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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제일의 가단(歌壇)을 형성한 강호가도의 선구자 ‘송순(宋純):내외신문

호남 제일의 가단(歌壇)을 형성한 강호가도의 선구자 ‘송순(宋純)

약 500년 전 면앙정(?仰亭) 송순(宋純 1493~1582)은 당대 최고의 격조 높은 시인송강이나 고산에 앞서 우리 시가 문학의 꽃을 피우게 한 호남의 대표적인 시인은 단연코 면앙정 송순

2021-07-22     고영화 향토 고문학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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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시인은 늘 존재했다. 그런데 요즘에는 품격이 떨어지는 시인이 너무 많다. 그래서인지 시인 등단증이 운전면허증 같이 대중화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해방 이후의 현대시는 다 거기서 거기다. 한마디로 새로운 것이 없고 언어유희 외에는 읽기조차 짜증날 정도다. 그러다보니 거기엔 사유도 철학도 통찰도 없다. 반면에 실제 우리가 인지하는 멋진 문인(文人), 존경스런 시인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거기다가 민초의 한(恨)은 외면하고 꽃과 달, 고향, 어머니, 사랑타령이나 하는 시인과 대비하여, 인간 삶의 통찰은 물론 시대의 아픔과 절규 그리고 시대의 소명과 더불어, 민중의 아픔을 자아의 아픔으로 승화하여 노래하는 시인과는 서로 격(格)이 다르다.

약 500년 전 면앙정(?仰亭) 송순(宋純 1493~1582)은 당대 최고의 격조 높은 시인이었다. 그는 시조, 가사, 한문학 등을 포함해 우리나라 시가 문학에 큰 업적을 남겼다. 또한 그는 당시 거듭되는 흉년, 비참한 민생을 차마 볼 수 없어, 애민정신으로 민중의 아픔을 노래하기도 하였고 벼슬에서 물러나 강호생활을 하면서 자연예찬을 주제로 한 작품을 창작함으로써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27세에 관직에 나아가 50년을 존경받는 관료로 보내고 난 후, 78세에 은퇴하곤 고향에 내려가 누정을 짓고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원류로 가단(歌壇)을 형성하면서, 90세에 세상을 버리기까지 신선처럼 살았던 고귀한 인품의 소유자였다.

우리나라 국문학상 이름난 시가시인(詩歌詩人)을 꼽으라면 면앙정(?仰亭) 송순(宋純),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4),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 1561~1642)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에 송강이나 고산에 앞서 우리 시가 문학의 꽃을 피우게 한 호남의 대표적인 시인은 단연코 면앙정 송순이다. 그는 담양에 있는 자신의 정자 면앙정에서 호남가단(湖南歌壇)?을 대표하는 면앙정가단(?仰亭歌壇)을 창설했으며 또한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선구자 칭호를 받고 있는 인물로, 조선 시가문학에 크게 기여하였다. 송순은 남평의 박순, 성산의 임억령, 장성의 김인후와 기대승, 나주의 임제, 담양 창평의 정철 등과 교유하면서 <면앙정가> 등을 짓고 집단적으로 시가를 향유하였다. 그는 인품과 성격이 너그럽고 온화하여 사람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그와 동년배 친구인 성수침(成守琛 1493~1564)은 ‘온 세상의 선비가 모두 송순의 문하로 모여들었다.’고 하였으며, 이황(李滉 1501~1570)은 ‘하늘이 낸 완인(完人 완벽한 사람)’이라 할 정도로 높이 평가하였다. 이는 그가 읊은 시에서 이를 입증하고 있다.

○ 여기서 강호가도(江湖歌道)란  조선시대 시가문학(詩歌文學)에 널리 나타난 자연 예찬의 문학 사조(思潮)를 말한다. 자연에 묻혀 살면서 유교적 관념을 노래한 작품이 많은데, 영남의 이현보(李賢輔)와 호남의 송순(宋純)에 이르러 구체적으로 풍조(風潮)가 성행하는 계기가 됐다. 이러한 처사(處士) 문인(文人)들이 유교적 이상을 자연과 융합하여 실현하고자 집단적 교유를 하던 시조문학 동호인 모임을 강호가단(江湖歌壇)이라고 한다.

● 그럼 면앙정(?仰亭) 송순(宋純 1493~1582)의 약력을 살펴보자. 그는 전남 담양군 봉산면 출생으로 본관은 신평(新平), 자는 수초(遂初)ㆍ성지(誠之), 호는 기촌(企村)ㆍ면앙정(?仰亭)이며, 부친은 증 이조판서 송태(宋泰)이다. 그를 한마디로 말하면, 면앙정가단(?仰亭歌壇)의 창설자이자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작품으로는 호남 가사의 원류로 평가 받는 〈면앙정가〉를 비롯하여 시조 22수와 한시 520여 수가 남아 있다. 또한 그는 1519년(중종14) 별시 문과에 합격한 뒤 여러 관직을 거치다가 한성부윤, 의정부 우참찬 겸 춘추관사를 끝으로 관직생활 50년 만에 은퇴하였다. 이후 고향에서 누정을 짓고 우리나라 가사문학의 원류인 가단(歌壇)을 창설했다.

● 송순(宋純)의 면앙정(?仰亭)과 가사(歌辭) 면앙정가(?仰亭歌)

전남 담양군 봉산면 면앙정로 382-11에 위치한 면앙정(?仰亭)은 그가 41세 되던 해인 1533년(중종 28) 담양의 제월봉 아래에 세운 정자로서, 여기서 호남 제일의 가단(歌壇)을 형성하였다. 당시 김안로가 권세를 잡자 귀향하여 면앙정을 짓고 시를 읊으며 지냈는데, 이때부터 임제·김인후·고경명·임억령·박순·이황·소세양(蘇世讓)·윤두수(尹斗壽)·양산보·노진 등 많은 인사들이 출입하여, 그와 함께 면앙정을 중심으로 자연예찬을 주제로 한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또한 그는 음률에 밝아 가야금을 잘 탔고 풍류를 아는 호기로운 재상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4년 뒤 1537년 김안로가 사사되자 복귀하여 사헌부 집의를 시작으로 경상도관찰사와 사간원대사간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중종실록’을 찬수했다. 1550년에 대사헌·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사론(邪論 도리에 어긋난 논설)을 편다는 죄목으로 충청도 서천으로 귀양을 갔다. 이듬해 풀려나 1552년 선산 도호부사가 되고, 면앙정을 증축하였다. 이 때 기대승이 <면앙정기(?仰亭記)>를 쓰고, 김인후, 임억령, 박순, 고경명 등이 면앙정에서 시를 지었다. 이어 전주부윤과 나주목사를 거쳐 1562년 70세의 나이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다. 그의 일생 중에 백미인 것은, 그의 나이 87세에 열린 회방연(回榜宴)이었다. 과거 급제 60주년을 기념하는 잔치다. 조선 시대 통틀어 4명만이 그 영광을 누렸다고 하니, 회방연은 하늘이 내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면앙정에서 그의 제자 정철 고경명 임제 노진 등이 송순을 태운 대나무 가마를 메고 내려왔다. 그 뒤를 각 고을 수령과 사방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뒤따랐다. 만복(萬福)을 타고난 그를 모두가 감탄하며 부러워했다고 <담양부지(潭陽府誌)>에서 전하고 있다.

○ 시조(時調)는 3장 6구 45자 내외의 운문으로 정제된 형식을 갖고 있어, 감정과 사유를 자유롭게 표현하기에 불편했다. 그래서 하나는 지키고 하나는 풀어버리는 가사(歌辭)가 등장했다. 가사는 ‘4·4조 4음보의 연속체 시가’라고 정의한다. 운문과 산문, 시와 소설의 중간 형태다. 송순(宋純)이 지은 가사(歌辭) <면앙정가(?仰亭歌)>는 호남 가사문학의 원류가 될 뿐 아니라, 내용 형식 가풍 등에서 조선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그는 음률에 밝아 가야금을 잘 탔다. “굽어보면 땅이요, 우러르면 하늘이라. 이 가운데 정자라니, 흥취도 호연하네. 풍월을 불러보세, 산천을 당겨보세. 명아주 지팡이 짚고, 백 년을 보내리라.”

송순은 1533년 낙향하여 당시 10년 전에 마련한 땅에다 면앙정을 지었다. 이때 그가 감회를 읊은 시가 명품 그 자체다. “십년 경영하여 초가 한 칸 지어내니, 반 칸은 청풍이요 반 칸은 명월이라, 강산은 드릴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면앙정에서 제자들에게 시 창작과 강학을 하며 받은 사랑만큼 되돌려 주었다. 그는 관용과 대도의 선비였다. 그는 어지러운 시대에 많은 부침 속에서 자신을 지키며 도리를 다했다. 이런 면에서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사표(師表)가 될 것이다.

● 다음은 송순(宋純 1493~1582)이 전주부윤과 나주목사, 선산 도호부사, 경상도관찰사 등 지방 외직을 전전하면서 그의 민중에 대한 애민의식을 읽을 수 있는 시 <농가의 원성(田家怨)>이다. 그는 동시대 어느 누구보다 민중에 대해 깨어 있는 문신(文臣)이었다. 그의 작품 <농가의 원성(田家怨)> <거지의 노래를 듣고(聞?歌)> <이웃집 곡성을 듣고(聞隣家哭)>는 당시 모범적인 목민관으로서, 조선사회의 현실에 대한 그의 깨어있는 의식을 알 수 있게 하는 대표적인 한시들이다.

1) 농가의 원성[田家怨] / 송순(宋純 1493~1582)

舊穀已云盡 지난 곡식은 벌써 다 떨어졌다 하는데

新苗未可期 새로 핀 이삭 여물 날 언제런지

摘日西原草 날마다 서쪽 언덕에서 나물을 캐나

不足充其飢 굶주림을 채우기엔 부족하다지.

兒啼猶可忍 아이들 배고파 우는 거야 참는다지만

親老復何爲 늙으신 부모님은 어찌하리오

出入柴門下 사립문밖에 나가 보아도

茫茫無所之 갈 곳 없어 아득할 뿐이네

官吏獨何人 아전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責公兼徵私 세금 닦달하고 또 사사로이 뜯어가네

窺缸缸已空 항아리를 뒤지나 이미 비워있고

視機機亦  베틀을 보아도 역시 망가져 있으니

吏亦無奈何 아전 또한 어쩌지 못해 화를 내며

呼怒繫諸兒 소리치고 성내며 아이들을 묶어 가네

持以告官長 의지하고자 원님에게 고하였더니

官長亦不悲 사또 또한 슬퍼하지도 않네.

桎梏加其頸 차고를 목에 씌어서

鞭?苦其肢 치고 때리고 다리에 주리를 튼다.

日暮相扶持 해 저물녘 서로 부둥켜안은 채

齊哭繞故籬 일제히 통곡하니 그 소리 울안을 감도네.

呼天皆乞死 하늘에다 모두 죽여 달라 빌어도

聽者其又誰 들어줄 자 그 누구란 말이더냐

哀哀不見救 슬프고도 슬프도다. 구제 받지 못한다면

丘壑空積屍 언덕과 골짜기에 부질없이 시체가 쌓일 텐데.

○ 위의 시 <농가의 원성(田家怨)>을 읽고 나니 울분을 참지 못할 만큼 가슴이 아프고 괜스레 눈물이 핑 돈다. 시의 내용을 살펴보자. 먼저 음력 4월 즈음 춘궁기의 굶주림에 오직 절망뿐인 백성들의 눈물겨운 삶을 펼쳐 놓더니 그 다음으로 아전들이 세금을 내지 않는다고 백성들을 모질게 닦달하고 수탈하는 장면을 그려놓았다. 백성의 집 뒤주에는 곡식 한 톨 남아 있을 리가 없고 베틀에는 베(布) 한 치가 남아 있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도 아전들은 세금 대신 죄 없는 아이들을 묶어서 원님 앞으로 끌고 가서 바친다. 원님도 역시 같은 족속인지라 불쌍하게 여기지 않고 어린 것들에게 큰칼을 씌우고 매질하면서 주리를 트니 통곡소리가 하늘을 찌른다. 하늘에 대고 차라리 모두 죽여 달라 울부짖어도 들어줄리 없다. 결국 부질없는 시체가 언덕과 골짜기에 쌓이고, 구제 받지 못한 불쌍한 민초들의 처절한 절규로 마무리하고 말았다. 예나 지금이나 백성을 사랑하는 목민관, 청렴결백하고 모범적인 관리가 많아야만 좋은 사회, 건강한 나라가 되고, 민초들의 삶의 질도 향상된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일 것이다.

● 다음 시는 정의로운 세상을 바라면서 당시의 세태를 풍자하였다. 낚시 바늘을 달지 않고 위수(渭水)에서 낚싯대를 드리운 것을 비웃지 말라 한다. 강태공(姜太公)은 위수(謂水)의 강가에서 매일 낚시를 하는데 그는 미끼를 끼우지도 않은 채 낚시를 했다. 이는 고기를 잡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을 등용해 줄 임금을 기다리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마침 주 문왕(周文王)은 위수 근처로 사냥을 갔다가 그를 만나 그의 식견과 학식을 알아보고 도성으로 모셨다. 이후 강태공은 주나라 문왕, 무왕을 도와 주나라를 건국한 일등공신이 되었고, 전국칠웅인 제(齊)나라의 왕이 되었다. 이에 이 시에서 송순은 은근히 자신을 강태공에 비유하고 있다.

송순(宋純)이 살았던 시기는 4대사화가 일어났던 혼란한 때였다. 그가 41세 되던 해 1533년에, 전남 담양군에 면앙정(?仰亭)을 짓고 시를 읊으며 지냈다. 1550년 대사헌·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진복창(陳福昌)과 이기(李?) 등에 의하여 사론(邪論 도리에 어긋난 논설)을 편다는 죄목으로 충청도 서천으로 귀양 갔다. 이듬해에 풀려나 1552년 선산 도호부사가 되고, 이 해에 면앙정을 증축했다. 특히 송순은 벼슬에서 물러나 강호생활을 하면서 자연예찬을 주제로 한 작품을 지음으로써 강호가도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으며, 조선 시가문학에 크게 기여하였다.

2) 어부[漁父] / 송순(宋純 1493~1582)

秋江百里正平虛 가을 강 백리가 잔잔하고도 고요한데

泛泛輕?聽所如 둥둥 뜬 거룻배가 제 가는 대로 받아주나니

莫學群兒爭笑餌 사람들아, 미끼를 다투면서 웃지들 마시라

渭翕竿下不歸魚 위수 강의 낚싯대엔 물고기가 물지 않는다네.

● 그리고 다음으로 <야중즉사(夜中卽事)>는 ‘元’ ‘文’ 운(韻)의 칠언절구로, 저자가 1520년(중종 15)에 서울시 옥수동 한강 가(臨江) 동호당(東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할 때, 한밤중 잠결에서 깨어나 느낀 대로, 생각나는 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시상을 전개하였다. 시 내용에서 송순(宋純)은 여기 동호독서당에서 독서하며, 기묘사화(1519년)때 자신이 직접 경험한 바를 잊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가독서(賜暇讀書)는 조선시대에 국가의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고 문운(文運)을 진작시키기 위해서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한 제도이다. 사가독서제도가 최초로 실시된 것은 1426년 12월 세종 때인데 이후로 제도가 부침을 거듭하다가, 중종반정 후 1506년 11월에 다시 부활시키고 사가독서에 관한 절목(節目)을 마련할 것을 지시하였다. 1517년에는 한강 두모포(豆毛浦)에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을 설치하여 사가독서에 열중할 수 있도록 하였다.

3) 밤중에 느낀 대로 적다[夜中卽事] / 송순(宋純 1493~1582)

渚宿舟人半夜喧 물가에 사는 어부가 한밤중에 시끄러워 잠을 깼다가

遙知急雨沒江  멀리 폭우가 쏟아져 범람한 강물에 물가가 잠겼음을 알겠네.

波聲遠駕南陵外 물결소리와 멀리 수레 끄는 소리가 남쪽 언덕 너머로부터

兼送山窓喚客魂 산속 집 창에다 아울러 보내어 나그네의 넋을 소환한다.

이 시 내용을 살펴보면, 강가에서 사는 어부는 멀리서 폭우가 쏟아지는 것을 보면서 한밤중에 나가보지 않고도 강변의 땅이 물에 잠겼음을 안다. ‘멀리 남쪽 언덕을 넘어가는 왁자지껄한 수레 소리를 듣고 나그네의 넋을 불러오고 싶다’는 시 구절은, 시적 화자인 나그네가 홍수로 난리가 난 상황이 몹시 근심스러워 애타하고 있다는 뜻이다. 다른 한편으론 당시 시대상황을 고려해 중의적 관점에서 해석해보면, 쏟아지는 폭우는 훈구파 척신들이 일으킨 사화(士禍)를, 저 멀리 빗속에서 떠나가는 수레는 유배 가는 사림(士林)들을 비유하여 표현한 것이다.

● 아래 시 <위수가(渭水歌)>는 중국 강태공(姜太公)이 위수(渭水) 강가의 반계(磻溪)에서 미끼 없이 낚시질하며 천하에 큰 뜻을 펼 때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주 문왕(周文王)을 만나서 사부(師傅)로 추대되었다. 뒤이어 문왕의 아들인 무왕(武王)을 도와서 은(殷)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평정하였다는 고사를 떠올려, 마치 송순(宋純) 자신이 그러한 강태공처럼 때를 기다리는 현인으로 투영해서 이 글을 썼다. 위수(渭水)는 중국 장안 북쪽을 흘러 관내를 관통하는 황하강의 지류이다.

4) 위수가[渭水歌] 三首 ‘魚’‘眞’‘尤’ 운(韻) / 송순(宋純 1493~1582)

??一老翁 머리털이 하얗게 센 한 늙은이가

日釣渭水魚 날마다 위수의 물고기를 낚시한다네

投竿魚不食 낚시 줄 던져 보아도 고기는 물지 않으니

渭水空淸虛 위수는 쓸데없이 맑고도 깨끗하다.

年年自不厭 매해마다 스스로 싫증내지 않으니

終是無心人 끝까지 내내 무심한 사람일세.

無心天所借 무심함은 하늘이 점지해준 것이라

會作周王臣 만나서 주(周) 왕의 신하가 되었구려.

後來釣磯上 그 자취를 따라 낚시터로 와서 낚시하는데

有如此翁不 마치 이 늙은이가 그와 비슷하진 않으려나.

渭水復渭水 위수(渭水)여~ 위수여~

萬古長東流 언제나 변함없이 동쪽으로 흘러가구나

● 아래 시편 <갈매기를 읊다(詠鷗)>는 ‘갈매기에게 한 맹세(白鷗盟)’라는 고사성어를 인용해서 쓴 오언시로 운(韻)은 ‘庚’이다. 송순(宋純)이 한양의 한강변에서 갈매기를 보고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에 적은 글이다. 그는 아마 이 시를 쓰면서 고향 담양으로 돌아가 영산강에서 갈매기와 벗하며 유유자적하는 삶을 상상 했지 싶다.

5) 갈매기를 읊다[詠鷗] ‘庚’ 운(韻) / 송순(宋純 1493~1582)

江湖萬頃波 강호(江湖)의 한없이 너른 바다를

往來有何營 오고 가면서 어떻게 살아가느냐?

沙白身亦白 모래밭이 흰빛이니 몸 또한 흰빛이고

水淸心亦淸 강물이 맑으니 마음 또한 맑도다.

夜傍汀洲宿 밤에는 물가 모래톱에서 자더니

朝入滄浪鳴 아침에는 푸른 물결에 들어가 울고나.

終始無心物 처음부터 끝까지 사물에 무심한데

誰人?與盟 어느 누가 강하게 맹세하랴.

古今江海上 예나 지금이나 강과 바다에는

只有一鷗名 오직 갈매기의 명성만 있다네.

○ 백구맹(白鷗盟)이란  ‘갈매기에게 한 맹세‘라는 뜻으로, 전원으로 돌아가 살리라던 맹세이다. 그리고 ’기심(機心)‘은 교사(巧詐)한 마음, 사특한 마음이다. 열자(列子) 황제(黃帝)에, “바닷가에 사는 어떤 사람이 갈매기를 몹시 좋아하여 매일 아침 갈매기와 놀았는데, 날아와서 노는 갈매가가 백 마리도 넘었다. 그의 아버지가 ‘너와 함께 노는 그 갈매기를 잡아오라. 나 역시 갈매기를 좋아한다.’고 하였다. 그 다음 날 바닷가로 나가보니 갈매기들이 하늘위에서 날면서 아래로 내려오지 않았다.”한다.

옛날에는 세상을 등지고 사는 선비나 은자(隱者)들은 한갓 바닷새에 불과한 갈매기를, 사람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미물로 여겼기에 갈매기를 벗으로 삼았다.

● 아래 시는 ‘寒’ 운(韻)의 오언율시로, 강호자연에 묻혀 유유자적하고 안분지족하는 삶의 경지를 읊은 시다. '창랑(滄浪)'은 은자가 사는 강물. 또는 중국 전국시대 초(楚)나라의 재상이자 시인인 굴원(屈原 BC 343~BC 278)의 '어부사(漁父?)'의 마지막 구절 '창랑의 물결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滄浪之水淸兮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可以濯吾足)’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세상에 바른 도가 행해지면 나아가 벼슬을 하고, 바른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물러나 은거한다는 뜻이다. 북송(北宋)의 시인 소순흠(蘇舜欽 1008~1048)은 쉬저우(蘇州)에 정자를 짓고 굴원의 '어부사' 시구(詩句)를 빌려 그 이름을 창랑정(滄浪亭)이라고 하였다. 시에서 송순(宋純)은 한가롭게 여생을 보낸 북송 시인 소순흠과 굴원의 '어부사'에 나오는 낚시하는 노인에다 자신을 투영하고 있다.

6) 어부[漁父] / 송순(宋純 1493~1582)

皓髮滄浪  백발 머리의 창랑(滄浪) 노인이

斜陽三尺竿 석양에 석자 낚싯대를 드리웠네

跡與鷗鳥沒 자취는 갈매기와 함께 사라졌고

心與雲海寬 마음은 운해(雲海)처럼 너그러워라

長風萬里舟 거센 바람에 만 리 떠나갔던 배가

出入輕波瀾 가벼운 물결 헤치고 드나들고 있네

志願不在魚 원하는 바는 물고기에 있지 않으니

何地非吾安 어디인들 내가 편하지 않는 곳 있으랴.

7) 어부의 집에서 보고 들은 대로[漁家卽事] / 송순(宋純 1493~1582)

人歸鷗宿夜何如 인적 없이 갈매기가 잠자는 밤은 어떠한가?

山月浮天數丈餘 하늘에 뜬 산위의 달은 두어 길 남짓하여

且喚小?明細火 작은 거룻배를 불러서 희미한 횃불을 밝히고는

澄江十里任叉魚 십 리 맑은 강물에서 물고기를 쉬이 잡고나.

위 <어가즉사(漁家卽事)>는 ‘魚‘ 운(韻)의 칠언절구로 송순이 강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의 집에 들렀다가 보고 들은 바를 적은 글이다. 달빛이 어두운 저녁에 횃불을 밝혀 고기잡이를 하면 유달리 물고기가 많이 잡힌다. 시구(詩句)에서 두어 길 크기 산 위의 달이란  초승달이 뜬 모습을 말한다. 초승달은 저녁에 서쪽 하늘 부근에서 떴다가 곧 지고 만다. 그래서 이 날 횃불을 밝혀 물고기 잡기에 가장 좋은 날이다. 아마 송순은 이날 어부로부터 물고기를 넉넉히 얻어 집으로 돌아왔지 싶다. 시를 읽고 나면 두어 폭의 그림이 연이어 연상되는데, 시인이 이웃과 더불어 고향에서 수분지족하고 유유자적하는 삶이 부럽게까지 느껴진다.

● 다음 시는 위의 시와 마찬가지로 강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의 모습을 한 세트로 담아내었다. 다만 이 시에서는 강촌(江村)에서 야간 어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어부와 밤새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모습을 간결하게 그려냈다는 점이 특징이다.

강마을의 고기잡이 불빛[江村漁火] ‘先’ 운(韻)/ 송순(宋純 1493~1582)

夜深江上路 깊은 밤에 강가의 길을 걷노라니

明火見歸船 횃불을 밝히고 돌아오는 배를 본다.

有婦應相待 아내들이 응당 남편을 기다리며

開門不得眠 문을 열어놓고 잠 못 드누나.

● 다음 시 <해질녘 그리움(暮思)>은 ‘東’ 운(韻)의 칠언절구로, 조선 중종 1517년에 한강 두모포(豆毛浦)에다 동호독서당(東湖讀書堂)을 설치했는데 마침 송순(宋純)이 정예 문신으로 뽑혀 1520년(중종 15)에 동호당(東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할 때, 그때 지은 시편이다.

9) 해질녘 그리움[暮思] / 송순(宋純 1493~1582) 1522년

日已西時月未東 해는 이미 서쪽으로 기울었는데 달은 동쪽에 없으니

群星爭耀點長空 뭇별들이 밝음을 다투지만 장공(長空)의 한 점이라,

山川氣色因沈沒 산천은 기운 잠기고 빛깔마저 사라졌으니

誰識孤懷病此中 누가 이내 외로운 생각 속에 아파하는 줄을 알려나?

위 시(詩)를 적을 당시 송순의 나이는 28세였다. 그는 기묘사화로 인해 사림파들이 대거 숙청되어 국정 전반에서 암울한 기운이 감돌 때였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어두운 시국을 빗대어 자신의 심란한 마음을 시(詩)에다 표현한 것이다. “해가 지고 달이 나오지 않으니, 높은 하늘의 뭇별들이 서로 밝다고 다투네. 산천은 기운 잠기고 빛깔마저 사라졌으니, 누가 이내 외로운 마음이 아파하는 줄을 알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