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프랭클 박사의 ‘의미치료’는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풀뿌리 언론인들에게 유난히 와 닿는다.
정권이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 언론 환경 속에서, 왜 많은 지역언론과 독립언론, 뉴미디어들이 점점 더 지치고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프랭클 박사는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인간이 마지막까지 지켜낼 수 있는 단 하나의 자유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태도를 선택할 자유’였다.
그는 인간이 고통 속에서 무너지는 이유가 고통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고통 속에서 스스로의 의미를 잃어버릴 때라고 말했다.
지금 한국의 풀뿌리 언론들이 느끼는 절망도 비슷한 결이다.
내란이라는 거대한 파도처럼 몰아치는 시대의 혼란 속에서, 추위와 배고픔 같은 물리적 고통보다 더 아픈 것은 목표를 잃어버리는 무의미다.
홍보수석은 지방언론을 만난다고 하면서 윤석열의 앞잡이 노릇이나 하는 거대 언론사가 회장으로 있는 사람을 만나서 이번정부가 많은 지원을 하겠다고 하고 6개월동안 풀뿌리언론과 뉴미디어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도 진행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언론개혁을 위한 모든과제가 이제는 올스톱 돼 있다. 물론 민주당 자체의 문제보다는 그걸 풀어가는 한-두사람의 욕심에 의해서지만
지금 뉴미디어와 풀뿌리언론들은 왜 헤엄쳐야 하는지, 왜 버텨야 하는지 이유를 잃는 순간, 언론은 가장 먼저 침몰하게 된다.
이 생각은 민주주의와 독립을 위해 싸웠던 선조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헌법 조문이나 제도만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앞에서 싸운 사람들의 희생과 의미가 살아 있어야만 유지된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현실은 어떤가.
독립운동가 후손들, 민주화 세력, 그리고 1년도 되지 않은 윤석열 내란 국면에서 민주헌정질서를 지키려 했던 사람들조차 자신이 헤엄칠 이유를 잃어가고 있다.
민주주의를 위해 감옥에 가고, 고문을 견디고, 생계를 잃고도 버텨온 수많은 사람들은 이제 나이가 들어 병들고 가난해져 있다.
그들에게 국가는 “민주주의를 위해 애써주셨다”는 최소한의 예우조차 하지 않고 있다.
민주주의는 남았지만, 민주주의를 지켜낸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다.
이 절망의 풍경 속에서 “과거는 잊자”, “부역자들과도 잘 지내자”는 말은 화해의 언어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의미를 지워버리는 말처럼 들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민주화 세력의 분노는 단순한 정치적 감정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의미를 지키기 위한 절규다.
특히 독재 시절 국가폭력에 협조했던 언론과 손을 잡거나, 극우 성향 언론사에 고개 숙여 방문하는 장면은 민주주의를 지켜온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다.
“우리가 만든 민주주의가 이렇게 쉽게 취급돼도 되는가”라는 절망이 쌓여간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일이 특정 정권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 문재인 정부, 그리고 이재명 정부까지도 중앙 기득권 언론 중심의 구조를 완전히 넘어서지 못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민주주의를 실제로 지키는 언론은 풀뿌리 언론, 지역언론, 독립언론, 인터넷 뉴미디어들이다.
이들은 대기업도, 정권도 두려워하지 않고 권력을 감시하며 시민이 알아야 할 진실을 기록한다.
그럼에도 이 언론들은 생존조차 위태롭다.
포털 검색제휴나 기사 노출 시스템은 사실상 언론의 생명줄인데, 심사는 6개월이 지나도 답이 없고, 기준도 불투명하다.
무엇을 보완해야 하는지, 왜 탈락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언론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언론을 지치게 만들어 포기하게 만드는 구조다.
그래서 한국인터넷기자협회는 ‘12·3 민주헌정수호특별상’을 만들었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운 시민과 언론을 잊지 않기 위한 장치다.
민주주의는 제도가 아니라 기억과 의미로 유지된다.
이 상은 그 의미를 보존하기 위한 작은 시작이다.
풀뿌리 언론이 살아야 민주주의가 숨을 쉰다.
민주주의의 의미를 지켜낸 사람들을 기억해야 권력이 길을 잃지 않는다.
이제는 미디어바우처 제도, 언론 제휴 시스템, 광고주협회 중심의 언론 평가 구조 등 전면적인 제도 개혁이 필요하다.
언론이 헤엄칠 이유를 되찾아야 권력에 눈치 안보는 풀뿌리언론이 살아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