험한 착각은 관용의 착각이다. 벤하닷이 패배한 뒤 살려달라며 내민 조건은 매우 합리적이다. 빼앗은 것을 돌려주고, 정치적·경제적 이익까지 보장하겠다고 한다.
아합에게 이것은 ‘좋은 선택’처럼 보인다. 더 이상 피 흘릴 필요도 없고, 실익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명하신 것은 타협이 아니라 단절이었다. 하나님이 적대하시는 것을 적대하지 않는 관용은 사랑이 아니라 불순종이다. 선지자가 변장해 던진 비유는 이를 분명히 한다. 맡겨진 것을 놓친 책임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온다. 하나님이 끊으라 하신 것을 끌어안는 순간, 그 대상은 은혜가 아니라 심판의 근거가 된다.
오늘날 이 관용의 착각은 더욱 그럴듯한 얼굴을 하고 있다. 싸우지 말자, 적당히 살자, 누구나 연약하지 않느냐는 말들은 부드럽다.
그러나 성경은 죄와의 관계에서 ‘무승부’를 허락하지 않는다. 원수를 분별하지 못하면, 결국 그 원수에게 먹힌다는 것이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관통하는 구조다. 예수는 사람을 정죄하지 않으셨지만, 죄를 정당화하지도 않으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라는 말 뒤에는 언제나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요구가 따른다. 사랑은 죄를 방치하는 방식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원수에 대해 또 하나의 착각을 한다. 돈, 사람, 조직, 성과가 인생의 마지막까지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 그 어떤 것도 나를 대신해 서 주지 않는다. 그 절대적인 패배의 자리에서 복음은 비로소 선명해진다. 우리가 아직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화목하게 되었다는 선언이다. 십자가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원수였던 자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전면전이었다.
질문은 단순하다.
나는 지금 따뜻함이라는 이름으로 무엇을 붙잡고 있는가. 관용이라는 말로 무엇을 끌고 가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정말 하나님 말씀 아래에 있는 선택인가. 순종을 넘어선 따뜻함은 결국 순종을 잠식한다.
신앙이 무승부에 머무는 이유는, 싸워야 할 죄와 타협했기 때문이다. 성경이 부르는 삶은 안전한 중간지대가 아니라, 말씀에 의해 승부가 나는 삶이다. 그리고 그 승리는, 원수였던 우리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를 택하신 그리스도의 승리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이 기사 좋아요
<저작권자 ⓒ 내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