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서방에 들러

2023-07-26     강민숙

 

대서방에 들러

 

이민호

 

다 읽지 못한 사연보따리를 맡겼다

누군가를 대신하여 글을 써보겠다고

연필잡이 손가락 굳은 혹을 만지작거리며

법을 모르고 서식도 없는 이야기를

하루 종일 읽다가

책상 하나 들여놓을 방도 없이

어느 문전에서 서성이다.

법원이 떠난 자리

곧 문 닫을 대서방에 들러

허술함에 갇힌 내 삶도 함께 부려놓고 나왔다

그대가 하는 말은 바로 내 텃밭이고

그대의 깊은 한숨을 함께 나누며

그대의 눈물을 닦아 주겠다

요란했던 글들이 어지럽다

하나 남은 문지방을 나서며

이제 정연하다

누가 누구의 으깨진 생애를 대신하겠다고

할 말은 많지만

설움에 답하는데

무슨 형식이 있다고

 

 



ㅁ  이민호 시인

 

1994년 문화일보로 등단, 시집 참빗 하나, 피의 고현학, 완연한 미연, 토포포엠_그 섬평론집 한국문학 첫 새벽에 민중은 죽음의 강을 건넜다 』『도둑맞은 슬픈 편지연구서 김종삼의 시적 상상력과 텍스트성 』『낯설음의 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