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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두(紫桃) 오얏(李) 한시(漢詩)편:내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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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두(紫桃) 오얏(李) 한시(漢詩)편

고영화 향토 고문학 칼럼리스트 | 기사입력 2021/07/29 [09:03]

자두(紫桃) 오얏(李) 한시(漢詩)편

고영화 향토 고문학 칼럼리스트 | 입력 : 2021/07/29 [09:03]

자두는 일반적으로 자두나무의 열매를 일컫는 말이다. 복숭아와 비슷하나 조금 작고 신맛이 있다. 중국문헌인 『시경』·『제민요술(齊民要術)』 등에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우리나라에서도 일찍부터 재배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자두는 《삼국사기》에 복숭아와 함께 백제 온조왕 3년(15)에 처음 등장한다. 이를 미루어 보아 우리나라에 시집온 것은 삼한시대로 추정된다. 적어도 2천 년 전부터 우리 곁에 있었던 과일나무인 것이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우리나라산 자두(재래종)를 평하여 맛이 박하고 모양이 작다고 하였으니, 우수한 품종이 재배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한말 이후부터 개량된 자두품종을 도입, 재배하기 시작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생과로 먹고 있는데, 외국의 경우는 생과보다 건과나 주스, 잼 등에 이용하고 있다. 초여름, 과일가게에서 만나는 진한 보랏빛 자두는 우리의 미각을 돋운다. 자두는 우리말로 ‘오얏’이다. 오얏의 한자말은 이(李)로 우리나라 성씨로는 두 번째 많은 이씨를 대표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도문대작》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자도(紫桃)’라고도 하였다. 보랏빛이 강하고 복숭아를 닮았다는 뜻이다. 이후 자도는 다시 자두로 변하여 오늘에 이른다. 널리 친근하게 사용되던 오얏이 자두보다는 훨씬 더 정이 가는 이름이다.

'과전불납리 이하부정관(瓜田不納履 李下不整冠)'은 ‘오이밭에서 벗어진 신발을 다시 신지 말고, 오얏나무 밑에서 머리에 쓴 관을 고쳐 쓰지 말라'라는 뜻으로 외를 따거나 오얏을 따는 혐의를 받기 쉬우므로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이 말의 출전은 '문선(文選)' 악부(樂府)·고사(古辭) 4수 중의 '군자행(君子行)'에서 나온 말이다.

사진=고영화 고문학 칼럼리스트 페이스북
사진=고영화 고문학 칼럼리스트 페이스북

 

1) 산 아래 개울을 만나 노닐며[遊離山下川] / 성운(成運 1497∼1579)

白石溪邊不點塵 시냇가 흰 돌에는 한 점 티끌도 없는데

紫桃花發去年春 자두 꽃이 작년 봄에 만발하였지

山靈自是多情者 산의 신령은 본디 다정한 분이라

黃髮欣迎舊主人 옛 주인이 늙은이를 기쁘게 맞아주네.

2) 이 녹사가 또 오얏 열매를 보내주다[李錄事又以李實爲餉] / 김종직(金宗直 1431∼1492)

甘鮮眞是君家果 달고 싱싱한게 참으로 그대 집 과실이라

手把題封箇箇看 써서 봉한 것 손에 쥐고 낱낱이 살펴보네

病裏飽嘗嘉慶味 병중에 실컷 먹고 좋은 맛 감탄하면서

更敎童稚繞氷盤 다시 아이들에게 쟁반 둘러앉아 먹게 하네

3) 빨간 오얏을 보내 준 신 경형(辛庚兄)에게 사례하다 / 서거정(徐居正 1420∼1488)

朱李佳無敵 빨간 오얏이 둘도 없이 아름다워라 瓊漿味自甛 신선한 즙은 맛이 절로 달콤하네 君無鑽核意 그대가 씨앗 뚫을 뜻이 없었기에 我避整冠嫌 나는 관 바로 쓰는 혐의를 피했구려

[주1] 그대가 …… 없었기에 : 진(晉)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왕융(王戎)은 자기 집에 좋은 오얏나무가 있어 항상 이 오얏을 따서 내다 팔곤 했는데, 혹 남들이 그 종자를 받아서 심을까 염려하여 언제나 그 씨앗에 구멍을 뚫어서 심을 수 없게 했던 데서 온 말이다.

[주2] 나는 …… 피했구려 : 조식(曹植)의 군자행(君子行)에 “군자는 매사를 미연에 방지하여 혐의로운 지경에 처하지 않나니, 오이밭에선 신끈을 고쳐 매지 않고 오얏나무 밑에선 관을 바루지 않는다.〔君子防未然 不處嫌疑間 瓜田不納履 李下不整冠〕”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이는 곧 오이밭에서 허리를 굽혀 신끈을 고쳐 맬 경우 오이를 딴다는 혐의를 받게 되고, 오얏나무 밑에서 두 손을 들어 관을 바르게 쓸 경우 오얏을 딴다는 혐의를 받게 되므로, 그런 혐의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뜻으로 한 말이다.

4) 붉은 오얏을 먹다 / 이규보(李奎報 1168∼1241)

殷玉爛盈盤 옥덩이만한 붉은 자두 쟁반에 가득한데

一呑已可厭 하나 먹으니 이미 싫증이 나네

猶忌整冠嫌 그건 바로 갓 바루는 혐의 꺼리고

敢懷鑽核念 씨를 뚫던 이야기 생각남이라

[주1] 갓 바루는 혐의 : 오얏나무 아래에서는 갓을 바루지 않는다는 것으로, 괜한 의심을 받을 일은 하지 말라는 말이다.

[주2] 씨를 뚫던 : 진(晉)의 왕융(王戎)이 인색하여 집에 좋은 오얏이 있어 내다 파는데 사람들이 종자를 얻을까 두려워하여 항상 씨를 뚫었다. 《晉書 王戎傳》

5) 계중이 오얏을 보내주다[繼中饋李] / 김종직(金宗直 1431∼1492)

南州?暑伴眠魔 남주의 심한 더위 속에 졸음과 짝하다가

忽得瓊漿?齒牙 갑자기 경장을 얻어 치아에 뿌리었네

仍憶春風花發處 인하여 봄바람에 꽃피는 곳을 생각해보니

知渠長醉玉皇家 그대는 옥황의 집에서 길이 취하겠구려

[주1] 경장 : 옥즙(玉汁)이란 뜻으로, 전하여 진귀한 음료(飮料)를 가리킨다.

[주2] 옥황의 집에서 길이 취하겠구려 : 옥황의 집이란 옥황상제(玉皇上帝)의 거소(居所)란 뜻으로, 즉 오얏꽃이 만발한 곳을 아름답게 형용한 것인데, 한유(韓愈)가 노동(盧仝)의 집에 가서 오얏꽃 구경을 하며 지은 이화시(李花詩)에 “밤에 장철을 데리고 노동을 찾아가서 구름을 타고 함께 옥황의 집에 이르렀네[夜領張徹投盧仝 乘雲共至玉皇家]” 한 데서 온 말이다.

6) 자두를 읊다[紫桃吟] / 허봉(許  1551∼1588)

長安紫桃高枝聳 서울의 자두나무는 높은 가지에 솟아있는데

摘下氷盤淸露重 맑은 이슬 맞은 자두를 따서 깨끗한 소반에 담았다.

仙母初分漢殿香 선모(仙母)가 한나라 궁전에 자두향기를 처음 베풀었고

漁郞又得秦(晉)人種 무릉도원 찾은 어부 또한 진(晉)나라 사람에게 씨앗을 얻었다하네.

馬卿多病久沈綿 마경(馬卿)은 병이 잦아 오랫동안 앓았는데

一片入口煩?  한 조각을 입에 넣자 성가신 병이 나았다네.

不數張公大谷梨 장공(張公)이 대곡(大谷)의 배를 헤아릴 수 없었다하고

寧同韓子華山蓮 한유(韓愈)도 화산(華山) 연뿌리가 정녕 배만 했다하였다.

蓬萊淸淺三千歲 봉래산이 삼천년 동안 맑았다 얕아졌다했고

浮丘仙人遙執袂 부구(浮丘) 선인(仙人)의 옷소매를 잡은 지도 아득하다.

百尺黃塵那可留 백 척의 황진 속에 어찌 머물러 있었으랴.

明朝持獻蒼梧帝 내일 아침 창오(蒼梧)의 순제(舜帝)에게 가져다 바치리라.

[주1] 선모(仙母) : 정재(呈才) 때, 궁중 무용인 헌선도무(獻仙桃舞)를 출 때에 선도(仙桃)를 담은 은쟁반을 바치던 여자

[주2] 어부(漁郞) 선경(仙境) :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따르면, 동진 태원연간(376~395)에 무릉(지금의 후난 성 타오위안 현)에 살던 어느 어부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중 복사꽃이 피어 있는 수풀 속으로 잘못 들어갔는데 숲의 끝에 이르러 강물의 수원이 되는 깊은 동굴을 발견했다. 그 동굴을 빠져나오니 평화롭고 아름다운 별천지가 펼쳐졌다. 그곳의 사람들은 진대의 전란을 피해 이곳으로 왔는데 그때 이후 수백 년 동안 세상과 단절된 채 지내왔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노자의 소국과민 사상에 기초하여 고대의 자연주의적 유토피아를 묘사한 것으로, 당대 전기소설의 원조가 되었다.

[주3] 마경(馬卿)의 병 : 마경은 한(漢)나라 사마상여(司馬相如)를 가리킨다. 그의 자가 장경(長卿)이므로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그는 소갈병(消渴病)을 앓아 벼슬을 그만두고 은퇴하여 무릉(茂陵)에 살다가 죽었다.

[주4] 대곡리(大谷梨) : 대곡(大谷)의 배는 큰 골짜기에서 나는 배로 반악(潘岳)의 한거부(閑居賦)에 “장공(張公) 대곡의 배와 양후(梁侯)는 오비(烏?)의 감이다.”하여 천하에 유명하였다.

[주5] 화산(華山) : 한유(韓愈)의 고의(古意) 시에 “태화봉 꼭대기의 옥정에 자란 연은, 꽃이 피면 열 길이요 뿌리는 배만 하다네.〔太華峯頭玉井蓮 開花十丈藕如船〕”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6] 봉래청천[蓬萊淸淺] 벽해(碧海)가 상전(桑田)이 되는 큰 변천이 있으리라는 말이다. 봉래는 동해(東海)에 있는 신산(神山)으로, 봉래가 맑고 얕다는 것은 곧 선녀인 마고(麻姑)가 일찍이 왕방평(王方平)에게 이르기를 “만나 뵌 이래로 벌써 동해가 세 차례 상전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는데, 아래께 봉래산에 이르러 보매, 물이 또 지난번 만났을 때보다 대략 절반쯤 얕아졌으니, 어찌 장차 다시 육지로 변하지 않겠는가.〔接侍以來 已見東海三爲桑田 向到蓬萊 水又淺于往者會時略半也 豈將復還爲陵陸乎〕”라고 했던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세상일의 무상한 변천(變遷)을 의미한다.

[주7] 부구(浮丘) : 옛날 선인(仙人)인데, 혹 황제(黃帝) 때 사람이라고도 하고 주 영왕(周靈王) 때 사람이라고도 하는 등 여러 설이 있다.

[주8] 창오제(蒼梧帝) : 옛날에 순제(舜帝)가 창오(蒼梧)에서 죽은 옛일에서 임금의 죽음(붕어(崩御))을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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