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를 넘어선 시대, 트럼프의 퇴각..위기에서 멸망의 시대로기후위기의 시대에 “미국 우선”은 사형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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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럼프는 파리기후협약 탈퇴를 공식화 하고 있다. |
이 수치는 단지 과학의 표가 아니다. ‘인간은 자연을 도구화함으로써 스스로 해방될 수 있다’는 근대적 약속이 얼마나 공허했는지, 그리고 우리가 자유를 ‘타자와 미래의 희생’ 위에 쌓아 올린 형이상학이었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더구나 이 추세는 강한 엘니뇨가 사라진 ‘중립’ 국면에서도 이어졌고, 북태평양과 북동대서양의 해수면 온도는 여전히 비정상적으로 높게 유지됐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칸트적 물음 앞에서, 과학은 냉정하게 대답한다.
2030년까지 2019년 대비 전 세계 배출을 42% 줄여야 1.5℃ 경로에 남을 수 있고, 2℃ 경로조차 28% 감축이 필요하다. 말하자면, 우리의 윤리와 경제는 동시에 ‘감속’이라는 새로운 미학을 배워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정치는 종종 그 반대로 움직인다. 2025년 1월 20일, 트럼프 대통령은 “국제 환경 협정에서 미국 우선”이라는 행정명령에 서명하며 파리협정 탈퇴 절차를 재가동했다.
![]() ▲ 아프리카 사헬지구 1300만명이 기후위기로 죽어가고 있다. (사진=ytn 유투브 화면 캡쳐) |
같은 해 10월 초에는 국제 협약 이탈과 규제 철회, 연방 토지·해역에서의 화석연료 개발 확대, 녹색에너지 자금·연구 조직의 해체에 이르는 일련의 조치를 ‘국가 에너지 비상사태’라는 담론으로 포장해 속도를 더했다는 평가가 잇따랐다.
민주주의가 ‘미래 세대의 이해관계자’를 대변하기 어렵다는 구조적 취약성이 다시 한 번 드러난 셈이다. 그 빈자리는 철학이 메워야 한다.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은 오늘, 규제 철회 서명식의 손목과 생산지표 앞에서 고개를 든다.
배출을 늘리는 선택은 특별한 악의가 없어도, ‘경제 성장’이라는 평범한 선의로 포장되어 실행된다. 반대로 배출을 줄이는 선택은 ‘개인의 자유’와 ‘국가의 번영’을 해칠지 모른다는 공포에 휘둘리기 쉽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유의 정의를 갱신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자유가 ‘타자(가난한 이들, 비인간 생명,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들)에게 비용을 전가할 자유’였다면, 기후위기의 윤리는 ‘공동 취약성을 공유할 용기’로서의 자유다.
2024년 바쿠에서 열린 COP29는 신(新) 기후금융목표(NCQG)에 합의하며 개도국 지원 재원을 늘리겠다고 했지만, 손실·피해(Loss & Damage) 재원을 핵심 목표에 포함하지 못한 채 마무리되어 당사국 간 간극을 여실히 드러냈다.
국제정치의 언어는 여전히 타협과 미봉의 화법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언어도 자란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24년 전 세계 청정에너지 투자가 처음으로 2조 달러를 넘을 것이라 전망했다.
기술·자본·제도의 벡터가 뒤섞인 불균등한 추세 속에서, 우리는 두 개의 미래를 동시에 본다.
하나는 ‘도약 없는 성장’—온실가스의 덫 속에서 경제는 더 많은 에너지·물·토지를 요구하고, 도시의 여름은 길어지고, 농경사회가 축적해온 계절의 지혜는 예측 불가능성 앞에 무력해지는 미래다.
다른 하나는 ‘성장의 재문법’—법·세제·금융과 도시계획, 교육과 문화가 감속·감축·회복탄력성이라는 새로운 규칙을 익혀가는 미래다. 트럼프식 회귀는 첫 번째 미래의 가속페달이다. 그에게 기후는 ‘진영을 가르는 상징정치’이자 ‘연방 권한 축소와 규제 철폐’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기능한다.
![]() ▲ 기후변화로 인해 기후위기 캘리포니아 산불 |
반면, 유럽과 다수의 도시·주(州)들은 파리협정의 궤적을 ‘법정의 언어’로 굳히는 중이다. 12개월 평균이 1.5℃를 넘겼다는 사실은 법적 의미의 목표 위반을 뜻하진 않지만, 정치적 신뢰의 임계점이 무너지고 있음을 상징한다. 더구나 해양의 과열은 기상재난을 장기화·복합화하고, 보험·금융 시스템의 리스크 가격을 재작성하게 만든다. 자본주의의 심장은 미래 현금흐름의 현재가치다.
폭염·산불·홍수의 빈도와 규모가 재평가되면, 화석자산의 가치도 재평가된다. 철학은 여기서 또 한 번 개입한다. 우리는 ‘자연’을 값싼 외부로 두는 회계의 형이상학을 포기할 수 있는가. 응답은 이미 과학과 법, 금융의 단어로 번역되고 있다.
감축 경로에 남으려면 2030년까지 42% 감축—이 숫자는 추상적이지만, 실은 학교 급식의 식단, 냉난방 기준, 통근 거리, 주거 밀도, 전력요금제, 그리고 정치의 상상력을 바꾸라는 명령이다. 미국이 파리협정에서 한 발 물러설수록, 동맹과 도시는 더 앞서가야 한다.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다. 에너지 안보를 ‘공급 확대’의 과거 문법으로만 읽을수록, 환율·무역·물가의 연쇄 충격은 커진다.
반대로 ‘수요 관리와 전력망 혁신, 산업 공정 전기의존·수소전환, 도시 냉난방 집합효율’ 같은 미시적 개혁이 매크로 리스크를 줄인다.
윤리철학자로서의 과제는 명료하다. 자연을 ‘소비재’가 아니라 ‘공동 규범의 원천’으로 받아들이는 시민교육, 그리고 ‘번영의 정의’를 성장률이 아니라 취약성의 감소로 환산하는 새로운 공화국의 문법을 세우는 일이다.
트럼프가 과거로의 귀환을 ‘자유’라 부른다면, 우리는 미래의 지속가능성을 ‘자유의 확장’이라 불러야 한다. 자유는 더 많은 기계와 연료를 소유할 권리가 아니라, 재난의 계절에도 서로의 삶을 이어주는 제도와 공동체를 공유할 권리다.
기후위기는 과학의 경보이자, 정치의 시험이고, 철학의 요청이다. 이제 우리의 질문은 바뀐다. ‘얼마나 빨리 성장할 것인가’가 아니라 ‘얼마나 빨리 상처를 줄일 것인가.’ 파리의 경계선을 넘어선 12개월은 마지막 경고가 아니라 첫 문장에 가깝다.
이 문장을 누가, 어떤 언어로, 어떤 제도로 완성할 것인가. 미국이 등을 돌릴수록, 나머지 세계와 도시·주·시민사회는 더 치열한 문장력을 요구받는다.
시장의 숫자, 법정의 판결, 학교의 교과서, 미술관의 큐레이션, 예배와 의례의 언어까지—우리는 문명 전체의 편집을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미래세대의 자유’를 위한 최소한의 예의이며, 정치가 다시 철학을 배우는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