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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군어사(監軍御史) 황준량(黃俊良)의 거제도 순행길과 그의 한시편:내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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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군어사(監軍御史) 황준량(黃俊良)의 거제도 순행길과 그의 한시편

고영화(高永和) | 기사입력 2021/07/12 [08:20]

감군어사(監軍御史) 황준량(黃俊良)의 거제도 순행길과 그의 한시편

고영화(高永和) | 입력 : 2021/07/12 [08:20]
경상도 순행길을 그린 그림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1517∼1563) 선생은 조선전기 어진 목민관으로서 애민 의식을 갖춘 퇴계의 문도였다. 신녕현감, 단양군수, 성주목사 등을 역임한 문신 황준량(黃俊良)선생의 '금계집'에 따르면, 1551년 경상도 감군어사(慶尙道監軍御史)에 임명되어, 그해 초에 항해 길에 올랐다. 한편 조선시대 감군어사(監軍御史)는 군(軍)을 감찰하는 임무를 맡은 어사였다. 심각한 수군의 비리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으로 파견되다보니, 그 권한이 막중하여 병사(兵使)와 수사(水使)까지 탄핵할 수 있었고, 보통 6개월 정도 순행했다고 한다. 근데 이후 1555년 을묘왜변(乙卯倭變)의 책임을 감군어사에게 지우면서 감군어사의 파견이 완전히 중단되었다.

황준량(黃俊良) 감군어사는 경상도 해안에 설치된 수군진영을 둘러보기 위해 경상북도 동해안 영해에서 출발하여 영덕, 포항, 장기, 감포, 울산, 기장, 동래 해운대, 해운포, 사하 몰운대, 김해 연자루 함허정, 가덕도 천성진, 웅천 진동루, 제포, 거제시 영등진, 고현성, 통영 세병관, 사량도, 남해군 미조항, 남해읍치 동헌까지 선박을 이용했고, 다음 사천 곤양, 진주 촉석루, 진주성 함옥헌, 창원 월영대, 함안 동헌, 창원 회산, 영산현 동헌, 현풍 동헌, 화원현, 성주, 경산, 양산 교동 풍영루, 상주, 상산, 용군현 부취루, 예천현 동헌에서 그의 집까지는 육상 길로 순행했다. 경상도 바닷길과 낙동강 길, 그리고 육상 길에서 기록한 시(詩)가 그의 문집에 수십 편이 실려 있다.

○ 다음은 1551년 4월 20일(양력)경 바닷길 순행 중에 창원시 진해구 제포에서 배를 타고 거제시 장목면 영등포로 건너오면서 느낀 바를 적은 글이다.

1) 제포로부터 영등포로 건너가며(自薺浦渡永登) / 황준량(黃俊良)

薺浦城邊穀雨晴 제포 변방성 곡우날 날이 개이니

熊神江口晩潮生 웅신(곰신)이 강구에다 만조를 일으키네.

旗?西日山雲亂 나부끼는 깃발, 서녘 기운 해, 산 구름 어지럽고

帆?東風海若驚 동풍에 돛단배 질주하니 바다가 놀란 듯,

巖老?撞稜角瘦 거센 물결에 바위는 익숙한 듯 뾰족한 모퉁이 오뚝하고

鷺新?雪羽儀明 해오라기 물에 씻어 단장하니 날개 깃털 깨끗하다.

遙看一髮徐生島 멀리서 바라 본 한 가닥 깃털이 모두 섬이 되니

想得求仙採藥行 생각건대, 신선이 찾는 약초나 캐러 갈까.

○ 다음 시편은 당시 거제읍치였던 거제시 고현성 거제현아에서 바라본 경치와 변방 거제도의 풍경, 수자리 사는 거제수군의 밭갈이 모습과 평온한 거제도의 아름다움 풍경을 읊은 시이다. 고현성 객사에서 하룻밤 묵은 후 경남 통영⋅남해도로 향해 다시 항해 길에 올랐다.

2) 차 거제헌(次巨濟軒) 고현성 동헌 / 황준량(黃俊良) 1551년

山水窮千里 천리 멀리 바라본 산과 바다에

乾坤此一邊 하늘과 땅이 이 한쪽 변방에 접해있네.

蜃噓樓蔽日 신기루가 해를 덮으니

鯨鬪??天 고래싸움에 물고기 지느러미가 하늘 높이 나부낀다.

人狎舟中敵 사람들은 주중적국에 익숙한데

官居橘裏仙 벼슬살이는 유자 속의 신선놀음,

耕?迷海戍 밭갈이에 빠진 변방부대 병사들,

聖化不期然 자연스레 이룬 성인의 덕화(德化).

(거제도는) 동쪽으로는 오랑캐와 접한 섬이며 남쪽을 빙 둘러 귤도가 있다고 말한다.(東接島夷 南環橘島 故云)

[주1] 주중적국(舟中敵國) : 한 배 안에 적의 편이 있다는 뜻으로, 군주가 덕을 닦지 않으면 자기편일지라도 모두 곧 적이 될 수 있음을 이르는 말.

[주2] 불기연(不期然) : 저도 모르게, 무의식중에, 모르는 사이에. <동사> 이와 같을지는 예상치 못하다.

○ 황준량(黃俊良 1517~1563)은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서정적인 유선(儒仙)의 풍류를 이어받아 자신의 시속에다 선계(仙界)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또한 그는 성현의 긴요한 말씀이 담긴, 작은 첩(帖)을 걸어놓고 스스로 경계하고 성찰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학교와 교육진흥에도 힘을 기울여 문묘(文廟)를 수축하고 백학서원(白鶴書院)을 창설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1551년에는 경상도 감찰어사(慶尙道監軍御史)로 임명되고 이어 지평에 제수됐다. 위 한시는 이 당시 경상도 순행 중에 지은 작품으로써, 그의 문학적 특색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또한 그는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와 교류했다. 동방의 유학은 학문과 도의의 근간이라, 퇴계 선생은 이 사상을 더욱 넓혀 이었고, 이 높은 이상을 그대로 실천 수범한 진정한 목민관이 있었으니 백성을 하늘로 여겼던 바로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이었다.

3) 퇴계를 읊다[詠退溪] / 황준량(黃俊良)

九曲寒溪?地淸 아홉 구비 찬 냇물이 땅을 맑게 베는데

?鳴如聽櫂歌聲 졸졸졸 냇물 소리 뱃노래처럼 들려오네

一川風月洋洋趣 온 시내의 달과 바람 흥취가 무한하고

留得高人遠世情 고인(高人)께서 머무시니 세속 정이 멀어지네

○ 금계 황준량은 스승 퇴계 이황이 존경하는 롤 모델(role model)이었다. 그래서 그는 만년에 고향에서 은거하면서 후학을 가르치고 유유자적한 삶을 보내려는 꿈을 가졌다. 금계는 전원으로 돌아가 은둔의 삶을 희구해 왔다고 퇴계에게 고백했다. 그는 유자적인 소양을 바탕으로 선비다운 풍류미를 구비하는 것이 곧 선비적인 멋의 발현이라 하였다. 이에 금계는 한가하게 거주하면서(閑居) 맑은 피리 소리(淸笛) 같은 삶의 미(美)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1560년 성주목사에 임명되어 4년을 재임하다가 1563년 봄에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오는 도중 예천에서 47세의 일기로 세상을 버려 결국 꿈을 이루지 못했다.

한편 스승의 호(號) ‘퇴계(退溪)’는 안동시 도산면 낙동강 어느 개울가 이름이고, 그의 호(號) ‘금계(錦溪)’는 영주시 풍기읍 금계 개울가 이름이다. 이전에 스승 이황이 말년을 보내고자 안동 지역 여러 곳의 터를 살펴볼 때, 황준량은 스승과 동행해, 지금 도산서원 자리와 청량산 당(堂)까지 터를 정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호(號) 금계(錦溪) 또한 스승의 호와 닮아 있다.

4) 풀피리 소리를 듣고[聞草笛] / 황준량(黃俊良)

葉裏回仙笛 풀잎 속에서 신선의 피리소리 들려오니

唇邊紫鳳吟 입술 가에 봉황이 읊조리는 듯하네

山風飛一曲 산바람에 한 가락 날려 보내니

吹散暮天陰 저문 하늘 구름 가로 불어 흩어지네

○ 또한 금계 시의 한 특징인 산수(山水)를 스스로 즐기며(自樂) 급기야 물아일체로 몰입되는 양상을 표현했다. 그리고 일련의 산문과 시를 통해서는 그의 사상 경향이 위기지학(爲己之學)적인 것으로 귀결됨이 확인되었다. 그런데 그의 사상이 단순히 소극적인 위기지학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구체적인 실천 유학으로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16~17세기 퇴계 학단의 처사들이 향약을 실시하여 향촌 질서를 유지하고 서원을 중심으로 활발한 언론 활등을 펴 향론을 형성 조정하였고, 국가적 위기에 처해서는 향토를 수호하고 국난을 극복하는데 기여한 것과도 같은 맥락이었다.

5) 만흥[?興] 부질없이 흥에 겨워 / 황준량(黃俊良)

無才能濟世 세상을 구제할 재주도 없고

多病轉支離 병이 많아 갈수록 지리하여도

林下饒閒味 숲 아래엔 한가한 맛 넉넉하여

逍遙只自知 소요하며 그저 스스로만 알 뿐

6) 꽃구경[看花] / 황준량(黃俊良)

梅花飄雪杏花開 매화꽃 눈처럼 날리고 살구꽃 피더니

桃李繁英次第來 복사꽃 자두꽃 번성한 봉오리 차례로 오네

不是春殘貪結子 남은 봄에 맺는 열매 탐하는 건 아니나

榮枯如代自相催 돌아가며 피고 시들어 절로 서로 재촉하네

○ 퇴계 이황이 바라본 황준량의 성품을 평가한 글에는, 효성과 우애가 남달랐다고 평가한다. 물건이 생기면 모친을 봉양하거나 자매에게 나누어 줄 정도였지만 정작 본인은 장사를 지내는 날 상복이나 관하나 변변한 것이 없을 만큼 청빈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황은 그가 아름다운 산수를 지날 때 그냥 지나치지 못하여 풍경을 보며 배회하고, 시를 읊느라 밤이 되도록 집에 가는 것을 잊을 정도로 감수성이 풍부하고 속세에 미련이 없는 소박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였다.

7) 감사 고영지의 시에 차운하여 주다[次贈高監司英之] / 황준량(黃俊良)

山水關東作使賓 산과 물이 빼어난 관동에 사신이 되니

前身定是謫仙人 전신은 반드시 귀양 온 신선이리라

蔚陵梨棗應偸實 울릉의 배와 대추 훔쳐 먹었겠지만

楓岳煙霞幾問眞 풍악의 연하는 몇 번이나 참모습을 물었나

羽蓋星?天上客 깃 꽂은 일산과 사신의 뗏목 천상의 객이요

棠花沙路海邊春 바닷가 모래 길에 봄맞아 해당화 피었네

伽峯空極停雲望 하늘로 치솟은 가봉에 머무는 구름 바라보니

??無因?後塵 아득히 밟은 자취는 먼지 흔적 없구나

[주1] 고영지(高英之) : 고맹영(高孟英 1502~?)으로 영지는 그의 자이다. 본관은 장흥(長興), 호는 하천(霞川)이다. 1550년 옥천(沃川) 군수가 되었는데, 그 당시 황준량이 전송하며 지은 〈송고영지지옥천(送高英之之沃川)〉이라는 시가 《금계집》외집 권2에 수록되어 있다. 1561년 강원도관찰사로 외직에 나갔다. 아들이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다.

[주2] 깃 꽂은 일산 : 깃을 꽂아 장식한 일산이니, 수령의 행차를 비유한다. 두보(杜甫)의 〈추우탄(秋雨歎)〉 시에 “가지 가득 붙은 잎새는 푸른 깃 일산 같고, 무수히 핀 꽃들은 황금 돈 같네.〔著葉滿枝翠羽蓋 開花無數黃金錢〕”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3] 사신의 뗏목 : 성사(星?)는 은하수(銀河水)에 뜬 뗏목이라는 말로, 여기서는 중국 사신을 뜻한다. 전설에 어떤 사람이 바닷가에 살면서 해마다 8월이면 어김없이 뗏목이 떠오는 것을 보고, 그 뗏목에 양식을 가득 싣고 가서 은하수에 당도하여 견우와 직녀를 보았다고 한다.

낙화〔落花〕 / 황준량(黃俊良)

東風小雨作輕寒 봄바람에 가랑비 내려 한기가 약간 일고

江燕斜飛日欲殘 제비가 강에 날자 해가 막 지려 하네

遠客如今添一恨 먼 길손은 오늘에 한이 하나 보태졌나니

連林花落滿空山 잇닿은 숲에 꽃 져서 빈산에 가득한 거라네

●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1517-1563)의 연보(年譜) :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錦溪), 조선 중기의 명신, 본관은 평해(平海)다. 안동 출신 명신이요, 강호가도(江湖歌道)의 학자였던 농암 이현보의 손서(孫壻)요, 벽오(碧梧) 이문량(李文樑, 1498-1581)의 사위며, 퇴계 이황의 대표적 제자다. 현재의 경북 영주시 풍기읍 서부리에서 태어난 금계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비상해 '기동(奇童)'으로 불렸고, 문명(文名)이 자자하였다. 1537년(중종 32) 21세 생원(生員)이 되고, 1540년 식년문과에 을과 이인(二人)으로 급제했다. 그 뒤 권지성균관학유(權知成均館學諭)로 임명되고, 이어 성주훈도로 차출되었다. 1542년 성균관학유가 되고, 이듬해 학록(學錄)으로 승진되었으며, 양현고봉사를 겸하였다. 1544년 학정, 1547년(명종 2) 박사에 이어 전적에 올랐다. 1548년 공조좌랑에 재직중 상을 당해 3년간 시묘한 뒤 1550년 전적에 복직되었다. 이어 호조좌랑으로 전직되어 춘추관기사관을 겸했으며, 『중종실록』·『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해 다시 병조좌랑으로 전직되었고, 불교를 배척하는 소를 올렸다. 1551년 경상도 감찰어사(慶尙道監軍御史)로 임명되고, 이어 지평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앞서 청탁을 했다가 거절당한 바 있는 언관의 모함이 있자, 외직을 자청해 신녕현감으로 부임했다가 1556년 병으로 사직하였다. 이듬해 1557년 단양군수를 지내고, 1560년 성주목사에 임명되어 4년을 재임하였다. 그러다가 1563년 봄에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오는 도중 예천에서 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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