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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학자 홍성민(洪聖民), 유배지에서 토민의 산물 거래를 기술하다(경상도의 상업):내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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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학자 홍성민(洪聖民), 유배지에서 토민의 산물 거래를 기술하다(경상도의 상업)

홍성민(洪聖民)의 유배작품 무염판속설(貿鹽販粟說)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천시하는 전통적인 관념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유배문학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며, 변방 유배지의 삶을 일깨워주는데 큰 의미

고영화 향토 고문학 칼럼리스트 | 기사입력 2021/07/30 [06:45]

조선의 학자 홍성민(洪聖民), 유배지에서 토민의 산물 거래를 기술하다(경상도의 상업)

홍성민(洪聖民)의 유배작품 무염판속설(貿鹽販粟說)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천시하는 전통적인 관념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유배문학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며, 변방 유배지의 삶을 일깨워주는데 큰 의미

고영화 향토 고문학 칼럼리스트 | 입력 : 2021/07/30 [06:45]

<조선의 학자 홍성민(洪聖民), 유배지에서 토민의 산물 거래를 기술하다> 고영화(高永和)

16세기 후반의 유학자 졸옹(拙翁) 홍성민(洪聖民 1536~1594) 선생은 조선의 바다에 대한 식견(識見)이 가장 넓었던 당대의 문신이었다. 먼저 그는 1575년 명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오면서 대륙의 선진문물과 백성의 삶을 주도하는 활발한 상공업을 직접 보고 들은 바가 있어 누구보다 대륙의 경제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우리나라 바다를 구경하고 체험한 <관해록(觀海錄)>이라는 글에다 자세히 담을 정도로 직접 체험한 조선 반도 3면의 바다에 대한 견문 또한 풍부하였다. 그가 개인적으로 방문했거나, 관리로서 순력(巡歷)했거나, 유배 길에서, 때론 유배지에서 겪은 바다에 대한 체험이 한 몫을 한 것이다. 또한 유배지에서 하층민과 함께 궁핍한 생활을 영위하면서 헛된 이론이 아닌 실사를 추구하고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학문이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그는 조선후기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을 강조하고, 사농공상의 직업 평등과 전문화를 주장했던 실학파의 선구자 유수원(柳壽垣)보다 약 150년, 상공업의 진흥을 강조한 실학자 박지원(朴趾源)보다 무려 200년이나 앞서 현실을 통찰하고 개혁을 주장했던 인물이었다.

● 유교사회를 통치철학으로 내건 조선전기 약 200년 동안 우리나라 바다에 대해 잘 알고 식견이 풍부했던 두 분을 소개한다면, 먼저 태종⋅세종 연간에 조선 최고의 외교관으로 일본과 대마도를 포함해 유구국(오키나와)까지 총40여 차례를 다녀온, 울산 출신 이예(李藝 1373~1445) 통신사가 있고, 그 다음으로 조선 반도 삼면의 바다인 남해⋅서해⋅동해와 함경도 연안 북해는 물론 중국 발해만 까지 두루 보고 다녔던, 경기도 여주 출신 졸옹(拙翁) 홍성민(洪聖民 1536∼1594) 관찰사가 있었다. 홍성민은 조선의 대학자 서경덕(徐敬德)·이황(李滉)에게 수학했던 조선중기의 전형적인 성리학자로 벼슬이 판서에까지 올라 서인(西人)을 영도했던 인물이다.

먼저 홍성민(洪聖民)은 20대 중반에 황해도 연안에서 서해 바다를, 30대 후반에 북경으로 가는 길에 2차례나 발해 바다를, 40대 중반과 50대 중반에는 관찰사로써 두 차례 경상도의 동해와 남해 바다를, 그 후에 인천과 안산에서 서해 바다를, 또 얼마 후에 함경도 부령 유배지에서 북해 바다를 관찰할 수 있었다. 이 모든 연안 바다를 본 후, 홍성민은 무한한 포용력이 바다를 거대하게 만든다는 점을 깨달았다.

특히 홍성민(洪聖民)은 경상감사(관찰사)를 1580년, 1590년 두 차례나 임명되어 경상도 연안 동해와 남해 즉, 경북 영덕에서 뱃길을 따라 출발하여 경남 남해도까지 전 지역을 순행(순력)했던 이력이 있다. 당시는 지방관 규찰이 기능의 중심을 이루어 관찰사가 감영에 머무는 기간이 적고 대부분 관할 지역을 순행하면서 도내 행정과 군사를 직접 지휘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그는 경상도 각 지역의 읍치나, 수군 진영, 주요 읍성을 기항지로 삼아 배를 타고 순행했는데, 가는 곳마다 그가 보고 느낀 바를 시문(詩文)을 통해 남겨놓았다. 그 당시 그가 경남 거제도 해안 바다를 따라 한 바퀴 순행한 후에 느낀 바를 표현하길, “경치가 뛰어나고 신선의 세계에 가까운 바닷가 산이 비단처럼 곱고, 옷소매가 바람에 나부끼는 즐거움에 세속의 번뇌가 사라지는 곳.”이라고 소회를 읊기도 했다.

홍성민 경상감사는 이 거대한 바다를 흉중에 담아 새나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다를 보는 뜻이라 하였다. 거대한 바다는 좁아터진 인간의 스케일을 크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길, “바다라는 물건은 과연 크다. 산은 때로 무너지고 땅은 때로 갈라지지만 바다는 흐르지도 않고 마르지도 않는다. 큰 가뭄에도 줄어들지 않고 홍수에도 불어나지 않는다. 천지와 산악을 뒤흔들면서 만고의 세월 그 큰 것을 유지하고 그 큰 것을 지켜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큰 이유는 여러 강물과 시내를 삼키고 모으기 때문이다. 똑똑 떨어지고 졸졸 흐르는 물부터 고불고불 실개울까지, 아무리 꺾어져도 반드시 동으로 흘러 바다에 이른다. 바다는 이를 받아들여 스스로 그 큰 것을 이루니, 이것이 바다가 된 이유이다.”

●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한 달 뒤에 특사로 유배에서 풀려나 대제학·호조판서 관직에 복귀하고 전쟁수습에 골몰했다. 그는 선조 26년(1593년)에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에게 두 차례에 걸쳐 왜군에 대한 공격을 독촉하는 서신을 보냈다. <상이제독여송서(上李提督如松書)>란 첫 번째 서신은 "왜군에 대한 반격에 나서 평양성을 이미 탈환했고, 호남의 우리 병사가 뒤를 든든히 받치고 있으므로 왜병을 무찔러 서울을 탈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니 군사를 더 보내어 공격"을 하기를 요청한 내용이다. <복상이제독서(復上李提督書)>란 두 번째 서신은 "적병의 세력이 약해졌을 때 재빨리 공격하여 때를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요청하는 내용이다. 그의 우국충정의 단심과 꼿꼿한 선비정신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임진왜란 전란 중에 모친의 상을 당해 슬퍼하고 근심하던 차에, 왕으로부터 겨우 귀향(歸鄕)하라는 허락을 얻자마자 병이 위독해져 모친의 상기(喪期)를 마치지 못한 채 죽으니, 향년 59세였다. 홍성민은 매우 청렴결백하여 사사로운 이익(利)을 쫓지 않았으며 효성이 지극했고 또 문행(文行 학문과 실천)과 정술(政術 정치의 술책)이 본받을 만해서 이후 명신(名臣)으로 칭송되었다.

○ 한편 홍성민은 시를 지을 때 표현에 치중하지 않고 논리적으로 자기의 의견을 드러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문장은 경서를 근거로 삼고 옛 사적을 해박하게 인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게다가 그의 시는 티 없이 맑은 감수성이 돋보인다. 매화(梅)를 그린 <매화를 읊다(詠梅)> 3수(首) 가운데 한 수를 보자. “눈 속의 찬 꽃이 품격 돋보여 진주 같은 얼굴에 백옥의 정신, 성긴 가지 다가가단 깜짝 놀라리. 무한한 맑은 향기 왈칵 대들기에(雪裏寒花品格新 明珠姿態玉精神 疎枝欲近還驚訝 無限淸香苦逼人)” 눈 속에서 홀로 피어나 살금살금 암향(暗香)을 퍼뜨리는 매화의 기품을 섬세하고도 날카로운 안목으로 묘사한 솜씨가 놀랍다.

● 다음은 홍성민(洪聖民 1536~1594)이 함경도 부령의 강촌(羌村)에서 귀양살이 할 때, 어려운 형편을 극복했던 경험을 적은 유배문학 작품 <소금을 바꾸어 곡식을 사다(貿鹽販粟說)>를 간단히 요약해서 소개한다.

서인(西人)의 주요 인물이었던 그는 1591년 6월 서인의 영수 정철(鄭澈)이 실각하자, 1591년 8월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당시 귀양에 처해진 사람들은 귀양살이 비용 전액을 자신이 부담해야 했다. 그런데 타고 갈 말이 없었기에 가산을 모두 정리하고 말 6마리를 사서 길을 떠났다. 가지고 간 식량은 금방 바닥이 났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이 변방에서는 말이 귀하지 않으니 말을 팔아 소를 사서 남에게 빌려주면 곡식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였다. 결국 홍성민은 주위의 권유를 받아들여 바닷가의 소금과 북관 오랑캐 땅의 곡식을 바꾸는 장사를 하여 먹고 살게 되었다. ‘아이종을 시켜 몇 말의 곡식을 가지고 90리 떨어진 바닷가로 달려가 소금을 사오게 하니, 소금이 열 말 정도 되었다. 열 말 소금을 싣고 북관 120리 길을 달려가 곡식으로 바꾸어 오게 하니, 곡식이 스무 말 정도 되었다.’ 직접 장사하러 나서지는 않았지만 물건을 사고팔도록 노복에게 시켰으니, 선비로서는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굶는 것에 비하면 부끄러움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한때 선비로서 고상한 삶을 누리던 홍성민은 장사나 농사가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로 여겼다. 하지만 그는 이제 장사로 먹고 살 수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농사를 짓는 것은 감히 바라지도 못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제 그가 임금에게 바라는 것은 고향으로 돌아가 농부로 여생을 마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는 것이라 하였다.

○ 위 홍성민(洪聖民)의 유배작품 <무염판속설(貿鹽販粟說)>은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천시하는 전통적인 관념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유배문학의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며, 변방 유배지의 삶을 일깨워주는데 큰 의미가 있다. 당시 홍성민은 누가 뭐라 해도 조선의 유학자이자 선비로 50여 년을 살아온 분이었다. 그런 그가 아무리 유배자의 신분이라 할지라도 물품을 교환하며 장사를 한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한 대단한 변신이었을 것이다.

● 이어서, 졸옹(拙翁) 홍성민(洪聖民)의 함경도 부령의 유배작품 2편을 연이어 소개하고자 한다. 처음 작품은 고시(古詩) <고기 파는 늙은이(賣魚翁行)>이고 다음 두 번째 작품은 산문(敍) <고기 파는 늙은이와 문답한 서(賣魚翁問答敍)>이다. 서(敍)라는 것은 어떤 내용을 사실 그대로 좇아 자유롭게 적어놓은 산문(散文)을 말한다.

나는 이 두 유배문학 작품을 기술하면서 집안 어르신께서 약40년 전에 나에게 일러 줬던 일화가 생각난다. 지금부터 약 50여 년 전까지 우리나라는 곡식이 물고기보다 훨씬 값이 좋았다. 그래서 경상도 동해안이나 남해안의 연안바닷가 어부들이 물고기를 잡아 바지게에다 가득 싣고, 그 위에 미역 등 해초류로 덮고 새끼줄로 단단히 묶어서, 새벽부터 집을 나서서 산을 넘고 계곡을 지나 약 50리 길을 걸어가, 곡물과 물물교환하여 다시 돌아오면 그날 한밤중이 되었다고 한다. 때론 130리 150리 육지 속까지 갔다 올 때에는 1박 또는 2박을 해야만 했고 혼자서는 다니기 무서워 무리를 지어 다녔다고 한다. 아마 그 옛날 우리나라 바닷가 전체 어민의 생활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곡물과 생선 값이 서로 역전되어 생선 값이 더 높이 거래되고 있지만, 그때 당시 집으로 돌아올 때는 지게의 무게가 반도 안될 만큼 가벼웠다고 한다. 그런데도 마을 어귀에서 애태워하며 기다리던 식구들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산길을 발걸음 가볍게 넘어 다녔다는 그 아련한 이야기가 새삼 떠오른다.^^

● 다음 소개하는 칠언고시(七言古詩) <고기 파는 늙은이(賣魚翁行)>는 ‘元’ 운(韻)의 홍성민의 유배문학 작품이다. 내용은 의외로 간단하다. 어부가 잡은 물고기와 농부의 곡식을 가지고 서로 물물교환 하고자, 서로 흥정하면서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앞서 1591년 홍성민이 함경도 부령에서 귀양살이 할 때의 일화를 간략히 설명 드린 바와 같이, 바다에서 생산되는 소금이나 물고기, 그리고 육지에서 산출되는 각종 곡식과의 거래가 빈번했던 지역에서 겪은 일들 중에, 또 다른 한 장면을 묘사한 글이다. 비록 홍성민이 중재를 잘하여 서로 만족하며 거래가 잘 이루어진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지만, 홍성민은 당시 어떤 양반들보다 바다를 잘 아는 분이었음을 앞서 설명 드린 바가 있다. 그래서 그는 시종일관 물고기를 잡는 어부의 어려움과 바다에서 고기잡이 장면을 다소 무리하게 기술하여 놓았다. 결국 농부보다 어부의 고충이 더 크다면서 어부의 편을 들어주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다. 당대 우리나라에서 바다를 제일 잘 알고 이해가 높았던 학자답게 서술한 것이다.

1) 고기 파는 늙은이[賣魚翁行] / 홍성민(洪聖民 1536~1594)

平明籬落有市語 새벽녘 울타리에 흥정하는 소리가 들러

病夫?起開柴門 병든 사내가 억지로 일어나 사립문을 열었다.

一人持魚一人粟 한 사람은 물고기를, 한 사람은 곡식을 가지고

上下其價聲自喧 그 값을 흥정하는 소리가 절로 시끄러웠네.

呼來一一問所以 불러와 각자에게 그 까닭을 물어보니

魚者却與粟者言 어부가 도리어 곡식 파는 사람에게 말하길,

把竿昨夜入滄海 “낚싯대를 잡고 어젯밤 큰 바다로 나아가서

一葦却犯千文渾 한 척의 거룻배가 천 길 물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驚濤?亢疊浪起 큰 파도가 조금씩 높이 일면서 겹겹의 파랑이 일어나더니

拍盡天端控山根 하늘 끝까지 솟구쳐 올라 뒷덜미를 당겨 잡았답니다.

狂風?或不我饒 미친바람이 혹시라도 나에게 너그럽지 않다면

扁?定作長鯨呑 거룻배 정히 그 자리에서 큰 고래가 나를 삼키겠지요.

冒百死窺一魚 백번 죽음을 무릅쓰고 한 마리 물고기를 엿보며

環却滄溟投幾番 낚시 고리를 큰 바다에 몇 번이고 던졌답니다.

歸來談笑對妻子 집으로 돌아와 처자식에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十?可備十口餐 “열 마리면 열 식구 음식을 준비할 수 있단다.”

凌晨作急向人家 동틀 무렵에 급히 인가를 향해 가서

粟粒庶及朝未暾 해 뜨기 전 아침에 곡식 사길 바랐는데

渠胡爲貴爾粟賤爾魚 어째서 네 곡식은 귀하고 내 물고기는 천하다 하는가?

死生輕重君須論 죽거나 살거나 경중(輕重)을 그대가 말해주시오.“

我聞翁語爲翁說 나는 노인의 말을 듣고 노인을 위해 말하겠소.

翁乎恐作波底魂 노인이여~ 파도 아래 귀신이 될까 두렵소이다.

蹈危不止險不避 걷기 위험한데도 그치질 않고 험한 곳도 피하지 않으면서

爲口腹死將誰  배를 채우기 위해서 죽은들 장차 누굴 원망하리오.

翁聞吾語還拍手 고기 파는 노인이 내 말을 듣고는 도리어 박수를 쳤는데

一笑不覺髥自  한번 웃느라고 수염이 절로 실룩거리는 걸 깨닫지 못했다.

君不見 그대는 보지 못했나?

尋常平地起波瀾 평범한 평지에서도 파도가 일어나 휩쓸고

不?海洋驚濤飜 해양에는 큰 파도가 뒤집어질 뿐만 아니라,

前舟旣覆後舟繼 앞배가 이미 뒤집어지자마자 뒷배도 따라가니

名利所在爭波奔 명리(名利)가 있는 곳에는 다투어 물결에 밀린다네.

人生有口卽謀食 사람이 태어나면 입이 있으니 곧 먹을 걸 도모하기 마련이라,

滔滔世上人自  도도(滔滔)한 세상에서 사람이 절로 어리석어 진다네.

聞來?顔慙不對 노인의 이야기를 듣다가 낯 뜨거워 대꾸도 못한 채

吾舌難將吾手  나는 할 말을 잃고 공연히 나의 두 손만 비비고 섰네.

[주1] 산근(山根) : 골상학에서, 콧마루와 두 눈썹 사이를 이르는 말. 산기슭, 뒷덜미, 콧마루와 두 눈썹 사이를 말하기도 함.

[주2] 도도(滔滔) : 도도하다. 말이 술술 쏟아져 나오는 모양. 물이 그득 퍼져 흘러가는 모양. 말을 거침없이 잘하는 모양. 감흥 따위가 북받쳐 누를 길이 없음.

● 다음 서(敍) <고기 파는 늙은이와 문답한 서(賣魚翁問答敍)>는 1591년 함경도 부령에서 귀양살이 하면서 목도한 일을 적은 <고기 파는 늙은이(賣魚翁行)>의 고시(古詩)를 다시 풀어서 상세히 객관화시켜 쉽게 설명한 산문(敍)이다. 앞서 물고기 파는 늙은이의 노래 <매어옹행(賣魚翁行)>은 그가 학자답게 어려운 어휘와 규격화된 한시를 사용하여 적었음은 물론이고, 게다가 물고기를 잡는 어부의 입장만을 고려한 주관적인 글이다. 그래서 이후에 홍성민은 농어민이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좀 더 쉽고 객관적인 글이 필요했다. 그 글이 바로 지금 소개하는 <매어옹문답서(賣魚翁問答敍)>다.

이 산문에는 세 사람이 등장한다. 고기 잡아 파는 노인과 곡식을 가진 농부, 그리고 주인공 나(話者)이다. 어부와 농부의 거래 흥정을 중재하였던 화자(話者)인 나는 왜 험난한 바다에서 목숨을 걸고 물고기를 잡는 일을 사서 하느냐고 어부에게 묻는다. 이어 늙은 어부는 태어나면서 입을 가진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업이라고 한다. 반면에 농부가 주장하길, 곡식이 충분히 여물 때까지 농사짓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논밭을 갈고 씨 뿌리고 김도 매고, 매일 농사를 망치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일을 하다 보니 육체와 정신 모두 피곤하다. 또한 곡식이 없으면 굶주리게 되지만 물고기가 없다고 굶주리진 않는다. 그런고로 곡식이 훨씬 더 귀중하다고 주장했다.

중재자이자 화자(話者)인 내가 말하길, 곡식과 물고기의 경중을 따지기 어렵지만 곡식으로 밥을 짓고 물고기를 반찬으로 삼아 식사를 한다면 좋은 한 끼가 된다하면서도, 또 다시 고기 잡는 어부의 어려움을 다소 과장되게, 더 많이 난해하게 그려내고 있다. 어찌되었건 홍성민 선생은 바다를 사랑했던 분답게, 이 두 편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듯, 육지의 농부 보다 바다의 어부를 더 깊이 이해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그는 이 글에서 유배지에서 겪은 현장의 사실적인 체험을 통해 삶의 진실을 통찰하고 농어민의 수고로움을 새삼 깨닫는다는 말로써 마무리했다.

2) 고기 파는 늙은이와 문답한 서(敍)[賣魚翁問答敍] / 홍성민(洪聖民 1536~1594)

내가 강촌(羌村 함경도 부령)에 있을 때 울타리 사이에서 떠들썩한 목 메인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서로 트집을 잡아 싸우고 따지는 듯하였고 오랫동안 서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아니하였다. 사립문을 열고 나가 보니 한 사람이 물고기를 손에 들고 서 있었는데 물고기가 가히 한 척(자)이 넘었다. 또 한 사람은 곡식을 쥐고 앉아 있었는데 곡식이 가히 가득한 한 되나 되었다. 그 값을 흥정하는데 곁눈질하여 볼 때마다 얼굴색이 변하였다. 논쟁이 팽팽하여 양쪽 모두 양보하지 않았다. 나는 이러이러한 흥정이 괴이하다고 여겨 앞으로 다가가 말하길, “어찌 각자 자신의 주장만하며 다투느냐?”

어부가 말하길, 한 자 남짓한 물고기가 그렇게 귀한 것은 아니나, 내가 이 물고기를 잡는다고 배를 타고 넓은 바다로 나가 돛을 달고 바람과 큰 물결을 헤쳐 나간다. 서리와 눈에 살갗이 얼어붙고 맹렬한 바람에 뼈가 에는 듯하다. 한 칸 대나무 낚싯대를 끌어당겨 예측할 수 없는 위험한 곳에다 던졌다. 손은 감히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었고 눈은 한눈을 팔 겨를이 없었다. 한 마리 물고기를 잡고 기뻐하며 말한다. “이것이 물고기를 잡는 즐거움이다. 나는 한 끼의 식사를 비로소 갖추게 되었다네.” 여기에다 던지고 또 저기에서 찾는다고 밤새 등불을 밝혔다. 북해의 천만 이랑을 선회한 뒤에야 겨우 십여 마리 물고기를 잡았다. 처와 자식을 번갈아 보면서 기뻐하며 말하길, “나의 열 식구의 하루 굶주림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네.” 물을 길어 솥을 씻고 기다리는데 남편이 어찌 나가서 팔아오지 않으랴. (그래서) 나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불을 때지도 않고 아침에 집을 나서서 여기 인가(人家)로 들어온 것이다.

대체로 굳건하게 물고기를 잡다보면 땀이 범벅이 되고 발바닥이 부르틈을 알지 못할 정도가 된다. 바야흐로 그 배가 바다를 향해 나아가 이러한 물고기를 낚는다. 사나운 바람에 배가 아래위로 흔들리니 나는 곧 죽을 것만 같았다. 파도는 큰 고래가 삼키듯 하여 나는 곧 죽을 것만 같았다. 거칠게 출렁이는 물결에 부딪치니 나는 곧 죽을 것만 같았다. 전년에는 동쪽 이웃이 물고기 밥이 되었고 거년에는 나의 일가친척이 물고기 밥이 되었다. 어긋나면 반드시 죽는 것이다. 물고기 한 마리를 그러한 과정으로 잡은 것이다. 그대는 어찌 나의 물고기를 천하게 보고 그대의 곡식을 중하게 여기는가?

곡식 파는 사람도 악착스럽게 말하였다. 아니, 이것이 무슨 말이오  그대의 물고기는 사람들에게 들었던 맛, 그대로일 뿐이다. 무릇 곡식은 사람의 배를 부르게 만들고 사람 뼈를 튼튼하게 만든다. 하루라도 곡식이 없으면 굶주리게 되고 며칠 동안 곡식 없이 굶주린다면 죽게 될 것이다. ‘살고자 한다면 양식을 얻을 것이고 죽고자 한다면 못 얻을 것이다.’고 했듯이 곡식 때문에 능히 사람이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 곡식을 나누고 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과는 함께하지 말라. 그대가 물고기만 잡아서 삶을 영위할 순 없다. 물고기를 잡지 못한다하여 사람이 죽음에까지 이르진 않는다. 그런고로 그대는 어째서 저 물고기를 나의 곡식보다 귀하다 하는가  또한 곡식이 충분히 여물 때까지 농사짓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김매는 일도 괴롭지만 그르치지 않으려면 부지런해야 한다. 손과 발이 나란히 고달프다보니, 육체는 피곤해지고 마음은 지쳐간다. 눈보라를 무릅쓰고 넓은 바다를 떠다니는 것보다 덜하지 않다. 이에 곧 농부가 말하길, “물고기가 귀하고 곡식이 천하다고 여기는 것은, 내가 그대의 배를 잡고 웃을 일이다“ 흥정이 안 된다면 나는 나의 곡식만 먹고 너의 물고기를 먹을 수가 없게 될 것이다.

그대들이 스스로 값을 높게 책정해 요구하지만 않는다면 나는 이에 중재에 응하면서 해결하고자 나서겠다. 대저 물고기를 잡든 못 잡든 사람의 생사를 따져선 안 된다. 그러나 곡식으로 말하자면 ‘양식을 얻으면 살고 얻지 못하면 죽는다.’ 그런고로 곡식이 소중하고 물고기보다 더 귀한 것이다. 그런데 한 되 가득한 곡식은 한 끼 아침 식사로 충분하다. 게다가 한 척 넘는 물고기 또한 오곡(五穀)의 맛을 도와 반찬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이것을 저것에 견주어 경중(輕重)을 따지기 어렵다.

게다가 곡식을 얻는 것은 한철 노력한 것에 불과하다. 물고기를 얻는 것은 한 번의 삶을 포기하고 만 번 죽을 고비를 무릅쓰고 얻는 것이다. 어느 것이 가볍고 어느 것이 중하다 하겠는가  이 고기잡이 노인은 얼마 되지 않는 간발의 차이로 인해 혹은 바람과 파도에 부딪치기도 하고 결국 물고기 뱃속에 매장되기도 한다. 그리고 물 밑의 원혼이 된다면 누가 다시 불러 주겠는가  사람들은 모두 생명을 아끼는 마음이 있는 것이니 만일 고기잡이가 업이라면 힘든 삶이니 옳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꺼이 고기잡이를 업으로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천하에 이러한 물고기가 없다면 아무리 백 섬의 곡식이 있다손 치더라도 한 자의 물고기를 서로 바꿀 수가 없을 것이다. 한 되의 곡식으로 한 자의 물고기와 바꿈으로써 네가 무엇이 아쉽겠는가. 네가 무엇을 아쉬워하랴.

그러자 곡식을 가진 농부가 말하길, “오직 서로 바꿈에 얼굴빛을 드러냄도 없이 논쟁도 없이 거래하겠습니다.” 나는 고기 잡는 어부에게 말했다. “고기 잡는 어부와 곡식을 키우는 농부 모두 진실로 다행한 거래다.” 다만 바다만큼 지극히 험한 곳도 없고 배 만큼 지극히 위험한 것도 없다. 지극히 험한 곳을 뛰어넘어 지극히 위험하니 만일 궤석(?席)을 밟고 있다면 내가 남몰래 너의 위태한 일을 위해 말해 줄 것이다. 올해도 무사히 물고기를 잡는다 해도 내년에는 두려울 것이고 오늘 죽음을 면하여 얻는다 해도 내일은 두려울 것이다. 그대는 전날의 천행이 아니었다면 반드시 후일에야 온전히 얻어 지킬 수 있을 것이니 편안하게만 생각하지 말라.

어부가 말하기를 “공의 말씀이 참으로 옳습니다. 나는 이 업을 하는 사람으로 먹고 살아가야할 빌미가 됩니다.“ 천하의 사람들이 입을 지니고 있기에 지극히 위험한 일을 담담히 해야만 하니 어찌 한정하겠습니까  바다는 참으로 험난하였다. 한편으론 바다보다 험한 곳도 있겠지만 바다의 배는 참으로 위태하다. 바다 배보다 위태한 것도 있겠지만 짧은 노에 작은 배는 곧장 풍랑이 세차게 일어나 침범한다. 평평한 바다를 보면 심히 위태한데 이 배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다. 뱃사람이 평평한 바다에서 크고 작은 물결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평지만 못하더라도 사람이 볼 수 있는 이 배만 하랴  아~ 먹고 사는 입이 문제다. 내 어찌 위험을 무릅쓰고 바다를 항해함을 지나치다 하겠는가. 이 입이 빌미가 되어 이 몸이 위태로울 뿐이다. 나는 어부와 농부의 말들을 듣고 마주 대하기가 부끄러웠다. 한참이나 지난 후에도 묵묵히 마음속에 이번 경험을 새겨놓을 것이다.

[余在羌村 有聲喧咽於籬落間 若鬪若詰 相持者久 啓扉而視之 一人手其魚而立 魚可尺餘 一人握其粟而坐 粟可盈升 上下其價 視?色勃 爭之堅 兩不相下 余怪若是 進而前之曰 ?各言爾所爭乎 魚者曰 盈尺之魚 固不貴 吾之得是魚也 舟滄海 帆風濤 霜雪凍其膚 烈風?其骨 曳一竿之竹 投不測之地 手不敢倦 目不暇勞 得一魚則躍躍然曰 得是魚(之樂也) 吾可以辦一飯 投於此 又索於彼 終夜點燈 環北海千萬頃以來 則所得僅十餘  妻與子相視而喜曰 吾十口可免一日飢 將汲水洗鼎以待 夫子其往賣焉 吾凌晨而起 ?朝未炊 投此人家 庶得其直 不覺足繭而顚汗 方其舟于海 釣是魚也 狂風?之 則吾其死矣 長鯨呑之 則吾其死矣 驚瀾撞之 則吾其死矣 前年 東隣以魚死 去年 吾族以魚死 犯必死之地 得一魚以來 爾何賤吾魚而重爾粟乎 握粟者曰 惡 是何言也 爾之魚 不過味人口耳 夫粟 飽人腹而肉人骨 一日無粟則飢 數日無粟則飢而死 得之則生 不得則死 能生人 能死人者粟 則切於人者莫與粟班也 爾之魚 得之 不能使人生 不得 不至使人死 爾何以彼魚 右吾粟乎 且粟之成熟 亦不易 耕之也艱 鋤之也苦 獲之也勤 手足幷疲 體困心勞 不下於泛滄海而冒風雪 則乃曰魚貴而粟賤 吾爲爾捧腹笑也 吾將口吾粟 不欲口爾魚 爾無索價自高爲也 余於是應而解之曰 夫魚得不得 不能令人生令人死 而至於粟 得則生 不得則死 粟之爲重 固右於魚矣 但盈升之粟 只充一朝之飢 而尺餘之魚 亦可以佐五穀之味 以此較彼 不甚輕重 而粟之獲 不過一時勞力 魚之得 忘一生而冒萬死 其爲得也 孰輕孰重 使是翁一差足於毫忽之間 而或爲風濤所擊 則將爲魚腹中葬 而水底?魂 誰復招之 如使人有惜生之心 則不可業是漁 人不肯業漁 則天下無是魚 雖以百斛之粟 不可易一尺之魚 以升粟易尺鱗 爾何惜焉 爾何惜焉 握粟者曰唯 易之 不敢色 爭訖 吾謂漁者曰 業是漁而獲是粟 固幸矣 但至險莫如海 至危莫如舟 以至危犯至險 若蹈?席然 吾竊爲爾危之 今歲獲全 而明歲可畏 今日獲免 而明日可畏 爾毋以前日之幸 保其必獲全於後日 而恬莫爲之慮也 漁者曰 公之言誠是矣 吾之爲此業者 口腹?之也 天下之人持此口 而恬至危者何限 海固險矣 險於海者有之 舟固危矣 危於舟者有之 扁舟短楫 直犯洶湧風浪 在平地視之則危甚 而在此舟則不知也 安知舟人之視平地波瀾 不如平地人之視此舟乎 噫 微是口 吾何爲蹈是危 甚矣 此口之崇此身也 余聞其語 慙不得對 默默良久 敢識之]

사진=고영화 페이스북
사진=고영화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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