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신문/전용현 기자] 서울과 인천, 경기 등 수도권 아파트에서 발생한 최근 정전은 발전소에서 생산하는 전기가 부족해 발생한 대규모 전력수급 위기라기보다 아파트 단지 내부에 설치된 변압기와 차단기 등 구내 전기설비가 급증한 냉방 수요를 견디지 못하면서 발생한 국지적 사고에 가깝다.
폭염과 열대야가 장기간 이어지면서 밤에도 각 가정이 에어컨을 동시에 가동하고 있다. 평상시에는 문제가 없었던 변압기라도 전력 사용이 특정 시간대에 집중되면 내부 온도가 급격히 상승하고, 노후한 절연재나 접속부가 열을 견디지 못해 손상될 수 있다. 변압기가 고장 나거나 보호장치가 작동하면 해당 변압기와 연결된 동 또는 단지 전체의 전력 공급이 끊어진다.
특히 서울과 인천의 오래된 공동주택 가운데 상당수는 지금처럼 세대마다 에어컨과 건조기, 식기세척기, 인덕션 등 대용량 가전제품을 사용하는 상황을 전제로 설계되지 않았다. 주택은 그대로인데 세대당 전력 사용량은 과거보다 몇 배 늘어난 것이다. 이번 정전 사태는 폭염이라는 기상재난과 노후 공동주택의 전력 인프라 문제가 동시에 드러난 사고라고 볼 수 있다.
전력은 남아 있는데 아파트 안에서 끊겼다
6일 새벽 2시께 서울 도봉구 도봉동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정전이 발생해 7개 동 526세대가 피해를 입었다. 주민들은 폭발음과 비슷한 큰 소리를 들은 뒤 전기가 끊겼다고 증언했다. 도봉구청과 한국전력은 아파트 자체 설비인 변압기 3대 가운데 1대가 고장 난 것으로 보고 복구 작업을 진행했다. 정전 과정에서는 승강기에 주민이 갇혔다가 구조되는 사고도 발생했다.
앞서 경기 수원시 영통구의 한 아파트에서도 변압기 파손으로 980여 세대의 전력 공급이 중단됐다. 서울 영등포구에서는 자체 변압기 불량으로 130여 세대가 정전됐고, 동대문구 전농동의 한 아파트에서도 변압기 과부하로 일부 세대의 전기가 끊겼다.
인천에서는 4일 오후 7시49분께 계양구 효성동의 374세대 아파트에서 정전이 발생했다. 복구에는 약 11시간이 걸렸으며 주민들은 열대야 속에서 냉방기기를 사용하지 못했다. 계양구는 주민들에게 계양여성회관과 효성도서관 등으로 대피하라는 안내 문자를 발송했다.
조사 결과 인천 정전 역시 한전의 외부 송·배전망보다는 아파트 단지 내부 변압기 문제로 파악됐다. 한전은 변압기 교체 작업을 지원했고 5일 오전 7시께 전력 공급이 정상화됐다. 주민들이 들었다는 전신주 주변의 ‘펑’ 소리도 아파트 내부 설비 이상이 외부 배전망으로 확산되는 것을 차단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 사고를 국가 전체의 전력 부족에 따른 순환정전으로 보기는 어렵다. 8월 5일 예상 최대전력수요는 94.4기가와트까지 상승했지만 공급예비율은 12.5% 수준으로 비교적 안정적인 상태였다. 정부도 올여름 최대전력수요를 94.1∼98.8기가와트로 예상하면서 약 107기가와트의 공급 능력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발전소에서 생산하는 전력량에는 여유가 있었지만, 전기를 각 가정으로 나눠 보내는 아파트 내부 설비가 버티지 못한 것이다. 국가 전력망이 고속도로라면 아파트 변압기와 배전반은 단지 안으로 들어가는 진입도로에 해당한다. 고속도로에 여유가 있더라도 진입도로가 좁거나 파손되면 차량이 단지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것과 같은 구조다.
열대야와 노후 설비가 만나면서 정전 위험 증폭
변압기는 고압으로 들어온 전기를 가정에서 사용할 수 있는 낮은 전압으로 바꿔주는 핵심 설비다. 에어컨 사용이 동시에 증가하면 변압기를 통과하는 전류도 커지고 내부에서는 많은 열이 발생한다. 외부 기온까지 35∼40도에 육박하면 변압기가 스스로 열을 방출하는 능력도 떨어진다.
장기간 사용한 변압기는 절연유와 절연지의 성능이 떨어지고 케이블 접속부와 차단기도 열화된다. 이러한 상태에서 정격용량을 넘는 전류가 장시간 흐르면 절연 파괴, 단락, 차단기 손상, 화재로 이어질 수 있다. 경기 고양시의 한 아파트에서는 폭염 속에서 차단기가 녹아 정전이 발생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배전반 화재까지 나타났다.
서울의 오래된 공동주택은 건설 당시 세대당 전력 사용 설계용량이 1킬로와트 안팎에 불과한 사례가 있다. 현재 공동주택의 세대당 전력 사용 수준은 평균 3∼5킬로와트까지 높아진 것으로 분석된다. 아파트를 건설할 당시에는 벽걸이 에어컨이나 선풍기 정도만 예상했지만 지금은 거실과 방마다 에어컨이 설치되고 대형 냉장고, 전기레인지, 건조기 등이 함께 가동된다.
서울과 인천에서 정전이 두드러지는 이유를 해당 지역의 전력망이 특별히 취약하기 때문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수도권은 공동주택과 인구가 밀집해 있고 준공된 지 20∼30년 이상 된 아파트도 많다. 한 개의 변압기에 수백 세대가 연결돼 있어 설비 한 대가 고장 나더라도 피해 규모가 크게 나타난다.
열대야가 이어지는 점도 중요한 원인이다. 과거에는 산업시설과 상업시설이 가동되는 낮 시간대에 전력수요가 집중되고 밤에는 줄어드는 흐름이 뚜렷했다. 지금은 밤에도 기온이 25도 아래로 떨어지지 않아 가정용 냉방 수요가 새벽까지 유지된다. 변압기가 식을 시간을 확보하지 못한 채 장시간 높은 부하에 노출되는 것이다.
서울과 인천 정전은 ‘지역 문제’라기보다 고밀도 도시의 노후 공동주택이 폭염 시대의 전력 소비를 감당하지 못하면서 나타난 공통 현상이다. 아파트가 많은 경기와 부산, 대구, 광주 등 다른 대도시에서도 같은 유형의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
복구 중심 대응에서 사전 진단·용량 증설로 전환해야
아파트 전기설비는 관리 책임의 경계가 분명하다. 한전은 일반적으로 아파트 단지의 수전 지점까지 전기를 공급하지만, 단지 내부 변압기와 배전반, 차단기 등은 공동주택 공용시설로 분류돼 아파트 관리주체가 유지·보수 책임을 맡는다.
정전이 발생하면 주민들은 한전에 책임을 묻기 쉽지만, 사고 원인이 아파트 자체 변압기라면 교체와 증설을 결정해야 하는 주체는 입주자대표회의와 관리사무소다. 변압기 교체에는 상당한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에 장기수선충당금 부족이나 주민 동의 문제로 교체 시기가 미뤄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한전은 폭염기 정전을 줄이기 위해 노후 아파트 변압기 교체 비용 지원과 안전진단을 시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평촌·산본 지역의 노후 공동주택 수전변압기 54개소를 대상으로 절연 상태와 잔여 수명을 진단했다. 이상 판정을 받은 변압기에는 정비·교체를 권고하고, 주의가 필요한 설비는 지속적인 추적 관찰을 요청했다.
한국전력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2019년 전국 아파트에서 발생한 정전은 203건에 달했다. 한전은 아파트 변압기에 센서와 통신장비를 설치해 온도와 부하, 고장 위험을 실시간으로 파악하는 진단 시스템도 개발하고 있다.
정전 예방을 위해서는 여름철을 앞두고 변압기 부하율과 절연 상태, 차단기 열화 여부를 점검해야 한다. 세대당 계약전력과 실제 최대사용량의 차이가 크다면 변압기 용량 증설도 필요하다. 특정 변압기에 부하가 집중되지 않도록 동별 전력 배분 구조를 조정하고, 변압기실의 냉각·환기시설을 개선하는 조치도 요구된다.
지방자치단체와 한전은 노후 공동주택 변압기 교체 지원사업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정전이 발생한 뒤 이동식 발전차와 임시 대피소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고령자와 영유아, 환자가 많은 아파트에서 폭염 중 장시간 정전은 단순한 생활 불편이 아니라 생명과 안전의 문제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서울·인천 정전은 전기를 생산하지 못해 벌어진 사고가 아니다. 충분히 생산된 전기를 각 가정까지 안전하게 전달하는 마지막 단계의 설비가 폭염과 달라진 생활환경을 따라가지 못하면서 발생한 사고다. 기후위기로 39도 안팎의 폭염과 장기 열대야가 일상화되는 상황에서는 공동주택 변압기와 배전반도 도로·수도와 같은 필수 도시 인프라로 관리해야 한다. 정전이 난 뒤 변압기를 교체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노후도와 최대부하를 사전에 측정하고 위험 설비를 선제적으로 교체하는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