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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을 도와 조선의 기틀을 세운 경세(經世) 유학자, 하륜(河崙):내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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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을 도와 조선의 기틀을 세운 경세(經世) 유학자, 하륜(河崙)

고영화 향토 고문학 칼럼리스트 | 기사입력 2021/07/27 [09:59]

태종을 도와 조선의 기틀을 세운 경세(經世) 유학자, 하륜(河崙)

고영화 향토 고문학 칼럼리스트 | 입력 : 2021/07/27 [09:59]

 

조선개국 時, 관학(官學)의 기틀을 잡은 경세 유학자(經世儒)이자, 치국(治國)의 요체(要諦)인 유학(儒學)을 상당한 수준에 올린 인물로서, 태종을 도와 조선의 기틀을 세운 정치가였던 이가 바로 호정(浩亭) 하륜(河崙 1347~1418)이었다. 하륜(河崙)의 어릴 때 이야기는 별로 전하는 것이 없으나 무척 영리하고 학문에 열심이어서 14세에 성균관 시험(국자감시)에 합격하였고 19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이때의 좌주(座主, 시험위원장)는 당대의 유명인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과 초은(樵隱) 이인복(李仁復 1308~1373)이었다. 좌주는 단순한 시험관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어서 학문과 관계 진출 면에서 문생을 일생 동안 지켜야 하며, 문생도 이를 따르게 되는데, 하륜(河崙)은 이때부터 30여년간 이색(李穡)을 따랐다. 이때 만난 문우(門友)가 뒷날 조선건국의 기둥이 된 정도전(鄭道傳)과 권근(權近)이다. 특히 6살 아래인 권근과는 막역한 사이여서 후일 권근이 죽자 통곡하며 제문을 지었다. 이인복(李仁復)은 첫눈에 약관의 하륜(河崙)이 큰 인물이 될 것을 알아보고 아우인 인미(仁美)의 딸로 배필을 삼게 했다.

조선조의 유학(儒學)을 이야기 할 때면 성균관⋅향교로 대표되는 관학(官學)과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은 사학(私學)을 들게 된다. 이 두 큰 흐름은 각각 훈구(勳舊)와 사림(士林)이 되지만 영남사림이 성종(成宗)조 이후 중앙무대에서 큰 활약을 보이게 된 데에는 하륜(河崙)⋅변계량(卞季良) 등에 의해 기틀이 잡힌 관학이 밑받침이 됐다. 이들이야말로 국가대업의 기틀을 다지면서 한편으로 조선유학의 주류인 성리학이 꽃필 수 있는 기초를 이뤘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런 면에서 조선개국과 함께 하륜(河崙 1347~1418)⋅하연(河演 1376~1453)⋅강희안(姜希顔 1417~1464)⋅정이오(鄭以吾 1347∼1434)⋅정분(鄭  1382~1454)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한 진주(晋州)의 위치가 돋보인다.

○ 하륜(河崙)은 당대 제일의 정치가이며 외교관, 경제, 음양, 지리에 통달했고 역사, 문장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고, 오늘의 서울(한양)이 있게 한 인물이었다. 경제육전(經濟六典)을 짓고 태조실록을 편찬했으며 고려국사를 개찬했고 다섯 번 정승을 지내고 문형(文衡)을 맡은 국가의 대들보였을 뿐 아니라, 다방면에 걸친 그의 업적을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으나 유교 덕치에 입각해 조선의 제도문물을 정비한 경세유학자(經世儒學者)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영남사림과 관련해서 새로이 평가되는 것은 그의 심성설(心性說)이다. 하륜(河崙)의 심성설은 커다란 체계를 갖춘 것은 아니지만 특히 성설은 영남사림에 내면적으로 이어졌다는 평을 받는다.

1) 청풍루[淸風樓] 경기도 광주에 있다(在廣州) / 하륜(河崙)

少年曾此一看花 젊어 예서 한 번 꽃을 보았더니

老大今來感慨多 늘그막에 지금 오니 감개롭구나

歲月不留人損盡 세월은 흘러 사람은 변하였건만

眼前風物尙繁華 눈앞의 풍물은 오히려 번화하네

○ 하륜은 호(號)가 호정(浩亭), 본관이 진주(晋州)인 그는 1347년 12월 촉석루가 굽어보이는 진주(晋州) 남동(南憧)리에서 태어났다. 하륜(河崙)은 고려 현종(顯宗) 때 거란군이 쳐들어오자 자신이 볼모가 되는 조건으로 거란군을 철병하게 하고 스스로 잡혀 가면서도 끝내 거란을 섬기기를 거부하다 죽음을 당한 하공진(河拱辰)의 11세손이다. 어머니 강(姜)씨 또한 진주세족의 따님이어서 진주는 하륜(河崙)의 명실상부한 고향이다. 지금도 경남 진양군 미천면 오방동 오방산(梧坊山) 기슭에 하륜의 증조부 이하의 묘가 육칠백년 동안 손상 받지 않고 남아있어 옛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 여말선초 정치적 격동기였던 1388년 그는 최영의 요동정벌계획을 극력 반대하다가 강원도 양양(襄陽)에 유배당했다. 그해 여름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최영이 제거되자 관직을 회복했다. 이색, 정몽주 등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함으로써 초기에는 조선 왕조 건국에 반대했으나 정치적 변신을 해 경기좌도도관찰출척사가 됐다.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 좌부대언(左副代言), 우대언(右代言) 등을 거쳐 46세의 나이로 전라도 관찰사를 맡고 있을 때 이성계(李成桂)의 역성혁명을 맞게 됐다.

그 후 1396년 예문춘추관학사로 임명됐을 때 명나라와의 표전시비로 정도전과 정면으로 대립했다. 이에 정도전의 미움을 사게 돼 1397년 계림부윤으로 좌천됐다. 이후 이방원과 급속히 가까워져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적극 지지했다. 태종 즉위 후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에 책록되었고 1402년(태종 2) 좌정승이 되었으며, 명나라 영락제(永樂帝)의 등극을 축하하는 등극사(登極使)로서 명나라에 가 조선 왕조를 승인하는 고명인장(誥命印章)을 받아왔다. 1416년 70세로 치사(致仕)하여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치사 후 왕명으로 함길도 선왕의 능침을 순심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사망했다.

하륜 초상화
하륜 초상화

 

2) 영남루[嶺南樓] 밀양에 있다(在密陽) / 하륜(河崙)

誰?岑樓上接天 영남루는 추화산 언덕에서 하늘에 붙었는데

壁間題詠盡盧前 대들보에 붙은 옛 시 아래로 끝없는 갈밭이 펼쳐 있네.

流年滾滾臨川裏 강물 같이 흐른 세월 지켜본 영남루

往事悠悠倚柱邊 나도 지난 시름에 겨워 기둥에 기대어 회고하네.

十里桑麻深雨露 바라 뵈는 십리 뽕밭과 삼밭에 곧 비가 올 듯

一區山水老雲煙 주변 산과 강에 구름, 안개가 짙네.

?來已見斜陽好 늘그막에 와보니 석양빛이 더욱 좋고

月滿長江更▦筵 강상에 쏟는 달빛에 다시 자리 펼치노라.

○ 흔히 조선창업의 기둥으로 정도전(鄭道傳), 조준(趙浚), 권근(權近), 하륜(河崙)을 들지만 왕권을 확립하고 유교덕치에 의거해 국가의 제도문물을 다진 이는 바로 하륜(河崙)이라고 해야 옳다. 이 무렵 새 정치의 최대문제는 천도문제였다. 태조가 무학(無學)을 몹시 신임해서 국사(國師)로 삼고 무학의 건의에 따라 계룡산(鷄龍山)으로 서울을 옮기기 위해 공사를 시작했다. 당시 경기도 관찰사였던 하륜(河崙)이 태조에게 나아가 한양(漢陽) 천도를 홀로 역설해 계룡산 천도를 중지시켰다. 하륜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한 무학이 「오늘부터 우리 도(道)는 망했다」면서 울고 떠났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하륜은 또 경제육전을 편찬하여 국초의 법질서를 바로잡았고 이를 다시 현실에 맞게 수정 보호해 원육전(元六典), 속육전(續六典)을 활자로 인쇄 반포했다.

3) 「한강시(漢江詩)」 한강6장[漢江六章] 中 2장(章) / 하륜(河崙)

「한강(漢水)의 저 물결이여 / 예로부터 출렁이고 / 북한산(華山)의 저 봉우리는 / 하늘까지 솟아 푸르고 푸르네 / 갑자기 성조가 발흥(勃興)하여 / 문득 동방(東方)을 차지하였다 / 이에 서울을 한강(漢江) 북녘에 정하니 / 종사(宗社)가 편안해지고 / 상서로운 운수와 신령함이 이어지네.

한강(漢水)의 저 물결이여 / 넓은 바다로 흘러가고 / 북한산(華山)의 저 봉우리는 / 초목이 짙푸르게 울창하여라 / 오직 성조가 대를 이어가며 / 신궁(新宮)을 짓기 시작하였다 / 백성을 자식처럼 여기니 / 백성이 즐거이 공적을 알리고 / 며칠 안에 완성되어 / 만 가지 복이 몰려오네 / …… / 국운이 천만년이나 길어나가리」

[維漢之水 振古?  維華之山 倚天蒼蒼 維聖勃興 奄有東方 乃定國都 維漢之陽 宗社乃安 景運靈長 維漢之江 浩乎朝宗 維華之山 鬱乎蔥  維聖繼作 經始新宮 視民如子 民樂赴功 不日有成 萬福攸同…… 祚胤萬世 其永無疆]

이 무렵 지은 하륜(河崙)의 「한강시(漢江詩)」이라는 악장에서 자신만만한 태도로 창업의 기틀 마련에 정열을 바치는 경세유학자로서의 자신만만한 자세가 엿보인다.

○ 정도전(鄭道傳)이 태조(太祖)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면 하륜(河崙)은 태종(太宗)과 뗄 수 없는 사이였다. 하륜과 태종(太宗)과의 만남은 이방원이 성균관의 생도이던 무렵, 방원의 장인인 민재(閔霽)의 집에서였다. 친구인 둘째 사위 방원을 소개받은 하륜은 첫눈에 그의 비범함에 감탄해 이때부터 두 사람은 죽을 때까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맺게 된다. 역성혁명 후, 정도전은 개국1등공신이 되면서 권력을 독점하고 세자인 방석(芳碩)의 스승을 겸해 가히 당대의 제1의 권신이 된다. 이에 불안을 느낀 사람이 방원(芳遠)과 하륜(河崙)이었다. 방원은 왕위가 자신에게서 멀어지는게 불안했고 하륜에겐 정도전이 다른 사대부를 제치고 권력을 독점하는 게 불만이었다. 이때 하륜(河崙)은 방석(芳碩)이 적통이 아니라는 명분론을 내걸고 이숙번(李叔蕃)을 끌어들여 정도전 일파를 제거한다. 「정도전(鄭道傳)의 난」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겉으로는 정도전과 이방원의 권력투쟁이지만 그 이면에는 왕권확립을 노리는 방원(芳遠)의 저항과 정도전(鄭道傳)의 권력독점에 불만을 가진 사대부들의 불만을 하륜(河崙)이 폭발시킨 성격을 갖는다.

4) 윤참의(윤은) 영평군(파주군)에게[贈尹參議 鈴平君 垠] 광주목사 윤은(尹垠) / 하륜(河崙)

坡山中業出兄弟 파주군에서 공적이 뚜렷한 형제가 나타났는데

參議爲兄掌令弟 형은 참의(參議)에 올랐고 동생은 장령(掌令)이다.

不使子孫益其過 자손이 그 허물을 더하지 않도록 당부하더니

却將田宅讓貧弟 외려 전답과 집을 아우에게 양보하였다네.

장령명(掌令名▦)

[주1] 참의(參議) : 조선시대에 국정을 나누어 맡은 육조(六曹)의 정3품 당상관.

[주2] 장령(掌令) : 조선시대 사헌부의 정4품 관직이다. 정원은 2인이다.

○ 하륜(河崙)은 왕왕 그의 화려한 정치경력으로 인해 유학자로서의 면목이 가려진 듯한 인상을 주어왔다. 그러나 주자학자로서 또 문형으로서의 업적은 조선초기의 관학이 제대로 커나가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면 이 당시 유학의 수준은 어느 정도였을까. 고려 말에 움트기 시작한 성리학을 당시 학자들이 꾸준히 연구했지만 참고서라야 겨우 사서집주(四書集註) 등 입문서 몇 권밖에 없었던 때라 초보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이 각각 심기리편(心氣理篇), 입학도설(入學圖說) 등을 지어 깊은 이론을 폈으나 모두 일찍 죽고 제자도 별로 없었다. 하륜은 바로 이때 건국지도 이념인 유교덕치를 굳게 하고 성리학의 쇠퇴를 막으려고 관학확충에 부심했다. 성균관을 확대하고 각 주군(州郡)에 1개씩 향교를 세우도록 해 관학의 초석을 탄탄히 다진 것은 치국의 요체를 유학에서 찾은 그의 신념을 보여준다. 흔히 관학과 사학이 전혀 다른 길을 걸은 것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사학이 이제 겨우 걸음마를 떼던 이때 관학 쪽의 활발한 움직임은 사학에 자극제가 되었고 관학이 쌓아 올린 업적을 흡수하면서 사학은 성장하게 된다.

?○ 하륜(河崙)은 뛰어난 경세가였다. 그는 또 온건하면서도 용의주도한 행정가였다. 그가 당면한 과제는 앞에서 언급한 한양(漢陽)을 수도로 건설하는 일과 유교입국을 실현하고 국가의 새 제도문물을 만드는 일이었다. 한편으로 그는 왕조초기의 혼란을 수습하면서 국가와 왕실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역사 정리작업을 주도한다.

정종 2년에 하륜(河崙)은 문하시랑의 직을 맡으면서 고려의 잔재를 제거하는 첫 작업으로 중앙관제를 개편한다. 첫 번째 목표는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의정부로 개편하고 3군부를 확립하는 일이었다. 도평의사사란 최고합자기관으로, 왕권이 미약했던 고려 말에는 국왕이라도 이의 동의 없이는 하급관리조차 제대로 임명할 수 없었다. 영걸한 군주인 태조도 정도전(鄭道傳) 등 개국공신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도평의사사의 결의를 재가할 뿐이어서 실권은 이들이 쥐고 있었다.

5) 영의정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문충공(文忠公) 하륜(河崙)의 묘소에 치제한 글[領議政晉山府院君文忠公河崙墓致祭文] / 정조(正祖 1752~1800)

“우리 왕가의 왕업이 처음 일어날 무렵 호준한 무리가 구름처럼 일어나 선후로 따랐으니 정기가 매우 빛났네. 진양(晉陽)의 망족(望族)으로서 대대로 빛나게 벼슬이 이어졌으니 산하가 아름다운 기운을 모으고 하늘이 훌륭한 보좌를 내렸네. 일월이 서로 바뀌는 즈음 천지가 정돈되지 않았을 때 경륜을 발휘하여 굉요(?夭) 산의생(散宜生)과 덕을 같이하니 나라의 명이 새롭게 되었네. 술잔의 술 넓고 깊어 우리 희어(羲馭)를 도우니 물고기가 물에 있는 듯, 이윤(伊尹,탕왕) 여상(呂尙,강태공)과 백중의 형세였네. 세 임금으로부터 철권을 받고 이십 년이 넘게 황각(黃閣, 의정부)에 있다가 국정의 큰 계책을 때로 올려서 대경(大經, 큰 도리)을 세우고 세목(細目,조목)을 베풀었네. 천지가 정돈되어 산악처럼 굳건하여 움직이지 않자 처음의 뜻을 따라 물러나니 임금의 행차가 임하여 궁궐의 술을 내렸네. 강한(江漢, 장강과 한수)이 아득히 넓어 보묵(寶墨)이 향을 흘리니 공전에 세금을 물리지 않고도 농사가 풍요한 결실을 이루었네. 남토의 선비들 탄식하여 말하기를, 향사대가 오래되었는데 우리 어른께서 이르러 이곳에서 노닐었다고 하네. 방숙(方叔)과 소호(召虎)의 생각이 침묘(寢廟,왕실사당)를 참배함에 배로 더하는지라, 정령에게 잔을 드리려 해읍(海邑)에 제관을 보내네.”

(我家龍興 豪儁雲從 先後疏附 正氣熊熊 晉陽之望 奕世簪組 山河鍾英 天降良輔 日月之際 草昧經綸 ?宜同德 周命維新 潭潭杯  扶我羲馭 猶魚有水 伯仲伊呂 三朝鐵券 二紀黃閣 大猷時升 立經陳目 乾坤旣整 山嶽不運 式循初服 仙?宣  江漢浩  寶墨流香 公田曠稅 有稼穰穰 南士曰咨 鄕射臺古 我老戾止 於焉樓  方召之思 展寢則倍 ?玆精爽 ??于海)

[주1] 굉요(?夭) : 주 나라 문왕의 사우(四友)의 한 사람으로, 문왕이 유리옥(?里獄)에 갇힌 것을 구해 주었으며, 훗날 무왕을 도와 주(紂)를 멸하였다.

[주2] 산의생(散宜生) : 문왕이 노인을 잘 봉양한다는 것을 듣고 굉요(?夭)와 함께 귀의하여 문왕의 사우(四友)가 되었으며, 후에 무왕을 도와 주(紂)를 멸하였다.

[주3] 희어(羲馭) : 해를 몬다. 해를 뜻한다. 고대 중국의 산동성(山東省) 동부 바닷가 지역으로 해가 뜨는 곳이라 하였다.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희중(羲仲)에게 나누어 명하여 우이(?夷)에 머물게 하니 양곡(暘谷)이란 곳인데, 나오는 해를 공경히 맞이하였다”하였다.

[주4] 방숙소호(方叔召虎) : 방숙과 소호는 주 선왕(周宣王) 때의 명장(名將). 선왕은 만형(蠻荊)이 반(叛)하자 방숙에게 명하여 정벌하게 했는데 시경(詩經)의 소아(小雅) 채기(采?)는 그 일을 읊은 이야기이며 대아(大雅) 강한(江漢)은 소호가 강한에 왔을 때의 일을 읊은 내용이다.

○ 하륜(河崙)은 또 태종2년에 신문고(申聞鼓)제도를 시행한다. 이것은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이 지방수령이나 관찰사, 사헌부(司憲府)에 당직청을 통해 바로 국왕에게 항고할 수 있는 제도이다. 하륜(河崙)이 이무(李茂) 등의 비판을 누르고 실행에 옮긴 신문고는 형식적인 면도 없지 않지만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인민상달기구가 된다. 하륜은 또 저화(楮貨,지폐)를 발행하여 통용시키고 부세(賦稅)의 경감조치를 취한다. 또한 그는 조선개국의 당위성을 밝히고 왕실의 정통성을 천명하는 방편으로 각종 역사편찬 사업을 주도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유관(柳觀), 정이오(鄭以吾), 변계량(卞季良) 등과 함께 태조실록을 편찬하고, 권근(權近), 이첨(李詹) 등과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짓고 고려국사 개찬작업에 참여한다. 원래 고려국사는 정도전(鄭道傳), 정총(鄭摠), 윤소종(尹紹宗) 등이 편찬한 37권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이 편찬한 과정에서 공민왕 이후 자기들과 관련된 대목은 사초(史草)를 뜯어고쳐 미화하는 등 공정성을 잃었고 이것을 이응(李膺)이 고발함으로써 개찬하게 되는데, 그 이면에는 이미 죽은 정도전(鄭道傳) 일파에 대한 태종과 하륜의 악감정도 어느 정도 개입 된 것이 사실이다.

○ 하륜은 치국의 요체를 유학에서 찾는다. 따라서 억불숭유정책을 추구한 것은 당연했지만 정권을 업고서 집행된 그의 억불정책은 집요했고 철저했다. 그는 억불의 방법으로 사찰의 경제기반을 무너뜨리는 방법을 쓴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사찰은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가지고 있었고 관할지역내에서는 백성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다. 사찰은 때로는 이들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이나 양조업을 경영하기도 해 폐해가 컸다. 하륜은 태종이 즉위하자 각 주군(州郡)에 한두 군데의 절을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없애고 토지와 노비는 국가에 귀속시키는 가혹한 조치를 취한다. 다시 태종9년에는 사사(寺社)의 토지 가운데 절반을 회수했고 이 결과 종래 사찰이 가졌던 세력은 무너져 버린다.

사원세력을 도태시키고 노장사상과 비기(秘記)를 단속하면서 그는 한편으로는 유학을 토착화하기 위해 부심한다. 중국에서 증자(曾子)와 자사(子思)의 초상을 들여와 배향토록 했고 태종 6년에는 유학제조(儒學提調)를 두어서 유학을 필두로 무(武,군사학) 이(吏,행정) 역(譯,어학) 음양풍수 의학 자(字,글씨) 률(律), 산(算), 악(樂) 등 10과를 교육해 관리를 뽑게 했다. 그의 유학진흥책은 문생인 변계량(卞季良), 윤회(尹淮), 조말생(趙末生) 등을 통해 세종 때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지만, 하륜 자신이 세종이 세자일 때 스승이기도 해서 그의 경세관은 세종에게 영향을 줬다.

6) 하륜(河崙)의 <아들의 이름을 지으면서[名子說]> 중에서, ‘나무가 오래 자라면 반드시 산중에 우뚝하며 물이 오래 흐르면 반드시 바다에 도달한다. 사람의 학문에도 또한 그러하니, 오래하여 그치지 않으면 반드시 공을 이루는데 이른다.(木之生久則必聳乎巖壑 水之流久則必達乎溟渤 人之學亦然 久而不已則必至于有成)’고 아들에게 당부했다.

● 하륜은 화려한 정치경력 때문에 성리학자로서의 면목이 드러나지 못한 감이 있다. 그러나 그의 성리학 이론인 심설(心說)과 성설(性說)은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다. 그의 우주관은 「심설(心說)」에서 나타난다.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적인 경향을 띤 심설에서 그는 사람이 사물과 다른 원인으로 사람은 기(氣)가 바르고 통하기 때문에 이(理)가 내재하게 되고 그 결과 기(氣)가 온전해져서 사람이 된다고 했다. 반대로 사물은 기(氣)가 치우치고 막혔기 때문에 사물이 된다고 했다. 또 성설(性說)에서 덕성에 바탕을 둔 가치관을 전개 하고 있다. 그는 성(性)이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덕성(德性)이라고 보고 성의 자연에 순종하면서 그것을 실천하고 체득하는 것이 도덕이라고 한다. 그의 이 성설(性說)은 길재(吉再), 김종직(金宗直), 조광조(趙光祖) 등 사림파에게 내면적으로 연결된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하륜(河崙)은 「인주(人主)의 정치는 심학(心學)에 달려있다.」고 하여 그의 성리이론을 나라를 다스리는 방편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가 순수성리학자가 아닌 ‘경세유학자’임을 보여준다.

○ 하륜(河崙)은 조선개국과 함께 국가의 제도와 문물을 유교적 기반 위에 탄탄히 세워 조선왕조의 근간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가 집행한 정책은 대체로 온건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취성이 결여된 왕당파적 태도로 인하여 비판 받기도 한다. 그의 집권 기간 동안 수행된 억불(抑佛) 정책은 이후 불교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할 정도로 철저한 것이었다. 또 유교질서 확립과정에서 실정에 맞지 않게 여자의 수절을 지나치게 강요하기도 했다. 하륜의 묘는 경남 진양군 미천면 오방동 오방산 기슭에 있다.

사진=고영화 칼럼리스트
사진=고영화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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