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람교회-서창희 목사] 불은 심판이었고, 비는 성취였다- 갈멜산에서 다시 시작된 언약‘언약 갱신’과 ‘기도의 통로’: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는 순서
서창희 목사는 갈멜산의 ‘불의 대결’과 ‘물의 대결’을 한 묶음으로 보며, 그 장면이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을 떠난 인생을 다시 약속 안으로 데려오시는지, 그리고 그 약속을 어떤 통로로 성취하시는지까지 보여 준다고 강조했다.
출발점은 단호했다. “나는 하나님을 떠나 있다.” 하나님을 떠난 삶은 악을 떠나지 못한 삶이며, 동시에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두 개의 성소’를 세워 둔 혼합의 상태다. 하나님을 의지했다가 사람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방식으로 살려다 세상의 방식으로 돌아서는 머뭇거림이 인생 한가운데 놓여 있다는 것이다.
서창희 목사는 갈멜산 자체가 그런 혼합을 드러내는 무대라고 설명했다. 갈멜산은 지중해와 맞닿아 있고, 엘리야가 사환에게 “바다 쪽을 보라”고 했을 때 실제로 구름을 관찰할 수 있는 자리다. 동시에 갈멜산은 하나님 신앙의 성소와 바알 신앙의 성소가 함께 존재해 온 장소였다고 설교는 묘사한다. 그래서 그곳은 단지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이 맞붙은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있어야 할 자리 안에 다른 우상과 죄가 함께 들어앉아 있는 인간의 내면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바로 그 지점에 찾아오셔서 결판을 내신다.
핵심은 불이다. 서창희 목사는 불이 ‘백성’에게 떨어진 것이 아니라 ‘재단’ 위에 떨어졌다는 점을 붙잡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심판의 목적이 파괴가 아니라 회복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이 백성을 치기 위해 불을 내리신 것이 아니라, 재단을 태워 정결하게 하시고 백성을 살려 언약 안으로 다시 불러들이신다는 해석이다. 겉으로는 심판인데, 실제로는 살아남게 하는 심판. 그래서 그는 이 불의 응답을 “커버넌트 리뉴얼”, 곧 언약 갱신으로 규정했다.
언약 갱신이란 사람이 정신 차리고 돌아오는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찾아오셔서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 다시 기억하게 하시는 사건이라고 했다. 회개가 선행 조건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아합은 여전히 악했고, 백성도 혼합된 상태였지만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셨다. 언약 갱신의 주도권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은 “너의 주인이 하나님이잖아”라고 외부에서 개입하시며, 그 개입이 때로는 삶을 ‘뒤집어엎는’ 방식으로 나타난다고 설교는 말했다. 죽을 뻔한 사건, 정신이 번쩍 드는 사고, 말도 안 되는 실수 같은 것들이 단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언약 밖으로 흘러가려는 인생을 붙잡아 다시 약속 안으로 불러들이는 ‘주권적 호출’이 될 수 있다는 적용으로 이어졌다.
서창희 목사는 이 패턴이 출애굽기의 금송아지 사건과도 동일하다고 연결했다. 언약을 받는 자리에서 언약이 깨지고, 그 순간에 “여호와의 편에 설 자가 누구냐”라는 결단이 요구되며, 그 뒤에 하나님이 다시 언약을 갱신하시는 흐름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언약이 확인되는 자리에서 ‘먹고 마심’이 등장한다는 성경의 징표도 끌어왔다. 언약 백성은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시는 자, 즉 약속의 식탁에 초대된 자라는 의미다. 그래서 엘리야가 아합에게 “올라가 먹고 마시라”고 말한 장면은 단순한 식사 권유가 아니라 ‘언약 백성의 신분 회복’으로 읽힌다고 했다.
불의 의미를 정리한 뒤, 서창희 목사는 물의 의미로 넘어갔다. 하나님이 원래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비였고, 불은 비를 위한 순서였다. 그리고 그 약속이 성취되는 통로는 ‘기도’라고 못 박았다.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에서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사환을 보내 바다를 보게 하고, 여섯 번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듣고도 일곱 번째까지 기도하는 장면은, 하나님의 뜻이 기도를 통해 성취되는 구조를 보여 준다고 했다. 구름이 비의 원인처럼 보이지만, 성경은 구름 뒤의 ‘일곱 번째 기도’를 실제 동력으로 연결시킨다는 설명이다. 세상은 엔진을 구름에서 찾지만, 믿음은 엔진을 기도에서 찾는다는 말이다.
서창희 목사는 이를 현실의 언어로 바꿔 말했다. 성적을 올리려면 학원을 보내고, 매출을 올리려면 마케팅을 한다. 문제는 그 수단이 전부가 되는 순간이다. 수단을 엔진으로 착각하면 결국 지속력이 무너진다. 오늘 설교가 말하는 것은 학원이나 마케팅을 부정하라는 뜻이 아니라, ‘구름 뒤의 동력’을 보라는 뜻이다. 신자에게만 주어진 독특한 통로, 행동이 결과로 이어지게 하시는 하나님이 지정한 채널이 기도라는 것이다. 또한 서창희 목사는 기도에 상처가 있는 사람들의 심리도 정면으로 다뤘다. “얼마나 기도해야 들어주십니까”라는 질문, “열심히 기도했는데도 안 되면 하나님이 싫어질까 봐 아예 기도하지 않는다”는 두려움. 그는 이 두려움의 뿌리가 기도를 ‘내 뜻을 관철시키는 수단’으로 오해하는 데 있다고 진단했다. 기도는 개척이 아니라 참여다. 하나님은 이미 선하고 온전한 뜻을 세우셨고, 기도는 그 뜻이 성취되는 과정에 나를 참여시키는 방식이다. 그래서 어떤 기도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려질 때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약속을 붙들어야 한다고 했다. 기도 제목이 바뀌고 조정되는 과정까지 포함해, 하나님이 뜻을 이루시는 여정에 내가 들어가게 된다는 의미다.
그 다음 강조점은 분량이다. 서창희 목사는 기도라는 개념에는 언제나 ‘양’이 따라붙는다고 말했다. 운동을 말할 때 “푸시업 하세요”가 아니라 “몇 개, 몇 세트”를 말하듯, “기도합니다”라는 말만으로는 실질이 없고, 기도의 분량을 점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시간을 고정하기보다 분량을 정해 늘려 가는 훈련을 제안했다. 5분에서 10분으로, 10분에서 20분으로, 그리고 작정기도나 금식기도 같은 ‘기간과 분량’이 동반되는 결단의 구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기도는 마음만 먹는 선언이 아니라 삶의 리듬을 재편하는 분량의 결단이라는 메시지다.
마지막은 십자가와 성령으로 닫혔다. 갈멜산에서 재단 위로 떨어진 불은 결국 십자가로 이어진다. 하나님이 백성을 태우지 않고 재단을 태우신 것처럼, 최종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단이 되어 불을 받으셨고, 그 결과 약속의 백성에게는 성령이 부어졌다는 연결이다. 엘리야 시대에는 비가 약속의 성취였지만, 그리스도 이후에는 성령이 성취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성령세례는 거듭남의 전환이며, 성령충만은 그 안에서 적극적으로 순종하며 기도의 통로에 참여하는 현재진행형의 삶이라고 정리했다.
서창희 목사는 결론에서 기도의 인식을 뒤집었다. “열심히 기도했는데도 안 들어주시면 어떡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기도를 통해 성취된다면, 내가 기도할 때 결국 선하신 뜻만 나타날 것”이라는 확신으로 나아가라는 것이다. 불은 심판이었지만 살리는 심판이었고, 비는 성취였지만 기도로 통과하는 성취였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순서이며, 그 순서 안으로 신자를 다시 초대하는 이야기라고 설교는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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