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Undefined index: HTTP_ACCEPT_ENCODING in /home/inswave/ins_news-UTF8-PHP7/sub_read_amp.html on line 3 태종을 도와 조선의 기틀을 세운 경세(經世) 유학자, 하륜(河崙):내외신문
태종을 도와 조선의 기틀을 세운 경세(經世) 유학자, 하륜(河崙)
2021-07-27 고영화 향토 고문학 칼럼리스트
조선개국 時, 관학(官學)의 기틀을 잡은 경세 유학자(經世儒)이자, 치국(治國)의 요체(要諦)인 유학(儒學)을 상당한 수준에 올린 인물로서, 태종을 도와 조선의 기틀을 세운 정치가였던 이가 바로 호정(浩亭) 하륜(河崙 1347~1418)이었다. 하륜(河崙)의 어릴 때 이야기는 별로 전하는 것이 없으나 무척 영리하고 학문에 열심이어서 14세에 성균관 시험(국자감시)에 합격하였고 19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이때의 좌주(座主, 시험위원장)는 당대의 유명인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과 초은(樵隱) 이인복(李仁復 1308~1373)이었다. 좌주는 단순한 시험관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어서 학문과 관계 진출 면에서 문생을 일생 동안 지켜야 하며, 문생도 이를 따르게 되는데, 하륜(河崙)은 이때부터 30여년간 이색(李穡)을 따랐다. 이때 만난 문우(門友)가 뒷날 조선건국의 기둥이 된 정도전(鄭道傳)과 권근(權近)이다. 특히 6살 아래인 권근과는 막역한 사이여서 후일 권근이 죽자 통곡하며 제문을 지었다. 이인복(李仁復)은 첫눈에 약관의 하륜(河崙)이 큰 인물이 될 것을 알아보고 아우인 인미(仁美)의 딸로 배필을 삼게 했다.
조선조의 유학(儒學)을 이야기 할 때면 성균관⋅향교로 대표되는 관학(官學)과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은 사학(私學)을 들게 된다. 이 두 큰 흐름은 각각 훈구(勳舊)와 사림(士林)이 되지만 영남사림이 성종(成宗)조 이후 중앙무대에서 큰 활약을 보이게 된 데에는 하륜(河崙)⋅변계량(卞季良) 등에 의해 기틀이 잡힌 관학이 밑받침이 됐다. 이들이야말로 국가대업의 기틀을 다지면서 한편으로 조선유학의 주류인 성리학이 꽃필 수 있는 기초를 이뤘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런 면에서 조선개국과 함께 하륜(河崙 1347~1418)⋅하연(河演 1376~1453)⋅강희안(姜希顔 1417~1464)⋅정이오(鄭以吾 1347∼1434)⋅정분(鄭 1382~1454)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한 진주(晋州)의 위치가 돋보인다.
○ 하륜(河崙)은 당대 제일의 정치가이며 외교관, 경제, 음양, 지리에 통달했고 역사, 문장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고, 오늘의 서울(한양)이 있게 한 인물이었다. 경제육전(經濟六典)을 짓고 태조실록을 편찬했으며 고려국사를 개찬했고 다섯 번 정승을 지내고 문형(文衡)을 맡은 국가의 대들보였을 뿐 아니라, 다방면에 걸친 그의 업적을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으나 유교 덕치에 입각해 조선의 제도문물을 정비한 경세유학자(經世儒學者)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영남사림과 관련해서 새로이 평가되는 것은 그의 심성설(心性說)이다. 하륜(河崙)의 심성설은 커다란 체계를 갖춘 것은 아니지만 특히 성설은 영남사림에 내면적으로 이어졌다는 평을 받는다.
1) 청풍루[淸風樓] 경기도 광주에 있다(在廣州) / 하륜(河崙)
少年曾此一看花 젊어 예서 한 번 꽃을 보았더니
老大今來感慨多 늘그막에 지금 오니 감개롭구나
歲月不留人損盡 세월은 흘러 사람은 변하였건만
眼前風物尙繁華 눈앞의 풍물은 오히려 번화하네
○ 하륜은 호(號)가 호정(浩亭), 본관이 진주(晋州)인 그는 1347년 12월 촉석루가 굽어보이는 진주(晋州) 남동(南憧)리에서 태어났다. 하륜(河崙)은 고려 현종(顯宗) 때 거란군이 쳐들어오자 자신이 볼모가 되는 조건으로 거란군을 철병하게 하고 스스로 잡혀 가면서도 끝내 거란을 섬기기를 거부하다 죽음을 당한 하공진(河拱辰)의 11세손이다. 어머니 강(姜)씨 또한 진주세족의 따님이어서 진주는 하륜(河崙)의 명실상부한 고향이다. 지금도 경남 진양군 미천면 오방동 오방산(梧坊山) 기슭에 하륜의 증조부 이하의 묘가 육칠백년 동안 손상 받지 않고 남아있어 옛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 여말선초 정치적 격동기였던 1388년 그는 최영의 요동정벌계획을 극력 반대하다가 강원도 양양(襄陽)에 유배당했다. 그해 여름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최영이 제거되자 관직을 회복했다. 이색, 정몽주 등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함으로써 초기에는 조선 왕조 건국에 반대했으나 정치적 변신을 해 경기좌도도관찰출척사가 됐다.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 좌부대언(左副代言), 우대언(右代言) 등을 거쳐 46세의 나이로 전라도 관찰사를 맡고 있을 때 이성계(李成桂)의 역성혁명을 맞게 됐다.
그 후 1396년 예문춘추관학사로 임명됐을 때 명나라와의 표전시비로 정도전과 정면으로 대립했다. 이에 정도전의 미움을 사게 돼 1397년 계림부윤으로 좌천됐다. 이후 이방원과 급속히 가까워져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적극 지지했다. 태종 즉위 후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에 책록되었고 1402년(태종 2) 좌정승이 되었으며, 명나라 영락제(永樂帝)의 등극을 축하하는 등극사(登極使)로서 명나라에 가 조선 왕조를 승인하는 고명인장(誥命印章)을 받아왔다. 1416년 70세로 치사(致仕)하여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치사 후 왕명으로 함길도 선왕의 능침을 순심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