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철학자 에드먼드 버크가 말한 보수는 본래 바람이 무너뜨릴까 담장을 더 높이는 일이 아니라, 오래된 담장에 금이 가기 전에 흙을 떠다 발라 균열을 메우는 일이었다.
변화의 폭을 두려워하지 않되, 삶을 지탱하는 질서가 흔들리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손길이었다.
그러나 오늘 한국 정치에서 ‘보수’라는 이름은 냉기 어린 어둠을 먼저 떠올리게 한다. 버크가 말한 그 따뜻하고 느린 손길 대신, 날 선 목소리와 벽을 쌓는 기세만이 정치의 전면을 가득 채운다.
그럼에도 지역 골목을 천천히 걸어본 사람이라면, 보수가 본래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낡은 은행잎이 바람에 흩날리는 오후, 가게 문을 닫으며 노인에게 머리를 숙이는 상인, 신용을 빌려주고 또 빌려주며 평생 한 자리를 지킨 사업자, 공동체의 작은 균열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차리고 자기 몫의 조용한 일로 고쳐놓는 생활인들.
그들의 보수는 당의 현란한 구호 속에 섞여 사라져버린, 오래된 예의와 책임의 결이다.
진보의 얼굴은 또 다르다.
그들은 더 멀리 본다. 오늘의 상처를 치유하지 않으면 내일의 해가 떠오르지 못한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체게바라가 말한 ‘상처 난 사회를 고치는 일’에 본능처럼 끌리고, 자기 한몸의 안락함보다 공공의 미래를 더 크게 떠올린다.
벽에 균열이 생기면 그 균열 너머의 세상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들. 아픈 사람을 보면 왜 아픈지 묻고, 억울한 사람을 보면 왜 억울한 구조가 생겼는지 묻는 사람들.
오래된 이념의 지도는 두 진영을 서로 멀리 떨어뜨려 놓았지만, 그 지도엔 이미 닳아 없어진 길과 편견이 그려져 있다. 보수를 개인의 이익으로만, 진보를 불안정한 이상주의로만 읽는 건 낡고 흐릿한 활자책을 읽는 일에 가깝다.
현실의 보수는 공동체의 허리춤을 묵묵히 지탱해온 생활의 기술이고, 현실의 진보는 마음의 동여맴을 풀고 공동의 미래를 만드는 상상력이다. 이 오래된 오해를 털어내야 정치도 비로소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
사회복지철학은 가족을 넘어서 국가를 넘어서, 결국 지구라는 집 전체를 바라보는 마음이다. 그 집이 무너지면 누구의 방부터 먼저 무너지는지는 아무 의미가 없다. 이 관점에서 보면, 연대와 공공성을 앞에 두는 진보는 분명 복지철학의 중심에 가깝다.
그러나 보수 역시 반드시 필요하다. 무너지는 기둥을 손으로 받치고, 오래된 경첩을 기름칠하는 기술은 보수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한쪽만 있어선 집이 오래 버티지 못한다.
오늘의 정치가 혼란스러운 이유는 두 얼굴 모두 정당의 깃발 아래서 왜곡되고 뒤틀렸기 때문이다. 보수는 수구로 빠르게 굳어버렸고, 진보는 조롱과 비난 속에서 과장되기도, 지워지기도 했다.
정당이 만들어낸 거친 이미지가 생활 속 보수와 생활 속 진보의 원래 모습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정치가 먼저 버렸지만, 사회는 여전히 두 성향의 원래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
정치란 거대한 이념의 전쟁이 아니라, 생의 먼지를 묵묵히 털고 질서를 다듬어가는 일이라는 것. 그래서 보수의 묵은 지혜와 진보의 뜨거운 열정은 원래 한 사회의 두 날개였다.
정치가 제 얼굴을 잃어갈수록 우리는 그 두 날개의 본래 결을 더 간절히 떠올린다. 다시금, 오래된 이름 속에서 잊힌 얼굴을 찾아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