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호르무즈 청구서’미국 “석유길 함께 지켜라”…동맹국에 비용 분담 압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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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럼프는 냉전 이후 유지돼 온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관리자’라는 미국의 자기 이미지를 내려놓고, 보다 노골적인 힘의 계산표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직접 거론하며 호르무즈 해협 보호를 위한 군함 파견을 요구했다. 트럼프는 최근 메시지를 통해 한국, 일본, 중국, 프랑스, 영국 등을 언급하며 이 해협을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 각국이 군함을 보내야 한다고 밝혔다.
표면적으로는 국제 해상 교통로를 지키기 위한 협력 요청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미국이 세계 질서를 유지하는 비용을 더 이상 혼자 부담하지 않겠다는 강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이른바 ‘호르무즈 청구서’다.
미국은 오랫동안 세계 해상 교통로의 안전을 책임지는 역할을 해왔다. 특히 중동에서 생산된 석유와 가스가 아시아와 유럽으로 이동하는 길목인 호르무즈 해협은 국제 에너지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 통로 가운데 하나다.
세계 원유 해상 물동량의 약 20%가 이 좁은 해협을 지나간다. 이 해협이 막히거나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면 국제 유가는 즉각 반응하고 에너지 시장 전체가 요동친다.
최근 미국과 이란 사이의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면서 호르무즈 해협은 다시 세계 경제의 핵심 변수로 떠올랐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이 드론과 기뢰, 단거리 미사일로 해협을 공격할 가능성을 언급하며 군사적 대응 필요성을 강조했다.
동시에 그는 이 해협을 통해 에너지를 수입하는 국가들이 직접 나서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미국이 “도와주겠지만 관리의 책임은 공동으로 져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에게 이 요구는 단순한 외교적 발언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인 압박이다. 한국 경제는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매우 높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특히 원유의 상당 부분이 중동에서 들어온다. 최근 자료를 보면 한국이 수입하는 원유의 약 70% 이상이 중동 지역에서 공급된다. 천연가스 역시 상당량이 이 지역에서 들어온다.
![]() ▲ 호르무즈해협 항행지도 |
결국 호르무즈 해협이 흔들리면 한국 경제의 연료 공급 구조 자체가 영향을 받는다. 단순히 석유 가격이 오르는 문제를 넘어 산업 전반의 비용 구조가 흔들릴 수 있다.
한국은 제조업 중심 경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정유, 석유화학, 철강, 자동차, 조선, 전력 생산 등 대부분의 산업이 에너지 가격에 민감하다. 국제 유가가 상승하면 생산비가 올라가고 이는 물가 상승으로 이어진다.
또 하나의 문제는 물류와 환율이다. 에너지 가격이 오르면 무역수지에 부담이 생기고 원·달러 환율이 상승할 가능성이 커진다. 운송 보험료와 해상 운임이 오르면 수출입 기업들도 부담을 안게 된다.
결국 중동에서 벌어지는 군사적 긴장은 한국의 물가, 환율, 기업 수익성에 동시에 영향을 미치는 경제 변수로 작용한다.
하지만 파병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쉽지 않다. 군함을 보내는 순간 그것은 정치적 메시지가 된다.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면 한미동맹을 강화하는 신호가 될 수 있지만, 동시에 이란과의 외교 관계에는 부담이 될 수 있다.
![]() ▲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장기화될 경우 세계 에너지 공급망에 상당한 충격이 발생할 수 있다 |
한국은 중동 지역에서 단순히 에너지를 수입하는 국가가 아니다. 건설, 플랜트, 조선, 인프라 사업 등 다양한 경제 협력을 이어가고 있다. 군사적 참여는 이 지역 국가들에게 한국의 외교적 입장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행동이 될 수 있다.
한국은 이미 비슷한 상황을 경험한 적이 있다. 2020년 미국과 이란 사이의 긴장이 높아졌을 때 미국은 동맹국들에게 호르무즈 해협 보호를 위한 연합체 참여를 요구했다.
당시 한국 정부는 미국이 주도하는 연합에 직접 참여하는 대신 아덴만에서 활동하던 청해부대의 작전 범위를 호르무즈 해협까지 확대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이른바 독자 파병이었다.
이 방식은 미국의 요구를 완전히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중동 국가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절충안이었다. 외교적 균형 전략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당시보다 더 복잡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한국을 지목했고 국제 에너지 시장의 불안정성도 더 커진 상태다.
더 중요한 점은 이번 요구가 단순한 군사 요청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국제 질서 변화의 신호일 가능성이 크다. 미국 정치에서는 오래전부터 “왜 미국이 세계 질서를 지키는 비용을 혼자 부담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되어 왔다. 트럼프의 발언은 바로 그 질문을 동맹국들에게 던지는 것이다.
그 의미는 분명하다. 세계 경제에서 혜택을 받는 국가들이라면 안보 비용도 함께 부담해야 한다는 논리다. 에너지 수입국들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혜택을 얻고 있다면 그 해협을 지키는 일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국에게 이 논리는 매우 복잡한 문제를 던진다. 한국은 미국과 강력한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동시에 중동 지역과도 긴밀한 경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순간 다른 쪽에서 부담이 생길 수 있는 구조다.
결국 이번 파병 논쟁은 군사 문제를 넘어 한국 경제 구조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특정 지역의 에너지에 크게 의존하고 있고 그 에너지 운송로 역시 제한된 해협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 한국이 고민해야 할 문제는 명확하다.
에너지 수입 구조를 다변화하고 재생에너지와 대체 에너지 비중을 높여 중동 의존도를 줄여야 한다. 동시에 국제 해상 안보 문제에서 한국의 역할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에 대한 전략적 판단도 필요하다.
트럼프의 ‘호르무즈 청구서’는 단순한 외교적 압박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 경제의 구조적 약점과 외교 전략의 어려움을 동시에 드러내는 사건이다. 군함 한 척을 보내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넘어 한국이 앞으로 어떤 에너지 전략과 외교 전략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던져지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단기적 대응이 아니라 장기적 전략이다. 세계 에너지 질서가 흔들리는 시대에 한국이 어떤 위치에 서 있을 것인지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