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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성군인가, 폭군인가?

― 승자의 기록에 가려진 개혁 군주의 진면목

― 대동법과 중립 외교, 조선의 생존 전략이었던 이유

― 폐위된 왕의 초라한 무덤이 남긴 역사적 질문

전용현 기자 | 기사입력 2025/10/08 [11:13]

광해군은 성군인가, 폭군인가?

― 승자의 기록에 가려진 개혁 군주의 진면목

― 대동법과 중립 외교, 조선의 생존 전략이었던 이유

― 폐위된 왕의 초라한 무덤이 남긴 역사적 질문

전용현 기자 | 입력 : 2025/10/08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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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해군 묘지(사진=나무트리)    

 

조선 제15대 왕 광해군은 오랫동안 ‘폭군’으로 불려왔다. 그러나 그의 정치와 외교, 그리고 개혁의 궤적을 따라가 보면 그 평가는 단순한 흑백 논리로는 규정할 수 없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이후 무너진 국가를 재건하고, 명과 후금 사이의 현실적 외교로 조선의 생존을 도모한 실리형 군주였다.

 

그러나 그러한 개혁과 중립 외교가 기득권층인 서인 세력의 이해관계와 충돌하며 결국 반정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의 초라한 무덤은 역사의 왜곡된 기억을 상징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를 새로운 시각으로 읽어야 한다.

 

광해군의 무덤은 남양주시 능내리에 있다. 주변 석물이 깨지고 이끼가 낀 채로 방치된 그곳은 조선 왕릉의 위용이라기보다는 한 유배자의 흔적에 가깝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그는 제주도 위리안치형 유배지에서 쓸쓸히 생을 마쳤다.

 

시신은 열흘 뒤에야 수습되었고, 그는 끝내 ‘왕’이 아닌 ‘광해군’으로 기록되었다. 심지어 그의 시대 기록은 ‘실록’이 아닌 ‘일기’로 남아, 연산군과 함께 왕으로 인정받지 못한 두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 그마저도 인조 정권이 대대적으로 수정하여 임진왜란 당시의 공적을 지우고, ‘혼군’으로 왜곡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광해군을 폐위한 인조 정권은 명나라에 대한 ‘배은망덕’과 내정의 ‘사치와 폭정’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국제정세를 보면, 그가 펼친 중립 외교는 지극히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당시 명은 쇠퇴하고 후금(훗날 청)은 급부상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명의 파병 요구를 미루고 최소한의 지원만 보냈으며, 강홍립을 통해 외교적 절충을 시도했다. 그는 조선이 전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신중히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사대주의에 젖은 사대부들은 이를 ‘오랑캐에 굴복한 배신’으로 몰았다.

 

명의 ‘제조지은’을 강조하며 관우 사당을 짓고 명 황제에게 충성의 제사를 올리는 분위기 속에서, 광해군의 실리 외교는 시대를 앞선 외교 전략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고립의 시작이었다.

 

광해군의 외교는 단순한 회피가 아니었다. 그는 화기도감을 설치해 ‘불기륜포’ 같은 첨단 화기를 대량 제작하고, 후금의 철기병 전술을 분석하여 전차 제작까지 추진했다.

 

이는 후금과의 전면전을 피하면서도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한 실질적 조치였다. 외교적 유연성과 군사적 대비라는 두 축을 병행한 광해군의 국방 전략은, 그가 단순히 실리만 추구한 것이 아니라 국가 생존을 위한 철저한 계산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내정에서도 그는 개혁군주였다.

 

임진왜란으로 잿더미가 된 조선을 다시 세우기 위해 그는 궁궐 중건을 추진했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복구하고 경희궁을 새로 지은 것은 전후 복구와 왕권 회복의 상징이었다.

 

물론 민가 철거와 노역 동원이 있었다는 점에서 비판이 따르지만, 당시 왕이 임시 건물에서 즉위할 정도로 황폐했던 현실을 고려하면 이는 단순한 사치로 보기 어렵다. 그는 또한 ‘용비어천가’를 다시 간행하고 ‘삼강행실도’를 편찬해 윤리와 충절을 강조하며 민심을 수습했다.

 

그의 가장 혁신적인 정책은 대동법 시행이었다. 율곡 이이가 제안했던 대공수미법을 계승해, 공물을 토지 기준으로 부과하고 쌀로 납부하게 한 제도였다.

 

이는 가난한 농민을 구제하고 세금 구조를 합리화한 획기적 개혁이었다. 하지만 세금 부담이 늘어난 지주와 양반 계층의 반발은 거셌다. 광해군은 그럼에도 경기도에서 시범 시행을 강행했고, 이는 후일 전국 확대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 개혁이 서인 세력의 경제적 이해를 건드렸고, 결국 그들은 ‘영창대군 모해 사건’과 ‘인목대비 유폐’ 문제를 빌미로 반정을 일으켰다.

 

광해군의 몰락은 단지 권력의 교체가 아니었다. 그것은 개혁과 현실 정치, 그리고 기득권의 반발이 충돌한 결과였다. 인조 정권은 대동법을 폐지하고, 명에 대한 사대를 강화했으며, 후금과의 외교를 망쳐 결국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불러왔다.

 

광해군이 피하려 했던 비극이 현실이 된 것이다. 역사는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실리 외교가 옳았음을 증명했다.

 

 

오늘날 우리는 광해군을 폭군이라 부를 것인가, 아니면 시대를 앞선 개혁군주로 재평가할 것인가. 그의 초라한 무덤은 여전히 남양주의 언덕 위에 있지만, 그가 남긴 흔적은 조선이 근대국가로 나아가는 첫걸음이었다. 외세에 휘둘리지 않으려 했던 중립 외교, 백성을 구제하려 했던 대동법, 국방력 강화를 위한 화기도감 설치는 모두 조선의 생존과 자주를 위한 정책이었다.

 

승자의 기록에 의해 지워진 왕이 아니라, 역사의 정의를 통해 되살아나는 ‘성군’의 초상—그것이 오늘 우리가 광해군을 다시 불러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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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포털 지원센터 대표
내외신문 광주전남 본부장
월간 기후변화 기자
사단법인 환경과미래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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