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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대 문장가 권헌(權?), 핍박받는 민중의 삶을 생생히 그려내다:내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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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대 문장가 권헌(權?), 핍박받는 민중의 삶을 생생히 그려내다

조선 영조대 문장가 진명(震溟) 권헌(權  1713~1770) 선생의 생생한 증언

고영화(高永和) | 기사입력 2021/07/08 [10:31]

영조대 문장가 권헌(權?), 핍박받는 민중의 삶을 생생히 그려내다

조선 영조대 문장가 진명(震溟) 권헌(權  1713~1770) 선생의 생생한 증언

고영화(高永和) | 입력 : 2021/07/08 [10:31]

<영조대 문장가 권헌(權?), 핍박받는 민중의 삶을 생생히 그려내다> 고영화(高永和)

우리나라 수천 년의 역사에서 피지배층이었던 민중은 배움도 이름도 없다보니 그들의 파란만장한 삶, 핍박받는 삶을 스스로 기록으로 남길 수가 없었다. 그런고로 안타깝게도 우리 선조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민중은 그 존재 자체도 희미했고, 그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과 생생한 삶을 후세에 전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게다가 항상 지배층의 잘못으로 인해 민중이 대신 대가를 치루었던 아픈 역사를 되풀이 하며 견뎌왔다. 그러나 잡초처럼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민중의 삶을, 사실 있는 그대로 기록했던 지식인이 유구한 역사 속에서 종종 등장했다. 이런 깨어있던 수많은 현인(賢人)들 중에, 조선 영조대 문장가 진명(震溟) 권헌(權  1713~1770) 선생의 생생한 증언을 소개하겠다.

○ 진명(震溟) 선생은 당대 뛰어난 문장가(文章家)였으나 평생 미관말직으로 전전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당시 민중의 삶을 목격하고 사실적으로 적은 장편의 고시(古詩), 즉 기사시(記事詩)를 그의 문집 진명집(震溟集)에 남겨 놓아,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당시 민중의 어려운 생활상을 일깨워 주는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그런 그의 애민시(愛民詩) 중에, 처참한 시노비의 삶을 서술한 <시노비(寺奴婢)>, 함경북도 유민(流民)의 비참한 삶을 그린 <관북 백성(關北民)>, 마포나루와 서강(西江) 일대 일꾼들의 거친 삶을 적은 <고인행(雇人行)>과 <여소미행(女掃米行)>은 민중의 거친 삶과 질곡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명작이다.

그의 시편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실제 실존하는 인물을 배경으로 그려냈다는 특징이 있다. 게다가 작품의 시적화자(詩的話者)가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주인공과 교감하여, 독자들에게 감정에 몰입하기 편하게 전달해 준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당대 학자들이 그를 뛰어난 문장가라 칭송했다.

또한 권헌(權?)은 *경사자집(經史子集)에 정통했고 시문(詩文)에 뛰어나 오원(吳瑗 1700~1740), 이천보(李天輔 1698~1761), 남유용(南有容 1698~1773), 황경원(黃景源 1709~1787) 등과 함께 ‘18세기 중반 *8문장(八文章)’이라 불리었고 진명집(震溟集) 10권 5책을 남겼다.

** 참고로 동양에서는 8경(八景) 8대가(八大家) 8문장(八文章) 등등 뛰어난 8가지를 선별하여 칭하는 것을 즐겨했다. 그러다보니 우리나라에도 예로부터 당대 유명한 8명의 문장가가 자주 언급되었다. 동사(東史) 팔문장(八文章), 소북(小北) 팔문장(八文章), 선조대(宣祖代)의 팔문장(八文章), 조선중기 팔문장(八文章), 영조대 팔문장(八文章) 등이 대표적이다.

** 그리고 중국에서 전통적으로 서적을 분류할 때, 내용에 따라 경서, 사서, 제자, 시문집 등으로 나누는데 이를 일컬어 경사자집(經史子集)이라 한다. ‘경(經)’은 경서로 통치사상이나 이념을 담은 책이고 일반적으로 유교 서적으로 대표된다. ‘사(史)’는 역사책인 사서다. 다음으로 ‘자(子)’는 다양한 주장이 담긴 여러 성현(諸子)의 글을 말한다. 자는 경서는 아니지만 볼 만한 문장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집(集)’은 다양한 시문집인데 문학적인 글뿐만 아니라 실용적인 생활 속 문장도 다양하게 담고 있다.

● 그럼 조선후기 학자 권헌(權  1713~1770)의 약력을 잠깐 살펴보자. 그는 충남 서천군이 고향이고 본관 안동(安東), 자는 중약(仲約), 호는 진명(震溟), 조부는 권변(權?), 아버지는 권구(權?), 어머니는 현감(縣監) 김성도(金盛道)의 딸이다. 그의 부인은 연안이씨(延安李氏) 이언신(李彦臣)의 딸이고, 자녀는 2남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권겁(權?), 권상협(權常協)이다. 1735년 7월,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1759년 이후로 현릉(顯陵) 참봉(參奉), 1760년 광흥창(廣興倉) 봉사(奉事), 선릉(宣陵) 직장(直長), 1762년 선공감 감역, 11월 감찰, 12월 형조 좌랑이 되었고 1763년 제용감 판관, 장수현감(長水 縣監)이 되었다가 1766년 겨울, 체직되어 화촌(華村)으로 돌아와 살았다. 1770년 2월 29일, 서천군 한산 화촌강사(華村江舍)에서 졸했다.

○ 1760년대 장수현감(長水 縣監)이었던 권헌(權?)이 학자로서의 오랜 수양과 온축(蘊蓄)을 느끼게 하는 글이 있다. 그가 매화의 정신(본질)을 설명하길, "나는 그림 그릴 줄 모르니 매화(梅花)의 운치(韻致)를 어찌 알겠는가  운치도 알지 못하거늘 본성을 어찌 알겠는가  본질적인 특성은 매화에 있는 것이지만 운치를 느끼는 것은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단순히 대상물로서 대상을 바라본다면 매화와 나는 분명 서로 다르다. 그러나 상리(常理 본질적 의미)로서 대상을 바라본다면 나와 매화는 같지 않을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 운치를 이미 터득했다면 그것은 본질적 이해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본질적 이해에 도달한 자는 매화(梅畵)에 대해서 붓을 잡는 일을 머뭇거리지 아니하고도 바로 그려 낼 수 있는 것이거늘, 하물며 그 가지와 잎을 따지겠는가?"라고 하였다.

위 글에서 알 수 있듯, 권헌(權?)은 자연 사물의 형상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물의 표현에 있어서도 사물에 내재된 의미와 원리(常理)를 이해하여야하고, 작품으로 표현할 때에는 본질적으로 자연사물에 내재된 일정한 원리인 상리(常理)가 잘 드러나야 훌륭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물이 지닌 본질적 의미를 찾아 대상을 객관화하고 이에 가치를 부여해서 면밀히 표현하고자 노력했던 문사(文士)였다.

● 다음 소개하는 한시(漢詩) <여소미행(女掃米行)>과 <고인행(顧人行)>은 조선후기 학자 권헌(權  1713~1770)이 1760년 48세 때, 서울시 마포구 광흥창(廣興倉) 봉사(奉事)로 재임하던 시절에, 서강(西江)나루 일대 창사(倉舍)에서 일하는 일꾼들의 거친 삶을 실제 보고 느낀 바를 적어 놓은 장편의 칠언고시(七言古詩)이다.

○ <여소미행(女掃米行)>과 <고인행(顧人行)>의 배경이 된 서강(西江)나루와 마포(麻浦)나루는 마포구 한강 강안에 위치했고, 광흥창(廣興倉)은 서강(西江) 가까이에 있었다. 마포나루의 강 건너 여의도는 백사장이었다. 이곳 서강은 삼남지방의 곡식과 특산물의 집산지로 유명하였다. 그래서 이 지역은 뱃사람들의 근거지로서 선촌(船村)이 형성되어 있었다. 고지도를 살펴보면 한강 하류 쪽부터 양화진(楊花津), 서강(西江), 마포(麻浦), 용산(龍山) 나루가 차례로 위치했다. 특히 서강(西江)나루는 삼남지방과 서해안으로부터 곡물과 어물이 들어오던 나루터로, 서호(西湖)라고도 하였는데, 나루라기보다는 세곡선의 선착장이었다.

또한 이 일대는 서해바다를 거쳐 한강 하류를 통해 여기까지 지방으로부터 올라오는 세곡과 공물 등을 관리하던 창고(江倉)가 한강변 북편 강가를 따라 위치했다. 양화진(楊花津)에서 마포(麻浦)까지 총융창(?戎倉), 광흥창(廣興倉), 사복창(司僕倉)이 있었고 그 다음 용산까지 군자감(軍資監), 만리창(萬里倉), 별영창(別營倉 훈련도감 급료) 등이 있었다. 그리고 이 지역은 아니지만 가까운 곳에 풍저창(?儲倉 대궐 곡식), 양현고(養賢庫) 등의 창고(倉舍)도 따로 있었다.

권헌(權?)이 근무했던 서강의 광흥창(廣興倉, 관료 녹봉)과 서편 인근 용산 방면 군자감(軍資監, 군수품)의 창사(倉舍) 두 군데를 합쳐서, 그 창고 규모가 거의 1백 칸 정도 되었다고 조선왕조실록에서 전한다.[영조 25년 1749년 09월04일(음)] 창고에는 깔 판자가 있어야 미곡을 쌓아둘 수 있는데, 세월이 지나 썩고 훼손이 되면 판자를 교체해야함에도 불구하고 보수가 늦어져 손실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권헌(權?)의 <여소미행(女掃米行)> 즉, 서강 곡물 창고에서 바닥의 쌀을 빗자루로 쓰는 여인의 삶을 그린 작품을 남길 수가 있었다.

조선시대 마포포구
조선시대 마포포구

 

● 아래 권헌(權?)의 <여소미행(女掃米行)>은 서강(西江) 쌀 창고에서 일하는 40대 여인의 근면한 노동과 거친 생활상, 그리고 불안한 미래를 압축해서 사실적으로 담아낸 칠언고시(七言古詩)로써, ‘職’ ‘緝’ 운(韻)을 사용했다.

1) 쌀 쓰는 여인[女掃米行] / 권헌(權  1713~1770)

西江老?束兩  서강에서 양갈래 머리 묶고 익숙하게 술 빚는 여인은

一生仰身倉中食 일평생 몸과 머리를 쳐들고 창고 안에서 밥을 먹었다.

業工掃米捷供給 자신의 업은 쌀을 쓸어서 재빠르게 공급하는 것이라,

不憂?凶攻筋力 풍년 흉년에 관계없이 근력(筋力)으로 생업 한다네.

長夏倉庭萬斛入 긴 여름마다 창고에 만 섬의 곡식이 들어오니

稻米流地收不得 멥쌀이 땅에 흘러 다녀 거둘 수가 없을 지경이라,

短裳結束擁?立 짧은 치마 꽁꽁 묶고 빗자루 끼고 서서

擧身投隙勤收拾 몸을 틈바구니에 넣고서 꼼꼼히 거두어 모으네.

薄暮戴?集市門 어스름한 저녁에 전대를 들고 장터 입구에 모여

當風揚塵成玉粒 바람에 먼지를 까불어 보내고 옥 같은 흰쌀을 담고나.

年過四十無夫兒 나이 사십이 지났는데도 남편과 아이도 없이

在倉時多少家宿 대부분 창고에서 자고 집에 자는 때가 적다하네.

烏?垢?米粉  검게 쪽진 머리는 쌀가루에 기름때가 범벅이 되었는데

掠?薄粧荊釵禿 엷은 화장에 귀밑머리 다듬고 민둥머리에 가시비녀 꽂고는,

終朝勞極夜深臥 하루 종일 고달프게 일하다가 밤 깊어 잠드니

睡美不復憂饑腹 꿀 잠 속에 주린 배 걱정은 없다하네.

自歎力董日耗乏 스스로 탄식하길, “애써 힘쓰다보니 매일 기력이 쇠잔해져 가니

轉恐資粮苦艱急 어느새 재물과 양식이 사라지고 갑자기 고난이 올까 두렵고요.

日煖花困臥石根 (그리고) 따스한 날에 꽃이 나른할 때 돌부리에 누웠는데

漕舶春謳成哀泣 조운선의 봄노래에 슬퍼 눈물이 난답니다.“

寄語江上負米卒 강가의 쌀 나르는 인부들에게 염려스런 말을 전하노니

汝須自力難久給 “필히 당신들 자력으로 오래 계속하긴 어려우리라.“

○ 위 시편 <여소미행(女掃米行)>의 배경은 쌀을 쓸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곡물 창고가 있었던 서강 북쪽 광흥창(廣興倉)을 배경으로 삼았음이 틀림없다. 바닥에 떨어진 쌀을 쓸어 모아 생계를 이어가던 한 여인의 삶과 암울한 미래를 들어다 볼 수 있다. 참고로 광흥창(廣興倉)은 고려 및 조선시대에 관료들의 녹봉을 담당하던 관청이자 세곡 창고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조선시대 광흥창이 서강(西江)의 북쪽에 있다고 하였는데, 현재 서울 지하철 6호선 광흥창역 1번 출구 옆 공민왕 사당 앞(서울시 마포구 창전동 42-17)에 광흥창 터 표지가 있다.

총 7언 22구로 되어 있는 이 시는 40대 쌀 쓰는 여인이 하찮은 생업이지만, 그래도 흉년 풍년에 관계없이 배 굶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면서, 근면 성실한 그녀의 모습을 기술하였다. 그러다가 이어 그녀의 사적인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나이 사십이 지났는데도 남편과 아이도 없이 대부분 창고에서 자고 집에서 자는 때가 적다.”며 외로운 신세를 언급한다. 그리곤 고달프고 힘들지만 배 굶지 않고 꿀잠을 잘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때그때 소비하고 마는 하루살이 노동자 인생의 불안한 미래를 표현했다.

● 다음은 1760년 무렵, 거상들의 거룻배에서 짐을 내리는 하역꾼들을 소재로 쓴 ‘품팔이꾼’ <고인행(顧人行)>이란 장편시다. 광흥창 봉사를 지낸 그는, 한강의 서강 나루 하역 일꾼들의 근면 성실한 삶을 아주 세밀히 그려 내었다. 이 시는 ‘有’ 운(韻)을 사용한 칠언고시(七言古詩)이다.

2) 고인행[雇人行] 품팔이꾼 / 권헌(權  1713~1770)

西江雇人健於牛 서강(西江) 나루 일꾼들은 소보다 건장하여

兩肩?如土阜 두 어깨 불끈 솟아 흙더미 같네.

每從販船巧財利 매번 장삿배 따라 교묘히 이익을 노리니

巨商捐錢聽奔走 거상이 돈 뿌리면 일 맡아 분주하다.

淸晨比肩集江門 이른 새벽 나란히 강어귀로 나가 모여

較量轉輸立良久 하역량을 헤아리며 한참을 서 있다가

卓午南風不欺潮 정오부터 남풍불고 밀물이 몰려오면

邂逅?艦私傳受 큰 배를 만나서 사사로이 물건을 주고받는다.

終日負米得雇直 종일토록 볏짐을 진 품삯을 받는데

筋力攻食恐在後 근력으로 밥벌이가 행여 뒤질세라

長身?行仰脅息 장신인 몸을 구부정하게 다니며 숨을 헐떡여도

大索擔頭常在手 동앗줄과 등태는 늘 손에 쥐고 있구나.

行年六十不息肩 이 일을 한지 60년에 어깨 쉴 겨를 없었으니

背坼皮皺生塵垢 등짝 갈라지고 살갗은 쭈글쭈글,

終身勤苦得自給 한 평생 노력하여 제 밥 벌면서

但恐任重老無有 늙어 일감 없을까 걱정할 뿐.

鮮羹白飯無飢歲 생선찌개 흰쌀밥에 흉년은 모르고

男自供薪女?酒 사내는 나무하고 아낙은 술 거른다.

道傍流?何爲者 길거리 비렁뱅이는 무얼 하는 자인가?

但能乞飯指其口 기껏 제 입구멍 가리키고 밥 비는 게 능사라지.

[주1] 뇌위(?) : 들쑥날쑥한 험한 산. 여기서는 근육질의 불끈 솟은 어깨를 표현

[주2] 담두(擔頭) : 즉 담자(擔子)를 말하며 질대를 뜻한다. 쌀포대를 질 때 배기지 않게 하기 위해 어깨에 대는 등태를 말한다.

[주3] 유개(流?) : 남에게 구걸하여 먹고사는 사람, 떠돌아다니는 거지

○ 위 시는 서울시 마포구 마포나루와 서강(西江) 나루에서 하역 작업을 하며 살고 있는 품팔이꾼의 일상을 그려낸 매우 희귀한 작품이다. 마포(麻浦)와 서강(西江)은 서울로 오는 전국 각처의 장사꾼 선박들은 물론이고, 세곡선과 조운선이 전국 각지로부터 일년내내 물류가 쉼 없이 오가던 교통의 요지여서 자못 번창했던 곳이다. 그래서인지 이 일대에는 하역 작업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이 상당히 많이 인근에 거주했다고 한다. 이들은 늘 물품과 재화가 끊임없이 거래되던 곳에서 태어나 살다보니 실리의 추구에도 누구보다 뛰어났다. 또한 자신의 노동으로 성실히 살아가는 것이 이들의 생존 방식이므로 “밥벌이가 행여 뒤질세라” “60년에 어깨 쉴 겨를 없었으니 등짝 갈라지고 살갗은 쭈글쭈글”하다. 그래서 이 시편의 마지막에 “길거리 비렁뱅이는 무얼 하는 자인가?” “기껏 제 입구멍 가리키고 밥 비는 게 능사라지.”라며 게으르고 무능력한 이들을 나무라며 시를 마무리했다.

3) 강가 밤에 들려오는 어부의 노래[江上夜漁歌] / 권헌(權  1713~1770)

扁舟滄浪  푸른 물살 위의 조각배 노인이

夜漁淸江上 밤에 맑은 강가에서 고기잡이 하구나.

江天月色連上下 강과 하늘에서 달빛이 아래위로 연이어 비추니

白髮相對影三兩 백발이 두서넛 그림자와 마주하는데

叩舷終夜作柝鳴 밤새 뱃전을 타닥딱 두드리는 소리 울리고

魚駭往往自投網 이따금 물고기가 놀라서 투망에 걸려든다.

寒?細鱗三十貫 그물에 자질구레한 물고기가 30관이나 잡혀

月夜歸家淸夜半 달밤에 집으로 돌아오니 맑은 한밤중이라,

漁歌一曲唱未盡 한 가락 어부의 노래 끊임없이 흥겨운 속에

山影沈沈蘆花亂 산 그림자 침침하고 갈대꽃은 어지러워라.

○ 위 시는 ‘養’ ‘翰’ 운자(韻字)를 사용한 칠언고시(七言古詩)이다. 처음 5언 2구는 강가 밤중에 물고기 잡는 늙은 어부의 모습을 보이는 그대로 그려놓더니, 다음 7언 8구는 물고기 잡는 상황을 서술하다가, 여느 때 보다 많은 물고기를 잡아 일찍 귀가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어부의 즐거운 모습을 그림처럼 그려놓았다. 달은 휘영청 밝게 비추고 산 그림자 짙은데 맑은 바람이 불어 갈대꽃을 어지러이 휘날리는 달밤을 캔버스에 그려놓곤 마침내 끝맺었다. 일찍이 송나라의 소동파(蘇東坡 1036~1101)가 당나라 유명 시인 겸 화가인 왕유(王維 692-761)의 시를 읽고 '시 속에 그림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라고 한 말을 그대로 설명하는 듯하다.

● 장수현감(長水縣監) 권헌(權?)은 54세 되던 1766년 겨울에, 체직되어 충남 서천군 화촌(華村) 강가 집(江舍)으로 돌아와 살았다. 그리고 4년 후, 1770년 2월 29일, 58세를 일기로 졸했다. 그는 약 30년간 지방 외직을 전전하였고 지방수령으로서는 가장 낮은 관직이었던 현감을 마지막으로 공직을 마감했다. 그는 청빈한 학자답게 관직에 최선을 다해서 공무를 수행했으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더 이상 승진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중국의 신선(神仙) 안기생(安期生)처럼 살기를 바랬다. 다음 한시 <서글픈 바람(悲風)>은 그러한 심정을 읊은 오언고시(五言古詩)로써 운자(韻字)는 ‘陌’이다.

4) 서글픈 바람[悲風] / 권헌(權  1713~1770)

悲風吹枯荻 서글픈 바람이 마른 갈대에 불어오니

哀鴻翹羽  슬피 울던 기러기가 날개를 가볍게 펼치네.

奇哉遇?侶 기이하여라, 나의 벗을 우연히 만났으니

附翼惟自適 날개를 부여잡고 오직 유유자적 하리라.

今我在他鄕 지금도 나는 타향에 있지만

永爲東南客 늘 동서남북 나그네였다.

時俗蕩毛褐 당시 풍속은 털옷을 입으며 방탕하였는데

棄我若遺  날 버리는 것은 신발을 잃은 것과 같았다.

國憂諒在玆 나랏일을 자나 깨나 걱정하였으나

酒至不可釋 술자리에서도 그 근심은 풀 수가 없었다.

願言謝世人 바라건대 세상 사람들에게 사례하면서

永?安期跡 영원히 안기생(安期生)의 자취 따르른다.

[주1] 비풍참우(悲風慘雨) : 구슬픈 느낌을 주는 바람과 모진 비라는 뜻으로, 슬프고 비참한 처지나 상황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주2] 애홍(哀鴻) : 「슬피 우는 기러기」라는 뜻으로, 유랑민(流浪民)을 비유하는 말.

[주3] 부익(附翼) : 후환서(後漢書) 광무기(光武紀)에 “지금 여러 사람이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대왕을 따르는 것은 용의 비늘을 더위잡고 봉의 날개에 붙어 그 뜻한 바를 이루려 함입니다.”라고 하였다.

[주4] 염자재자(念玆在玆) : 자나깨나 생각하며 잊지 아니함을 뜻한다. 유사한 표현으로 염염불망(念念不忘)과 비슷한 말임.

[주5] 안기생(安期生) : 고대 중국의 신선 이름. 해변(海邊)에서 약을 팔며 장수(長壽)하여 천세옹(千歲翁)이라 하였다. 진 시황(秦始皇)이 동유(東遊)하였을 때 3주야를 이야기하고 금옥(金玉)을 내렸으나 받지 않고 떠나며 “뒷날 봉래산에서 찾아 달라.”하고 자취를 감추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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