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봉암의 사법살인과 미완의 명예회복…정치가 법정을 무기로 삼을 때1956년 대선 216만 표 얻은 뒤 총선 앞두고 체포…이승만 정권의 최대 경쟁자로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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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봉암 선생을 기리는 비석 |
죽산 조봉암 선생의 67주기 추모식에서 독립유공자 서훈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다시 나온 것은 단순히 한 정치인의 훈장을 요구하는 일이 아니다. 국가권력이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수사와 재판을 동원했던 역사를 바로잡고, 대한민국이 스스로 저지른 잘못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라는 요구다.
조봉암은 강화에서 3·1운동을 이끌었고 중국과 러시아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해방 이후에는 제헌 국회의원과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내며 농지개혁을 추진했다. 1956년 대통령선거에서는 유효투표의 20%가 넘는 216만3천여 표를 얻으며 이승만 정권을 위협하는 정치적 경쟁자로 떠올랐다. 그는 무력통일 대신 유엔 감시 아래 민주적 절차에 따른 평화통일을 주장했다.
2011년 대법원 재심에서 간첩 혐의는 무죄로 뒤집혔다. 그러나 형사사법적 명예회복과 국가적·역사적 명예회복은 같은 것이 아니다. 무죄 판결이 “범죄자가 아니었다”는 선언이라면 독립유공자 서훈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었다”는 대한민국의 공식 평가다.
조봉암이 독립운동 공적에도 불구하고 서훈을 받지 못한다면 그의 명예회복은 여전히 절반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박찬대 인천시장이 국회의원 시절 발의한 상훈법 개정안이 서훈 심사 회의록과 기준의 공개를 요구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비공개 심사와 불명확한 기준으로는 국가의 역사적 판단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얻기 어렵다.
![]() ▲ 1심징역 5년에서 사형으로 판결이 뒤집혀(사진=민족문제연구소) |
1심 징역 5년에서 2심 사형으로 뒤집힌 재판
진보당 사건은 1958년 1월 민의원 총선을 불과 넉 달가량 앞두고 시작됐다. 경찰은 진보당 간부들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했고, 조봉암은 동료들의 피해를 우려해 자진 출두했다. 정부는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이 북한의 주장과 유사하며 조봉암이 양이섭을 통해 북한의 지령과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58년 7월 2일 서울지방법원 1심 재판부는 진보당의 평화통일론과 조봉암의 간첩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조봉암에게는 불법 무기 소지 혐의만 적용해 징역 5년을 선고했고, 다른 진보당 간부들에게는 무죄가 선고됐다.
상황은 항소심에서 급변했다. 간첩 혐의의 핵심 증인이었던 양이섭은 특무대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맞은 뒤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조사받았으며, 수사기관의 회유와 강압에 따라 허위 진술했다고 법정에서 폭로했다. 조봉암의 간첩 혐의를 뒷받침했던 사실상 유일한 진술이 무너진 것이다.
그런데도 서울고등법원은 1958년 10월 25일 조봉암과 양이섭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증거의 신빙성이 약해졌는데도 형량은 징역 5년에서 사형으로 오히려 무거워졌다.
국가기록원이 공포한 기록에는 양이섭의 진술 번복과 항소심의 급격한 형량 변화가 상세히 남아 있다.
1959년 2월 27일 대법원은 진보당의 강령과 평화통일론 자체는 위헌이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양이섭과 접촉해 간첩 활동을 했다는 부분은 유죄로 인정해 사형을 확정했다. 조봉암 측이 청구한 재심은 같은 해 7월 30일 기각됐고, 불과 하루 뒤인 7월 31일 사형이 집행됐다.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을 조봉암과 진보당을 정치적으로 제거하기 위한 비인도적 인권유린이자 정치탄압으로 판단했다. 마침내 2011년 1월 2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재심에서 대법관 전원일치로 조봉암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사형 집행 52년 만이었다.
![]() ▲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 |
조봉암에서 이재명까지…정치의 사법화를 경계해야
조봉암 사건을 오늘날 이재명 대통령을 둘러싼 수사·재판과 곧바로 동일시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시대적 조건과 혐의, 재판 절차가 다르며 개별 사건의 유무죄는 증거와 법리에 따라 판단돼야 한다.
그러나 두 시대를 관통하는 질문은 분명하다. 정치적 경쟁자를 선거와 정책으로 상대하지 않고 수사와 기소, 재판으로 제거하려는 유혹을 민주주의가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조봉암은 대통령선거에서 216만 표를 얻고 진보당의 총선 약진이 예상되던 시점에 체포됐다. 수사기관의 강압으로 만들어진 핵심 진술이 법정에서 번복됐는데도 사형이 선고됐으며, 재심 기각 다음 날 형이 집행됐다. 정치권력의 의지가 수사기관을 거쳐 법원의 판결과 사형 집행으로 이어진 대표적인 사법살인이었다.
오늘날 검찰과 법원은 과거와 다른 제도적 독립성과 절차를 갖추고 있다. 그렇더라도 수사·기소·재판이 특정 정치인의 정치생명을 좌우하고 선거 결과까지 사실상 결정하려 한다면 ‘정치의 사법화’ 논란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정치권이 모든 수사와 재판을 정치탄압이라고 몰아붙이는 ‘사법의 정치화’ 역시 경계해야 한다.
조봉암 사건이 남긴 교훈은 죄를 묻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권력의 필요에 따라 혐의를 만들거나 불리한 증거를 외면해서는 안 되며, 수사와 재판이 국민의 정치적 선택을 대신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조봉암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은 한 사람에게 훈장을 추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국가가 과거의 사법살인을 인정하고 다시는 정치적 경쟁자를 법정에서 제거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역사적 선언이다. 2011년 무죄 판결로 법적 누명은 벗겨졌지만 국가의 공식 서훈까지 이뤄져야 비로소 조봉암의 명예회복이 완성됐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