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참교육’, 체벌 옹호가 아니라 무너진 시스템에 대한 응징이다.응징 서사를 비난하기 전에 물어야 할 것, 왜 대중은 제도보다 통쾌한 심판을 먼저 떠올리게 됐나
넷플릭스 시리즈 <참교육>을 둘러싼 논란은 단순하지 않다. 누군가는 이 작품을 체벌 옹호, 청소년 혐오, 여성혐오, 촉법소년 혐오의 집합체라고 비판한다.
물론 그런 우려가 완전히 근거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학교 폭력, 교권 붕괴, 악성 민원, 거짓 진술, 권력형 학부모, 입시 불평등 같은 소재는 현실에서도 민감한 문제이며, 이를 다루는 방식이 거칠 경우 사회적 상처를 다시 건드릴 수 있다.
그러나 <참교육>을 단지 “체벌을 옹호하기 위해 거룩한 척하는 작품”으로만 규정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선적이다. 이 드라마가 왜 등장할 수밖에 없었는지, 왜 많은 시청자들이 이 작품의 과격한 장면에 반응하는지, 그 밑바닥의 사회적 정서를 먼저 들여다봐야 한다.
<참교육>은 체벌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교본이 아니다. 오히려 이 작품은 제도와 절차가 무력해졌다고 느끼는 사회에서 대중이 어떤 방식으로 분노를 상상하는지를 보여주는 장르물에 가깝다.
여기서 핵심은 체벌이 아니라 응징이다. 체벌은 교육자가 학생을 훈육한다는 명분 아래 행사하는 수직적 신체 처벌이다. 반면 응징은 법과 제도, 학교와 행정, 사회적 상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느낄 때 대중이 상상하는 사후적 정의의 형식이다.
<참교육>의 문제적 쾌감은 바로 이 지점에서 나온다. 시청자는 교사가 학생을 때려도 된다는 메시지에 열광한다기보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현실에서 최소한 누군가는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장면에 반응한다.
이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면 <참교육>은 쉽게 오독된다. 드라마 속 교권보호국은 실제 교육제도의 모델이 아니다. 현실 학교에 도입해야 할 정책 설계도도 아니다.
그것은 과장된 장르적 장치다. 형사물이 현실 경찰행정의 세부 매뉴얼이 아니고, 복수극이 실제 사법제도의 대안이 아니듯, <참교육>의 교권보호국 역시 현실 교육정책의 청사진이라기보다 사회적 분노를 극화한 장치에 가깝다.
나화진이라는 인물은 교육학적 해법을 제시하는 교사라기보다, 더는 참을 수 없다는 집단적 감정이 인간의 형상을 입고 등장한 캐릭터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을 현실 교육의 세밀한 처방전처럼 읽고 비판하는 방식은 장르의 문법을 일부러 외면하는 태도일 수 있다.
물론 학교 문제를 폭력으로 해결하는 서사는 위험하다. 그러나 그 위험성을 지적하려면 먼저 왜 이런 서사가 설득력을 얻게 되었는지부터 물어야 한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교권 문제는 추상적 논쟁이 아니다. 교사들은 생활지도 하나에도 민원과 신고를 걱정하고, 학부모는 학교를 신뢰하지 못하며, 학생 인권은 보호되어야 할 가치이면서도 때로는 책임 회피의 언어로 오용된다는 불신이 커졌다.
학교 폭력 사건이 발생해도 피해 학생과 교사가 충분히 보호받지 못한다는 인식도 강하다. 절차는 존재하지만 절차가 피해자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경험이 반복될 때, 대중은 현실의 제도를 건너뛰는 장르적 판타지에 반응한다. <참교육>은 그 불신의 산물이다. 작품이 과격해서 사회가 위험해진 것이 아니라, 사회가 이미 위험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이런 과격한 작품이 등장한 것이다.
비판자들은 <참교육>이 선악을 지나치게 이분법적으로 나눈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장르물은 본래 현실의 복잡성을 압축해 갈등을 선명하게 만든다. 중요한 것은 그 선명함이 어떤 욕망을 대변하느냐다. <참교육>이 보여주는 악역들은 현실의 모든 학생, 모든 학부모, 모든 교사를 대표하지 않는다.
이들은 제도적 허점을 악용하는 극단적 사례의 상징이다. 악성 민원인 학부모, 권력을 믿고 학교를 흔드는 부모, 타인의 인생을 망가뜨리고도 책임지지 않는 학생, 자기 지위를 이용해 학생을 괴롭히는 교사, 입시 경쟁 속에서 아이를 소모품처럼 다루는 부모. 이런 인물들은 현실 전체가 아니라 현실의 병증을 과장해 만든 캐릭터다. 병증을 그렸다고 해서 전체를 혐오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특히 “체벌”이라는 단어로 이 작품 전체를 가두는 것은 논점을 흐린다. <참교육>의 쾌감은 학생을 때리는 데 있지 않다. 힘 있는 자가 책임지지 않는 구조, 교사가 억울하게 무너지는 구조, 피해자가 끝없이 참아야 하는 구조, 절차가 오히려 가해자의 방패가 되는 구조를 향해 응징이 가해지는 데 있다.
물론 그 응징 방식이 거칠고 때로는 폭력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작품이 제도적 정의를 대체하자고 주장해서가 아니라, 제도적 정의가 실패했다고 느끼는 사회적 감각을 극단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참교육>은 교육 드라마라기보다 한국 사회의 분노 판타지에 가깝다.
3화의 거짓 성추행 논란을 둘러싼 비판도 더 복합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미투 운동의 역사적 의미와 성폭력 피해자의 고통은 결코 가볍게 다뤄져서는 안 된다. 동시에 거짓 진술이나 절차적 부실로 한 개인이 무너지는 사례 역시 다뤄서는 안 되는 금기가 될 수 없다.
문제는 어떤 사건을 다루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다루느냐다. 특정 에피소드가 선정적으로 표현되었다는 비판은 가능하다. 그러나 거짓 진술이 남성들의 피해망상을 만족시키기 위한 소재일 뿐이라고만 단정한다면, 또 다른 현실의 피해 가능성을 지워버리는 결과가 된다.
진짜 중요한 것은 성폭력 피해자의 목소리도 보호하고, 무고하거나 절차적으로 부당하게 몰린 사람의 권리도 보호하는 시스템이다. <참교육>은 그 균형 잡힌 시스템이 부재할 때 어떤 파국적 상상이 나오는지를 보여준다.
서이초 사건을 연상시키는 에피소드 역시 마찬가지다. 교사가 죽음으로 내몰리는 현실 앞에서 대중이 요구한 것은 단순한 복수가 아니었다. “왜 아무도 지켜주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이었다. 이 질문은 매우 무겁다. 학교는 교사 개인의 선의만으로 운영될 수 없다.
교권은 교사의 권위주의를 회복하자는 말이 아니라, 교사가 학생을 교육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정성과 제도적 보호를 뜻한다. 학생 인권 역시 교사의 권리를 짓밟기 위한 명분이 아니라, 교육 공동체 안에서 함께 보호되어야 할 가치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 둘이 자주 대립항처럼 소비되었다. <참교육>은 이 왜곡된 대립의 한복판에서 탄생한 드라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을 비판하려면 “왜 교사와 학생의 권리가 서로를 갉아먹는 구도로 느껴지게 되었는가”를 물어야 한다.
<참교육>이 악당 하나를 혼내주는 방식으로 사건을 해결한다는 지적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이 작품이 현실 시스템의 복잡한 개혁안을 제시하지 못해서라기보다, 장르적 카타르시스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시청자는 정책 보고서를 보러 넷플릭스를 켜지 않는다.
드라마는 현실을 압축하고, 과장하고, 때로는 비틀어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현실의 다층성이 훼손될 수 있다. 그러나 장르물의 과장을 이유로 그 안에 담긴 사회적 신호까지 무효화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 이 드라마를 보며 통쾌함을 느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체벌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현실에서 책임이 사라졌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절차”라는 말을 강조해왔다. 절차는 중요하다. 하지만 절차가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할 때, 절차가 책임 회피의 미로가 될 때, 절차가 강한 자에게는 방패가 되고 약한 자에게는 기다림의 감옥이 될 때, 사람들은 절차 밖의 정의를 상상한다. <참교육>의 응징 서사는 바로 이 불신의 산물이다. 그것은 바람직한 해법이 아니라 위험 신호다.
그런데 위험 신호를 두고 “저건 체벌 옹호이니 나쁘다”고만 말하면, 신호가 가리키는 현실의 붕괴는 보이지 않는다. 더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다.
왜 사람들은 교실에서 더 이상 대화와 조정이 가능하다고 믿지 못하게 되었는가. 왜 교사는 보호받지 못한다고 느끼고, 학생은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끼며, 학부모는 학교를 신뢰하지 못하게 되었는가. 왜 교육청과 학교 행정은 갈등의 중재자가 아니라 책임 회피의 기관처럼 보이게 되었는가.
<참교육>이 불편한 작품인 것은 맞다. 그러나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이 작품을 도덕적으로 폐기해버리는 것은 쉬운 결론이다. 오히려 이 드라마는 한국 사회가 교육 문제를 얼마나 오랫동안 방치했는지를 드러내는 거울이다.
거울 속 얼굴이 험하다고 거울을 탓할 수는 없다. 학교가 공동체가 아니라 민원과 신고, 경쟁과 방어, 침묵과 분노의 공간으로 변해가는 동안, 대중은 어느새 ‘좋은 제도’보다 ‘통쾌한 응징’을 먼저 떠올리게 되었다. 이것은 대중의 타락이 아니라 제도의 실패다.
체벌은 돌아와서는 안 된다. 폭력이 교육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응징 서사가 왜 힘을 얻는지는 진지하게 봐야 한다.
응징은 법치의 대안이 될 수 없지만, 법치와 제도가 신뢰를 잃었을 때 등장하는 정서적 증상이다. <참교육>은 그 증상을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래서 불편하고, 그래서 논쟁적이며, 그래서 의미가 있다.
이 작품을 향해 “거룩한 척하지 말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학교 현장의 절망을 너무 오래 외면해온 사회가 이제 와서 드라마의 거친 응징만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가.
학생 인권과 교권을 함께 지키는 시스템을 만들지 못한 사회, 악성 민원과 학교 폭력과 입시 불평등과 절차적 부실을 방치한 사회, 피해자가 보호받는다는 믿음을 주지 못한 사회가 만들어낸 것이 바로 <참교육>이다.
그러므로 <참교육>을 단순한 체벌 옹호물로 몰아붙이는 비판은 충분하지 않다. 이 드라마는 체벌을 말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책임의 실종을 말한다. 폭력을 보여주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제도가 실패한 자리에서 터져 나온 응징의 욕망을 보여준다.
우리가 정말 경계해야 할 것은 드라마 속 나화진의 주먹만이 아니다. 더 무서운 것은 현실의 학교가 그 주먹 같은 판타지를 필요로 할 만큼 신뢰를 잃었다는 사실이다.
참교육은 현실의 해법이 아니다. 그러나 <참교육>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현실은 해법을 요구하고 있다. 그 해법은 체벌의 부활이 아니라 책임의 회복이다.
교사에게는 교육할 권한과 보호를, 학생에게는 존엄과 안전을, 학부모에게는 참여의 통로와 책임을, 행정에는 중재와 판단의 의무를 부여하는 일이다. 그런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할 때, 응징 서사는 자연스럽게 힘을 잃는다. 반대로 그런 시스템이 계속 부재한다면, 우리는 또 다른 <참교육>을 만나게 될 것이다. 더 거칠고, 더 과격하고, 더 불편한 얼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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