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신문/전용욱 기자] 첨단 바이오 산업의 심장에서 또 하나의 균열이 드러났다.
단순한 개인 일탈을 넘어 산업 구조 전반의 긴장감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 전 직원이 영업비밀을 유출한 혐의로 징역형 집행유예를 선고받으면서, 글로벌 CDMO 경쟁의 이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전쟁’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번 사건에서 법원은 피고인의 행위가 명백한 영업비밀 유출이라고 판단했다. 퇴직 직전 회사의 핵심 자료를 개인 노트북으로 옮긴 행위는 의도성과 계획성을 동시에 갖춘 것으로 평가됐다. 다만 실제 경쟁사에서 해당 기술이 활용된 정황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점이 형량에 영향을 미쳤다.
문제의 핵심은 유출된 자료의 성격이다. IT ‘품질보증작업 표준서’, 이른바 SOP는 단순한 문서가 아니라 생산 시스템의 설계도에 가깝다. 의약품을 일정한 품질로 대량 생산하기 위한 공정 알고리즘이 집약된 구조로, CDMO 산업에서는 사실상 기업 경쟁력의 핵심 축으로 작용한다.
바이오 산업의 ‘레시피’… SOP 유출의 파급력
SOP는 흔히 제조업의 ‘레시피’로 비유된다. 동일한 원료를 사용하더라도 어떤 순서와 조건에서 공정을 진행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특히 바이오 의약품은 공정의 미세한 차이가 품질과 안전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 때문에 SOP는 단순한 기술 문서가 아니라 기업이 축적해온 경험, 데이터, 실패의 기록이 응축된 지식 자산이다.
한 번 외부로 유출될 경우 경쟁사가 이를 기반으로 시행착오를 줄이고 빠르게 시장에 진입할 수 있다. 이는 곧 수천억 원 규모의 시간과 비용이 단축되는 효과를 의미한다.
업계에서는 SOP 유출이 실제 활용되지 않았더라도 그 자체로 이미 ‘잠재적 피해’가 발생했다고 본다. 기술은 한 번 외부로 나가면 통제할 수 없는 특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결국 이번 판결은 ‘실제 피해’보다 ‘행위 자체의 위험성’을 어디까지 처벌할 것인가라는 기준을 다시 묻는 사건이기도 하다.
인재 이동인가, 기술 이동인가… 경계 흐려진 산업 현실
이번 사건은 또 다른 구조적 문제를 드러낸다. 바로 인재 이동과 기술 유출의 경계가 점점 흐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글로벌 바이오 산업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으며, 기업 간 인력 이동 역시 활발하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개인의 지식과 기업의 자산이 어디까지 구분되는가이다.
전문 인력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를 새로운 직장으로 가져간다. 이는 시장 경쟁을 활성화하는 긍정적 요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SOP와 같은 명문화된 자료는 개인의 경험을 넘어선 ‘조직의 자산’에 해당한다. 이 경계가 무너질 때 산업 전체의 신뢰 기반이 흔들린다.
특히 최근 국내 바이오 산업은 삼성과 롯데 등 대기업 중심으로 CDMO 경쟁이 격화되고 있다. 글로벌 시장을 겨냥한 생산 능력 확대 경쟁 속에서 기술과 인력은 동시에 전략 자산으로 취급된다. 이번 사건은 그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법원 판단과 산업의 메시지… ‘처벌 수위’ 논쟁
법원은 이번 사건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유출 행위의 중대성을 인정하면서도 실제 사용 여부와 반성 태도를 고려한 판단이다. 그러나 산업계에서는 처벌 수위에 대한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기술 유출은 단순한 절도와는 차원이 다른 범죄다. 물리적 자산이 아닌 ‘지식’을 훔치는 행위이며, 피해 규모 역시 장기간에 걸쳐 누적된다. 특히 국가 전략 산업으로 떠오른 바이오 분야에서는 기술 유출이 곧 국가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
최근 반도체, 디스플레이, 배터리, 바이오 등 첨단 산업 전반에서 유사 사건이 증가하는 흐름도 주목된다. 법원의 판결은 단순히 한 사건을 넘어 산업 전체에 보내는 메시지로 해석된다. 즉, 기술 보호에 대한 사회적 기준을 어디까지 설정할 것인가의 문제다.
이번 사건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기술은 누구의 것인가. 개인의 경험인가, 기업의 자산인가, 아니면 국가의 전략 자원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명확해질 때, 비로소 산업은 안정된 경쟁 질서를 갖출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