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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언제나 존재하는 갈등 그 한 가운데, 연극<아버지와 아들>:내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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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언제나 존재하는 갈등 그 한 가운데, 연극<아버지와 아들>

김미령 | 기사입력 2015/09/18 [13:43]

(공연리뷰)언제나 존재하는 갈등 그 한 가운데, 연극<아버지와 아들>

김미령 | 입력 : 2015/09/18 [13:43]


(사진:윤빛나기자)

[내외신문=김미령기자] 연극

 

어쩐지 허전하다. 모든 사건의 중심에 있던 바자로프가 죽었기 때문일까  니힐리스트라며 세상을 바꿀 거라던 그는 허무하게 죽었다. 어째서일까, 뭔가가 폭발할 것 같은 아슬아슬함이 언뜻 안정을 찾은 듯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 감돈다. 그들 가운데 그의 흔적이 미세하게 남아있는 걸까.

 

연극은 ‘첫사랑’, ‘사냥꾼의 수기’, ‘귀족의 집’, ‘연기’, ‘처녀지’등의 명작을 남긴 러시아의 대문호 이반 투르게네프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1862년, 발표와 동시에 뜨거운 논쟁을 촉발한 원작 소설은 농노 해방을 앞두고 세대 간 갈등이 극에 달했던 19세기 러시아를 배경으로, 관념과 이상의 세대인 아버지들과 행동과 혁명의 세대인 아들들의 갈등을 다뤘다.

 

한국 초연인 이번 공연은 아일랜드의 체홉으로 불리는 브라이언 프리엘의 재창조 작업을 통해 각색되었으며, 이성열 연출은 ‘당시 러시아의 정치상황 등의 부분은 낮추는 대신 보편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갈등, 화해, 용서, 이해 등의 주제를 더욱 부각시킬 것’이라고 설명했다. 무대화시키기 위한 고민에 프리엘의 서정성이 더해진 만큼 소설과는 상당부분 다르다.

 

귀족 출신으로 대학을 갓 졸업한 아르까디는 절친한 바자로프와 함께 고향 농장으로 돌아온다. 자신들을 니힐리스트라고 선언한 두 사람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을 말하는데 아르까디의 아버지 니꼴라이는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하지만, 큰 아버지 빠벨은 그렇지 않다. 빠벨은 니힐리즘을 노골적으로 비난하며 바로로프와 첨예하게 대립한다.

 

두 사람을 환영하는 파티에 까쨔와 아름다운 미망인 안나 자매가 초대된다. 사랑이나 감정 따위를 믿지 않는 바자로프는 안나에게 끌리는 자신을 참을 수 없어 일부러 심술궂게 대한다. 바자로프의 집을 방문한 두 사람은 자꾸 부딪히고 다시 아르까디의 집으로 돌아오는데.......

 

어느 시대나 부모세대와 자녀세대는 갈등한다. 부모가 살아온 삶을 기반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19세기 러시아의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대립하고 갈등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은 것은 세대 간의 갈등이 여전한 숙제이기 때문이다. 연극에서는 ‘바자로프VS 이 밖의 세상’이다. 니힐리스트, 바자로프 말이다.

 

‘니힐리스트’는 니힐리즘에서 파생된 말로 니힐(Nihil)은 ‘부정’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니 기존의 질서와 이념을 부정, 과학으로 검증되는 것들만 인정한 무신론자이자 유물론자가 ‘니힐리스트’이다. 바자로프는 귀족 유산계급인 아르까디를 비난한다. 진정한 니힐리스트가 될 수 없다고. 왜 그는 그 사상에 그토록 집착하는 걸까. 정말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이 그에겐 있었던 가보다.

 

사랑이니 따뜻한 감정이니 믿지 않아 부모에게도 냉담하게 대하는 바자로프. 그런 그를 이해하기 점점 어려워지는 아르까디는 그의 말대로 니힐리스트가 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리고 그는 그런 아르까디를 좋아했다. 또 한사람, 미망인이 된 안나를 뜨겁게 사랑했다. 모순되는 감정,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자신을 지탱해오던 것이 흔들리면 사람은 불안하고 괴롭다. 그래도 그는 안나에게 뜨겁게 구애한다. 그 뜨거움과 냉정한 어투 행동, 바자로프는 분명 불편한 존재인데도 매력적으로 빛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의 말대로 그의 죽음으로 러시아가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면, 뜨겁게 타오르던 신념은 다만 그를 아는 이들에게만 남았을 것이다.

 

바자로프가 죽고 난 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듯 보이는 모습은 아슬아슬하다. 어째서인지 서글프고 모순적으로 보인다. 누구보다 세상을 바꾸고자 뜨거운 열정을 가진 인물은 사라지고 안일한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이들이 세상을 채우고 있다. 아르까디는 친구의 뒤를 잇겠다고 큰소리쳤지만 정말 그럴 수 있을까?

소설과 달리 결정적인 장면들은 숨기고 오히려 다른 인물들의 반응과 이후의 변화를 보여줌으로서 원작의 문제의식을 연극적인 언어로 살려낸 프리엘의 각색은 일부러 체홉으로 풀어낸 탁월함을 증명했다. 남겨진 이들의 상실과 숨겨진 긴장감이 쓸쓸하다.

 

여전히 존재하는 갈등과 엇갈린 사랑으로 인해 비틀어져가는 인간의 모습, 또 그 와중에 이루어지는 작은 화해들이 무리 없이 다가선다. 이국적인 하얀 자작나무와 녹색의 잔디 등 색채와 장치를 통한 미장센도 빼어나며, 초연임에도 어려운 작품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는 배우들의 호연을 빼놓을 수 없다. 인물을 위해 준비된 듯, 생생하다.

 

아들의 죽음을 토해놓는 바자로프의 아버지 바실리 역에 설명이 필요 없는 명배우 오영수, 그의 아내 아리나 역에 박혜진, 뜨거움과 차가움을 동시에 보여주며 존재감을 보여준 윤정섭이 바자로프, 갈등하면서도 이 특별한 친구를 늘 사랑한 아르까디 역에 이명행, 아르까디의 아버지 니꼴라이 역에 유연수, 구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바자로프와 대립하는 빠벨 역에 무대 위에서 존재를 증명하는 남명렬, 바자로프의 뜨거운 구애를 애써 외면하는 안나 역에 김호정, 니꼴라이의 아내가 되는 페니치카 역에 최원정, 이밖에 이정미, 이경미, 공상아, 민병욱, 조재원, 임진순, 하동기가 함께 한다. 9월 25일까지 명동예술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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