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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만에 시집 낸 70대 후반 여류 시인 이정숙, 시집 ‘나팔꽃에 숨어 있는 저승을 노래함’:내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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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만에 시집 낸 70대 후반 여류 시인 이정숙, 시집 ‘나팔꽃에 숨어 있는 저승을 노래함’

편집부 | 기사입력 2016/06/10 [15:22]

35년만에 시집 낸 70대 후반 여류 시인 이정숙, 시집 ‘나팔꽃에 숨어 있는 저승을 노래함’

편집부 | 입력 : 2016/06/10 [15:22]


발원으로 한가득 채워진, 70대 후반 여류 시인 이정숙의 처녀시집

우리가 이 시집에서 만나는 ‘70대 소녀’의 나긋나긋한 감성

[내외신문=조동현 기자] 우선 81년에 시단에 데뷔한 시인이 35년만에 시집을 낸다는 것은 매우 드문 경우다. 최근 화제의 중심에 선 시인 이정숙은 70대 중반이다. 그는 처녀시집 ‘나팔꽃에 숨어 있는 저승을 노래함’에서, 아주 사색적이면서도 젊은 에스프리가 약동하는 시를 쓰고 있다.

70대 중반이면 자꾸 충고하려고 할 나이다. 마치 98에 처녀시집을 낸 일본의 시바다 토요가 ‘약해지지 마’에서 자꾸 충고하고 있듯이. 그러나 이정숙은 충고하지 않는다. 이정숙은 충고하지 않고 30대나 40대로 그냥 남아 있다.

?시인은 누구나 느끼고 있는 바이지만, 시가 잘 쓰여지는 연대(年代)가 있다. 이정숙의 경우는 40대를 중심으로 많은 시가 쓰여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번 나온 시집을 보아도, 그가 데뷔한 80년대 초반 전후해서 많은 시가 쓰여진 것같다. 그 가운데 하나인 ‘편도선’의 경우.

//온몸이 성하게 돌아갈 적엔 /삼천번을 넘게 외우던 구절도 /첫 구절부터 외국어였습니다. //영혼이 날개를 달아도 /헐벗은 몸 하나는 짐짝처럼 /승화되기엔 참으로 멀었습니다. //(중략) //팥알만한 편도선 한 알이 /부처님도 예수님도 거절했습니다. /몸살이 팔다리를 꺾어오는 밤이면/베드로처럼 세 번 이상 /아니라고 도리도리 /어려울 것 없는 배신. //나에겐 맡기지 마십시오. /안 보이는 영혼의 세계는 /내겐 너무나 벅찬 짐입니다. //(중략)편도선부터 배신해 버린 나. //주저앉기 싫어서 /돌아서기 싫어서 /잘라버린 편도선.// 날개는 아직 없습니다.

이 시 ‘편도선’은 시인의 몸과 마음의 상태가 전혀 어렵지 않게 전개되면서도, 영혼과 육체의 갈등이 심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나에겐 맡기지 마십시오’ 의 3-4 구절은 육체의 비명이다.

육체의 아주 작은 부분인 편도선이 영혼까지 지배하고 마침내는 부처님도 예수님도 거부하게 만드는 인간의 나약함. 육체적 조건에 항복하기 싫어서 잘라 버린 편도선, 그런데 마지막 행은 급반전한다.

‘날개는 아직 없습니다’에서 인간의, 그리고 육신의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노래한다. 편도선을 잘라버리고 나서도, 날개가 돋아나지 않는 육신의 한계.

이 시인의 10대 시절 습작을 보여준 ‘나인 걸스’는 아마도 아홉 소녀의 그룹 이름 같은데, 역시 소녀들이 가장 많이 시로 옮기는 ‘코스모스’. 당연히 이 시인도 ‘코스모스’에서 가녀린 소녀의 꿈을 코스모스에 싣는다.

그런데 이 시집의 제4부 에서의 ‘코스모스’는 전혀 다른 사유의 열매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꽃잎 그대로 종신할 수는 없는가/꽃잎 그대로 운명할 수는 없는가./다가서는 108개의 손.

다가서는 108개의 慾.//가지고 싶은 건 /바람 뿐이에요. /가지고 가고 싶은 것도 /바람 안 묻은/달빛뿐이에요. //숨은 자궁 열어 놓고 /벗은 몸에 아이 낳고 /감췄던 젖 물려주고 /남자 따라 籍 바꾸고/북풍 불면 스러지고./가까이 오지 마세요.//나는 떨어지는 잎일 뿐이예요./가녀린 가을 잎‘

이 시집 제2부 ‘나인 걸스’에서의 ‘코스모스’와, 제4부 ‘나팔꽃 속에 숨어있는 저승을 노래함’의 ‘코스모스’는 아름다우면서도 독자를 긴장시키고, 머리를 두 무릎 사이에 얹고 깊은 생각에 빠지고 싶게 한다.

‘108개의 손과 108개의 慾’ 부분은 어떻게 보면 불교의 인연설을 노래하는 듯 보이지만, 앞의 ‘코스모스’ 와 뒤의 ‘코스모스’가 이렇게 달라지는 곳에, 이 나라 여성이 지니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운명감이 깃들여 있기도 하다. 이런 운명감,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어 보이는 이런 인연설이나 운명감은, 이정숙의 시 도처에서 우리를 긴장시키기도 한다.

“이승으로 씨 받고/저승으로 피는 꽃을 /아침 저녁 눈인사로 /보내는 객석.”

아침에 피어있는 평범한 나팔꽃에서 이승과 저승을 찾고, 자신의 위치가 ‘객석’임을 노래하는 이 시에서, 우리는 이정숙시의 아름다움과 함께 그 사유의 깊이를 체험한다.

그러면서도 이정숙은 그냥 가녀린 ‘여류시인’으로 남겨질 존재이기를 거부한다. ‘하얀 장미’에서 이정숙은 앞에서 언급한 인연설이나 운명감에 정면으로 맞서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정식으로 긴장한다. 그의 시 ‘하얀장미’를 보자.

“돌아앉지 마라. /집 나와 삭발한 여자, /그 집 다시 찾아가 /울 밖으로만 기웃거리듯 /풀 죽어 /눈 내려뜨지 마라. //거친 바람 굵은 비 //7월 장마에/온몸 적시며 떨더라도 /고개들고 마주서라, 저 하늘과. “

이정숙은 ‘하얀장미’를 통해 가녀릴 수도 있는 ‘여류시인’의 한계(?)를 벗어나 의연히 하늘과 마주 서고 있다. 이런 강인함이 혹시 생활에서 온 것은 아닐까, 생각하는 독자가 많을 것이다.

시인은 자신이 쓴 시 속에 인생 전부를 담는다. 이정숙시인에게서도 그것이 보인다. ‘발원’을 비롯한 여러 편에서 많은 시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불교적 에스프리가 그의 인생 역정 가운데 일부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일단 이정숙의 생활과 이정숙의 시를 굳이 연결시키는 일에서 벗어나, 오직 그의 시만 읽는 것으로 독자의 소임을 다하면 될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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