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은 기후 문제가 아니라 복지·에너지 문제다강남 아파트와 구룡마을의 냉방 격차…같은 기온에도 생존 조건은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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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폭염에 은행에 몰려 있는 사람들(사진=내외신문 db) |
[내외신문/전용현 기자] 기록적인 폭염이 한국을 비롯해 유럽과 중국, 동남아시아를 동시에 덮치면서 폭염 대응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폭염을 단순한 기상현상이나 개인 건강관리 문제로 보는 데서 벗어나 주거·복지·노동·에너지 정책이 결합된 국가적 재난으로 다뤄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국에서는 경남 양산의 기온이 42.5도까지 올라 현대적 기상관측이 시작된 이후 최고기온을 기록했다. 서울에는 새로 도입된 폭염 대응체계상 첫 ‘폭염중대경보’가 내려졌다. 질병관리청 집계 기준으로 지난 5월 이후 온열질환자가 2천명을 넘어섰고 관련 사망자도 16명에 달한 것으로 외신은 전했다.
그러나 외신이 주목한 것은 단순한 기온이 아니었다. 서울 강남의 냉방시설이 갖춰진 고층 아파트와 인근 구룡마을의 열악한 주거환경을 대비시키며 폭염이 계층에 따라 전혀 다른 재난으로 나타난다고 분석했다. 같은 지역, 같은 기온이라도 한쪽은 에어컨과 단열시설로 더위를 피할 수 있지만 다른 한쪽은 낡은 지붕과 열을 머금은 벽, 높은 전기요금 때문에 밤새 더위를 견뎌야 한다는 것이다.
에어컨 보급률만으로 폭염 대응력을 평가해서는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냉방기기가 있어도 전기요금이 걱정돼 가동하지 못한다면 실질적인 냉방 접근권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폭염 속 냉방은 선택적 소비가 아니라 생명 유지에 필요한 필수 서비스다.
![]() ▲ 유럽의 폭염으로 해수욕장으로 몰린 사람들(사진=who유럽사무소 갈무리) |
유럽은 폭염 경보를 의료·복지·노동정책과 연결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 유럽사무소에 따르면 2026년 여름 일부 프랑스 도시에서는 응급의료 요청이 최대 50% 증가했고, 스페인에서는 며칠 사이 300명 이상의 폭염 관련 초과사망이 추산됐다. 응급진료 후 입원한 환자의 약 60%는 75세 이상 고령자였다.
이에 바르셀로나는 도서관과 시민센터, 공원, 약국 등을 활용한 ‘기후쉼터’를 500곳 이상으로 확대했다. 파리는 고령자와 취약계층 명부를 가동해 전화와 방문으로 안부를 확인하고 있다. 이탈리아 일부 지역은 가장 더운 시간대의 야외 작업을 제한하면서 노동자가 임금 손실을 보지 않도록 휴업 지원을 연계했다.
이는 폭염 경보를 발령하는 데 그치지 않고 누가 위험한지 사전에 파악하고, 어디에서 더위를 피하게 할지, 일을 중단했을 때 소득은 어떻게 보전할지를 함께 설계한 정책이다.
![]() ▲ 상하이 성 정부 홈페이지 |
중국은 지역별로 고온수당 제도를 운영한다. 상하이에서는 야외에서 일하거나 실내온도를 33도 아래로 낮추기 어려운 작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에게 6월부터 9월까지 매월 300위안의 고온수당을 지급하도록 하고 있다.
사업주가 얼음물이나 음료를 제공했다고 해서 수당 지급 의무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야간 노동자도 작업환경이 기준에 해당하면 고온수당을 받을 수 있다. 폭염에 따른 추가 비용과 위험을 노동자 개인에게 전가하지 않겠다는 취지다.
다만 고온수당만으로 생명과 안전을 충분히 보호할 수는 없다. 일정 체감온도 이상에서는 작업시간 단축과 작업중지가 자동으로 이뤄지고, 그 과정에서 노동자의 임금이 보전돼야 한다.
고온다습한 동남아시아에서는 기온뿐 아니라 습도와 복사열을 반영한 습구흑구온도(WBGT)를 작업 기준으로 활용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WBGT가 32도 이상이면 강도 높은 육체노동자에게 매시간 최소 10분, 33도 이상에서는 최소 15분의 그늘 휴식을 제공하도록 했다. 일정 규모 이상의 건설현장과 조선소 등에는 WBGT 측정기도 설치해야 한다. 취약 노동자는 실내 작업으로 전환하고, 물과 얼음팩·분무시설 등도 갖추도록 규정했다.
아세안은 에어컨 확대만으로 폭염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보고 자연환기와 반사 지붕, 고성능 단열재 등을 활용하는 ‘패시브 쿨링’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아세안에너지센터와 유엔환경계획은 이러한 방식으로 냉방에너지 사용량을 20∼50% 줄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 ▲ 쿠팡 화제로 대피소에 있는 가족들 (기사와 관련없음) |
한국의 폭염대책도 살수차 운행과 재난문자 발송, 무더위쉼터 운영 중심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우선 검토해야 할 정책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기초생활수급자와 차상위계층, 독거노인, 중증장애인에게 여름철 전기요금 긴급바우처를 지급해야 한다. 일정 수준의 냉방 전력은 누진제 적용을 완화하고 폭염특보 기간에는 요금 체납으로 인한 단전도 금지할 필요가 있다.
둘째, 옥탑방과 쪽방, 반지하, 비닐하우스, 컨테이너 등 폭염 취약주택에 대한 전수조사를 실시해야 한다. 주민등록 자료뿐 아니라 전력 사용량과 복지·보건 자료를 연계해 위험가구를 선제적으로 찾아야 한다.
셋째, 건설·배달·택배·환경미화·농업 노동자에게 폭염 작업중지권을 보장해야 한다. 작업중지로 임금이 줄어들지 않도록 정부와 사업주가 공동 부담하는 ‘폭염 휴업수당’도 필요하다.
넷째, 무더위쉼터를 밤에도 운영해야 한다. 열대야는 낮의 폭염만큼 고령자와 심혈관·호흡기 질환자에게 위험하다. 주민센터만 지정할 것이 아니라 도서관, 경로당, 종교시설, 학교체육관, 지하철역 등 접근성이 높은 공간을 활용해야 한다.
다섯째, 노후주택의 단열·차열 공사를 공공사업으로 확대해야 한다. 흰색 차열지붕, 외벽 단열, 창호 개선, 차양막, 환기시설 설치는 전력소비를 줄이면서도 실내온도를 낮출 수 있다. 저소득층에게 에어컨만 지원한 뒤 전기요금을 개인이 부담하게 하는 정책보다 지속가능하다.
세계은행은 2050년까지 위험한 폭염에 노출되는 도시 빈곤층이 현재보다 최대 700% 증가할 수 있으며, 그 피해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집중될 것으로 전망했다. 폭염은 모두에게 찾아오지만 피해는 평등하지 않다.
이제 냉방은 개인의 경제력에 따라 구매하는 편의가 아니라 국가가 보장해야 할 생존 인프라다. 폭염으로 인한 죽음을 줄이려면 기상청의 경보를 복지부의 돌봄, 산업·고용당국의 작업중지, 에너지당국의 요금 지원, 국토·주택정책의 단열 개선으로 연결해야 한다.
폭염은 기후 문제에서 시작되지만 사람을 죽음으로 내모는 것은 빈곤과 주거 불평등, 불안정 노동과 에너지 비용이다. 폭염대책의 핵심도 결국 온도를 알리는 것이 아니라 그 온도 속에서 누구도 홀로 버티게 하지 않는 데 있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