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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학으로 본 역사] 한양(漢陽)의 명소 서호(西湖)에서 절경에 취해 유락(遊樂)하다:내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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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학으로 본 역사] 한양(漢陽)의 명소 서호(西湖)에서 절경에 취해 유락(遊樂)하다

우리나라 서울시의 ‘서호(西湖)’는 어디를 가리키는 걸까?

고영화(高永和) | 기사입력 2021/07/12 [08:14]

[고문학으로 본 역사] 한양(漢陽)의 명소 서호(西湖)에서 절경에 취해 유락(遊樂)하다

우리나라 서울시의 ‘서호(西湖)’는 어디를 가리키는 걸까?

고영화(高永和) | 입력 : 2021/07/12 [08:14]

그 옛날 조선시대, 서울(한양)의 서호(西湖)는 수려한 경치에다 물자가 풍부하고 오가던 인파로 북적이던 도성의 길목이었다. 게다가 석양에 물든 노을이, 붉게 타오르는 서호(西湖)에서 벗과 더불어 조각배를 타고 가벼운 취기 속에, 시(詩)나 노래 한 곡조 읊조리며 노닐기에 가장 좋은 명소(名所)였다. “물빛과 산색이 농담(濃淡)을 희롱하는 이때, 서호(西湖)로 술 싣고 가는 것도 좋고말고요.(水光山色弄微晴 好向西湖載酒行)” 당시 도성의 시인묵객(詩人墨客)과 풍류객들이 너나없이 농담반 진담반 내뱉는 인사말이었다.

○ 그렇다면 우리나라 서울시의 ‘서호(西湖)’는 어디를 가리키는 걸까  서울시 마포구 서강(西江) 나루 일대 한강을 일컫는 말이다. 강물의 유속이 느리고 잠잠하여 마치 호수 같이 보였기에 붙여진 명칭이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 서호(西湖)라 함은 ‘마포로부터 서강에 이르기까지 통칭하여 부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덧붙이면, 경기도 하남시와 남양주시 사이로 흐르는 한강 구간을 미호(渼湖)라 부르는데 미음나루(渼陰津)와 나루 건너 강마을 미사리(渼沙里)에서 따온 말이다. 그리고 서호(西湖)와 대비시켜 서울시 압구정과 동호대교 일대를 동호(東湖)라 불렀고, 용산(龍山)에서 보는 한강을 용호(龍湖)라 했다. 게다가 경기도 고양시 행주산성(幸州山城) 앞 한강을 행호(幸湖)라 부른 것도 모두 이와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이다.

그리고 예전에는 한양(漢陽)의 남쪽을 싸고 흐르는 한강 구간을 셋으로 나누어 불렀다. 남산의 남쪽 일대에서 노량(鷺梁)까지를 한강(漢江), 노량 서쪽으로부터 마포(麻浦)까지를 용산강(龍山江), 그 서쪽인 양화도(楊花渡) 일대를 서강(西江)이라 했다.

● 이제부터는 조선의 문인 선비들이 서호(西湖)에서 유락(遊樂)했던 기록을 살펴보자. 먼저 조선중기 한문4대가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 1564~1636)는 관청의 공무를 모두 마치고 매번 서호(西湖)에서 배를 띄워 공무로 쌓인 피로를 풀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서호에서의 뱃놀이는 석양일 때가 제격이라 하였고, 『어우야담』으로 유명한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은 한강(漢江) 서호(西湖)에서 뱃놀이하며 짧은 노로 머나먼 은하 끝까지 노닐었으면 좋겠다고 했을 정도로 서호는 선비들이 한양에서 노닐고 싶은 최고의 명소로 각광을 받았다.

○ 또한 조선전기에는 영접도감(迎接都監)에서 중국 사신을 이곳으로 모셔 연회를 베풀고 연석(宴席)에서 술을 즐겨 마셨다고 한다[조선왕조실록]. 사신들이 “서호에서 바라보는 강산(江山)이 한 폭 그림 같다(江山似?圖)”고 감탄했고, 조선후기 문신 윤기(尹  1741~1826)에 따르면 밤섬(栗島)의 모래사장에서 사람들이 매번 한가로이 활쏘기를 하여 구경을 하려가니 흰 깃의 화살이 날아가 붉은 정곡을 적중시키고는 무예를 뽐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서호(西湖)에는 탁영정(濯纓亭)이란 정자가 있었는데 정자에서 바라본 석양 아래 돛단배가 떠가는 모습이 절경(絶景)이었다고 전한다.

○ 조선중기 문신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 1537~1616)는 이황·조식(曺植)으로부터 학문을 배우고 성혼(成渾)·이이(李珥) 등과 사귀면서 주자의 학문을 깊이 연구했던 인물이다. 그는 율곡(栗谷 1536~1584)과 절친이었는데 율곡이 동인의 탄핵으로 사직하여 서호(西湖)에서 송별을 하게 되었다. 윤근수가 떠나가는 배를 바라보며 “강 가득 풍랑 속에 한 척 배로 돌아가고나(滿江風浪一船歸)”라며 율곡과의 이별을 아쉬워했다. 조선시대에는 한양 도성에서 삼남지방으로 낙향하는 이들은 대부분 서강 또는 마포나루에서 이별을 하였다. 그래서인지 강변에는 이별의 증표인 버들나무가 줄지어 있었다. 이별의 증표인 버들을 보니, 조선중기 기녀 홍랑의 시조가 떠오른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에게. 자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 한편 중국 절강성(浙江省) 항저우(杭州)에도 ‘서호(西湖)’라는 유명한 호수가 있다. 절경이 유명한 호수로, 옛 중국의 미녀 ‘서시(西施)의 미모에 견주어도 손색없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2011년 6월에는 서호가 중국뿐 아니라 세계의 원림(園林) 설계에도 모범이 된다는 평가를 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을 정도로 경치가 뛰어나다. 그 옛날 송(宋)나라의 서호처사(西湖處士) 임포(林逋 967~1028)가 서호(西湖)에서 학을 기르고 매화를 가꾸며 은거한 채 살았기에 당시 사람들이 그를 매처학자(梅妻鶴子)라고까지 하였다. 그가 읊은 <산원소매(山園小梅)> 시(詩)에 “성긴 그림자는 맑고 얕은 물에 비끼어 있고 은은한 향기는 황혼의 달빛 아래 떠다니네(疎影橫斜水淸淺 暗香浮動月黃昏)”라며, 매화의 맑고 빼어난, 고결하고 단정하면서도 그윽한 운치를 묘사한 바, 세상에 절창(絶唱)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구양수(歐陽脩 1007~1072), 소식(蘇軾, 蘇東坡 1036~1101) 등도 모두 이 곳 서호(西湖)에서 연회를 베풀고 절경(絶景)을 감상했다. 소동파(蘇東坡)의 시에 “만일 서호(西湖)를 가지고 서시(西施)에 비한다면, 얕은 화장과 짙은 화장 모두가 마땅하다.(西湖濃抹如西施)”하였는데, 이는 서호의 경치가 개인 날에도 좋고 비 오는 날에도 좋다는 뜻이다.

○ 조선후기 문신 김진수(金進洙 1797~1865)는 일찍부터 중국 북경까지 드나들면서 그곳에서 접하는 인물과 풍속, 그리고 자연의 경관을 주제로 시문을 남겼다. 그가 어느 해 서호(西湖)를 방문하고 그 가려(佳麗)함에 다음과 같이 읊었다. “서호(西湖)의 수려함은 그림에도 일찍이 없었으니 물 스치듯 드리운 버들은 수없이 많이 있네. 참된 향기 코 찌름을 괴이하게 여겼는데 집집마다 주렴에 미인을 가둬 두었어라.(西湖佳麗?曾無 拂水垂楊萬萬株 ?得眞香來觸鼻 家家珠箔鎖名姝)” 그리고 또 그가 아름다움에 취해 평하길, “촉나라 비단을 물에 빨면 수놓은 무늬가 배나 생겨나고, 해질녘의 호랑나비는 봄바람에 놀고나.”하였다.

● 서울시 서호(西湖)에는 ‘삼개(三浦) 나루(津)’라고 불리는 마포나루(麻浦津), 서강나루(西江津), 용산나루(龍山津)가 있었다. 물론 지금은 그 자취만 남아 있지만, 용산나루(龍山津)와 서강나루(西江津)는 별영창(別營倉 훈련도감 급료), 광흥창(廣興倉 관료 녹봉) 등 정부의 창고가 있어 주로 조운선(漕運船)이 들어오는 반면, 마포나루(麻浦津)는 사상(私商)인 객주(客主)가 자리 잡으면서 일반상업용 상선의 곡물과 어물이 드나들던 곳이었다. 물산의 중간 집산지이기에 객주(客主)가 많았고 상인과 뱃사람이 몰려들어 색주(色酒)가 번성했으며, 뱃길의 안녕을 빌기 위한 당주(당집)도 많았다. 특히 서강(西江)나루는 삼남지방과 서해안으로부터 곡물과 어물이 들어오던 세곡선의 선착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황해도, 전라도, 경상남도, 충청남도, 경기도의 세곡(稅穀)을 운반하는 조운선(漕運船)이 모두 이곳에 모이기에, 세곡을 보관하기 위하여 광흥창(廣興倉 관료 녹봉)과 풍저창(豊儲倉 대궐 곡식)의 강창(江倉)이 설치되었다.

○ 서강(西江)은 한강의 서쪽 지역으로 봉원천[창천(倉川)]과 한강이 합류하는 지역을 가리킨다. 삼남 지방에서 올라온 곡물과 어물이 들어오던 나루터로, 서해안으로부터 몰려드는 조운선이 모이는 곳이자 역동성이 넘치는 지역이었다. 이곳에 모인 세곡을 상수동의 점검청(點檢廳), 신정동의 공세청(供稅廳)을 거쳐 봉원천(창천)을 거슬러 올라와 광흥창(廣興倉)에 입고시켰는데 이런 이유로 이곳에 많은 관리와 가솔들이 모여 살아 ‘서강서반(西江西班)’이란 말이 생기기도 하였다. 서강서반(西江西班)은 마포구 창전동(倉前洞)에 있던 마을로서, 광흥창을 중심으로 녹봉을 나누어 주던 관리들의 가솔이 모여 살게 되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또한 창전동(倉前洞)이란 동명(洞名)은 조선시대 와우산(臥牛山) 동쪽 기슭에 공미(貢米)를 쌓아둔 광흥창(廣興倉) 앞의 동네라는 뜻이다. 또한 광흥창터를 일명 태창(太倉)터라고 부르기도 했다.

○ 광흥창(廣興倉)은 마포구 와우산(臥牛山, 形如臥牛) 남동쪽, 서강(西江) 나루 북편에 있었다. 광흥창은 고려 충렬왕 때 설치되어 조선시대까지 존속한 백관의 녹봉을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 및 그 관할하의 창고로 한양 천도 후 전국 각지의 조운선(漕運船)이 세곡(稅穀)을 싣고 집결하는 와우산(臥牛山) 남동쪽 서강(西江) 연안에 두었다. 광흥창은 1405년(태종 5) 풍저창, 공정고, 제용사 등과 함께 호조의 속사로 편제되었으며 풍저창과 함께 국가재정운영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조선 건국 직후부터 삼사의 회계 출납 대상이었고 사헌부의 감찰을 받았다.

○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곳 서강(西江)은 삼남지방의 곡식과 특산물의 집산지로 유명하였다. 그래서 이 지역은 뱃사람들의 근거지로서 선촌(船村)이 형성되어 있었다. 고지도를 살펴보면 한강 하류 쪽부터 양화진(楊花津), 서강(西江), 마포(麻浦), 용산(龍山) 나루가 차례로 위치했다. 또한 이 일대는 서해바다를 거쳐 한강 하류를 통해 여기까지 지방으로부터 올라오는 세곡과 공물 등을 관리하던 창고(江倉)가 한강변 북편 강가를 따라 위치했다. 양화진(楊花津)에서 마포(麻浦)까지 총융창(?戎倉), 광흥창(廣興倉), 사복창(司僕倉)이 있었고 그 다음 용산까지 군자감(軍資監), 만리창(萬里倉), 별영창(別營倉 훈련도감 급료) 등이 있었다. 그리고 이 지역은 아니지만 가까운 곳에 풍저창(?儲倉 대궐 곡식), 양현고(養賢庫) 등의 창고(倉舍)도 따로 있었다.

<서호(西湖) 일대를 배경으로 삼은 한시(漢詩)편>

실학파의 선구적 인물이었던 이수광(李?光 1563~1629)은 눈이 내린 어느 해 겨울, 석양이 드리운 저녁에, 그리운 옛 친구(友人)를 찾아갔다. 지난 젊은 시절에 친구와 함께 호쾌하게 술을 마시던 때에도 서호(西湖)에는 붉은 석양이 온통 빛났다. 반가운 친구가 방문했다고 음식을 따로 장만하는지, 굴뚝에는 연기가 수북이 피어오른다. 그리고 그 친구는 주점으로 달려가 술을 사왔던, 그때나 지금이나 상황이 너무 흡사하다고 말한다. 친구와 만나 흥겨운 마음에 지난 아름다웠던 추억을 회상한다는 내용이다.

1) 서호에 친구를 방문하다[西湖訪友人] / 이수광(李?光 1563~1629)

江外空林雪壓枝 강 건너 빈숲에는 눈이 가지를 누르는데

故人來訪爲相思 옛 친구를 찾아온 건 그리웠기 때문이라오

夕陽籬落孤煙裏 석양 속 울타리에 외로운 연기 피어나니

彷彿當年換酒時 당년(當年)의 술 바꿔오던 때와 방불하구나

‘支’ 운(韻) 7언절구인 위 시는 이백(李白)의 시, ‘술을 마주하니 하지장이 생각나’ 〈대주억하감(對酒憶賀監)〉을 원용한 한시이다. “사명에 미친 나그네 있었으니 풍류 넘치는 하계진(賀知章)이다. 장안에서 한 번 서로 만나서는 나를 적선인이라 불렀었지. 그 옛날 술을 그리도 좋아하더니 어느새 솔 밑의 티끌이 되었구려. 금 거북으로 술 바꿔 마시던 일 생각만 하면 눈물이 수건을 적시네.[四明有狂客 風流賀季眞 長安一相見 呼我謫仙人 昔好杯中物 ?爲松下塵 金龜換酒處 却憶淚沾巾]” 당 현종(唐玄宗) 때의 시인 하지장(賀知章)은 시문(詩文)과 글씨에 모두 뛰어났고, 술을 매우 좋아하였다.

● 조선초기 문신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여섯 왕을 섬겨 45년간 조정에 봉사하였고, 시문을 비롯한 문장과 글씨에도 능했으며, 신흥왕조의 기틀을 잡고 문풍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했던 인물이다.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 우리나라 역사상 전형적인 2인자를 대표한다면, 서거정(徐居正)은 그야말로 공직에 충실한 관료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신숙주(申叔舟 1417~1475)나 한명회(韓明澮 1415~1487)처럼 세상의 형편에 따라 움직인다거나 영상(領相)의 자리까지 올라 명예욕, 권력욕을 탐하는 인물은 더욱더 아니었다. 그는 그저 묵묵히 맡겨진 소임을 다하고 시류(時流)에 영합하지 않고, 시문을 지으면서 세상을 관조하다 세상을 버렸다. 요즘 입장에서 바라보면 한마디로 ‘학식은 풍부하나 재미없는 공직자’였다.

그는 생애 70여 년 동안 하늘을 찌를 정도의 업적을 쌓았지만, 늘 은퇴하여 세상을 멀리한 채 한적한 곳에서 살고 싶어 했다. 벼슬에 있으면서도 서울 한강변 나루터로 나와 아름다운 풍경을 시로 읊으며 강호를 꿈꾸곤 했다.(광나루, 마포나루 등등) 그가 꿈꾸던 강호의 삶은 오늘날 온데간데없지만, 그가 남긴 문장 속에서나마 아련하게 느낄 수가 있다.

2) 마포의 밤비[麻浦夜雨]. ‘尤’ 운(韻) / 서거정(徐居正 1420~1488)

百年身世政悠悠 백년의 신세가 정히 아득하기만 한데

夜雨江湖惹起愁 강호의 밤비가 시름을 끌어 일으키네

袖裏歸田曾有賦 소매 속엔 예전에 지어 둔 귀전부가 있어

已?終老白鷗洲 이미 흰 갈매기 물가에서 늙기로 했노라

[주] 귀전부(歸田賦) : 도잠(陶潛)의 〈귀거래사(歸去來辭)〉와 〈귀전원(歸田園)〉 등의 시에서 온 말로, 전하여 은퇴를 의미한다.

● 조선을 건국한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은 한양도읍 건설을 마치고 지은 <진신도팔경시(進新都八景詩)>에서 서호(西湖)의 풍광을 <서강조박(西江漕泊)>이란 시로 읊었다. 1398년 4월26일(음)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에게 신도팔경(新都八景)의 병풍 한 면씩을 주었다”고 한다. 거기에다 정도전이 8경시(八景詩)를 지어 바쳤다. 그 중에 여섯 번째가 다음 시(詩) <서강조박(西江漕泊)>이다.

3) 서강에 조운선이 정박하여(西江漕泊) / 정도전(鄭道傳 1342~1398)

四方輻湊西江 사방의 선박들이 서강(西江)으로 밀려드니

拖以龍?萬斛 우뚝 솟은 큰 배에서 일만 섬을 풀어놓네.

請看紅腐千倉 여보시오, 창고마다 썩어가는 곡식을 좀 보소

爲政在於足食 ?정치란 나라 살림이 넉넉하면 그만이라네.

○ 위 시에서 서강(西江, 지금의 마포구 서강대교) 나루에는 사방에서 물자와 곡식들이 큰 배로 들어와 도성 창고에 곡식이 썩을 정도로 넘쳐난다. 그래서 그는 <서강조박(西江漕泊)>에서 “여보시오. 썩어가는 창고의 곡식 좀 보소. 정치란 살림 넉넉하면 그만일세(淸看紅腐千倉 爲政在於足食)”라고 말하며, 정치가 안정되고 나라살림이 풍족해졌기에 역성혁명이 정당성을 갖추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정치의 핵심은 족식(足食)에 있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그는 역성혁명을 통해 백성들의 굶주림을 면하게 했다는 그 자신감의 표현이 바로 8경시(八景詩)를 적은 배경이었다.

<논어(論語)>에서 제자 자공이 정치에 대해서 묻자, 공자가 말하기를 “양식을 풍족히 하고(足食), 군사를 튼튼히 하며(足兵), 백성들이 믿도록 하는 것이다.(民信之矣)” 라고 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정치의 최우선은 나라살림 즉 경제가 핵심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이 시를 짓고 불과 4개월이 지나지 않아 이방원에게 기습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

●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었던 남효온(南效溫 1454~1492)은 인물됨이 영욕을 초탈하고 지향이 고상하여 세상의 사물에 얽매이지 않았다한다. 그는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과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아래 그의 시(詩) <서강야좌(西江夜坐)> 내용에서 언급한 구절, ‘죽지가(竹枝歌) 노래에 눈물짓는다.’는 뜻은, 그 옛날 중국 순(舜)임금이 남방을 순행하다가 창오야(蒼梧野)에서 세상을 떠나자 두 부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이 대나무에 피눈물을 흘리며 서러워하다가 마침내 상수(湘水)에 빠져 죽었다는 고사에서 연유한다.

그는 아래 시에서, 멀리서 들려오는 죽지가 소리에 쫓겨나 죽은 단종 임금이 생각나 눈물을 훔치며 비감(悲感)함에 젖어있는데, 달빛이 강물의 잔물결에 반짝이며 그를 위로해 주어, 울적한 마음을 달래었다며 끝을 맺고 있다.

4) 밤에 서강에 앉아(西江夜坐) ‘歌’ 운(韻) / 남효온(南效溫 1454~1492)

魚驚明夜火 물고기는 어선의 밝은 불빛에 놀래고

客淚竹枝歌 나그네는 죽지가 소리에 눈물짓누나.

獨坐愴忘返 홀로 앉아 비감함에 돌아갈 줄 모르는데

月圓江水多 둥근 달빛이 강물에 비쳐 윤슬거리네.

[주1] 죽지가(竹枝歌) : 조선시대 중국 악부 죽지사를 모방하여 우리나라의 경치·인정·풍속 따위를 노래한 가사(歌詞). 원래 옛 중국의 민가풍 노래이나 당나라 시인 유우석(劉禹錫)은 주로 이 제목으로 사랑가를 많이 지었고, 이후 송나라 소동파나 우리나라 허난설헌의 죽지가도 유명함.

[주2] 유련망반(流連忘返) : 뱃놀이에 빠져 돌아가는 것을 잊음. 방탕(放蕩)한 놀음에 빠져 본분(本分)을 잊어버림을 비유한 말이다. 맹자(孟子)가 빼어난 경치에 홀렸는지 물 흐름을 따라 내려가 본래의 위치로 돌아오지 못하는 행위(流),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 역시 원래 위치를 잊는 것(連), 짐승을 따라다니며 싫증나는 줄을 모르는 것을 황(荒), 술을 즐기며 싫증나는 줄을 모르는 망(亡)을 모두 경계하는 교훈에서 만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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