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만든 자유무역 질서가 붕괴한다면 세계는 지난 70여 년간 우리가 익숙해온 글로벌화 체제와는 전혀 다른 국면으로 들어서게 된다.
피터 자이한의 저서 『각자도생의 세계와 지정학』은 바로 이 전환점을 심층적으로 분석하며, 미국 없는 세계에서 국가들이 어떤 생존 전략을 펼쳐야 하는지 경고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압도적인 해군력을 바탕으로 세계 바다의 안전을 보장했다. 해적이 득실거리던 바다에서 무역이 가능했던 것은 오직 미국 해군이 전 세계 해상 무역로를 순찰했기 때문이다.
한국, 독일, 일본, 대만 같은 국가들은 이 덕분에 수출 중심 경제를 성장시킬 수 있었다. 브레튼우즈 체제에서 달러는 기축통화가 되었고, 사우디아라비아와의 석유 결제 협약을 통해 페트로달러 체제가 완성됐다.
이 시스템은 미국이 막대한 달러를 발행하면서도 인플레이션을 억제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동맹국들은 달러를 받아 미국 국채를 매입하며 질서를 유지했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후 미국은 더 이상 동맹국을 지켜줄 이유가 줄어들었고, 자유무역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중국과 같은 경쟁국을 키우는 결과로 이어졌다.
결국 미국은 언젠가 이 체제를 중단할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특히 미국은 현재 반도체 산업 자급을 위해 삼성전자와 TSMC 등 해외 기업의 공장 이전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이는 반도체 자급이 완성되는 순간 자유무역 시스템을 ‘셧다운’할 준비를 의미한다.
이미 셰일 혁명으로 석유와 가스에서 자급이 가능해진 미국은 에너지와 식량 모두에서 독립을 달성한 유일한 국가이며, 이민자 유입 덕에 인구 구조 또한 비교적 건강하다. 미국이 자유무역을 포기한다면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국가는 독일, 중국, 한국, 대만과 같은 수출 의존 국가들이다.
독일은 세계 최고 수준의 수출 의존도를 가진 나라로, 무역이 붕괴하면 경제 구조 자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러시아와의 국경, 군사적 공백, 에너지 의존도 문제까지 더해져 안보와 경제 모두 위태롭다. 중국은 세계 최대의 수출국이자 ‘세계의 공장’이지만 에너지와 식량 자급이 불가능하고, 급격한 고령화로 내수 시장의 붕괴 위험까지 안고 있다.
한국과 대만 역시 반도체 제조업 중심의 수출 구조에 의존하고 있으나 자원 기반이 취약해 무역 질서가 흔들릴 경우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다. 반면 이 새로운 시대에 유리한 국가들도 있다.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유럽에서는 프랑스가 농업 강국이자 내수 기반을 갖춘 국가로 평가받는다. 지리적으로도 사방이 방어적인 구조이며, 독자적 군사 역량까지 유지해왔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주목된다. 일본은 훈련된 해군력과 원거리 작전 능력을 보유하고 있어, 미국이 해상 질서를 철수할 경우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해상 질서를 주도할 잠재력이 크다. 중동에서는 터키가 부상할 수 있다.
과거 오스만 제국 시절 육상 무역의 중심지였던 터키는 해상 무역이 위축될 경우 다시 중개 무역의 허브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인구 구조 또한 각국의 미래를 좌우할 핵심 변수다. 한국과 중국은 고령화와 저출산으로 역삼각형 인구 구조에 진입했으며, 이는 생산 인구 감소와 소비 축소, 부양 부담 가중으로 이어진다.
반대로 미국은 이민을 통해 인구 구조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으며, 아르헨티나는 농업 강국으로서 비교적 건강한 인구 구조를 갖추고 있다. 결국 각자도생의 시대란 에너지와 식량 자급, 내수 기반, 인구 구조라는 세 가지 조건이 국가의 생존을 결정하는 시대다.
한국은 지난 50년간 수출 중심 성장 모델로 경제적 성취를 이뤘지만, 이제는 전환이 불가피하다. 식량과 에너지 자급 기반을 확보하고, 내수 시장을 확대하며, 해외 인재 유입을 통해 인구 구조를 보완해야 한다. 또한 아시아 차원의 다자 안보 체제를 구축해 해양 질서의 공백을 메워야 한다. 피터 자이한의 전망은 지나치게 미국 중심적이라는 비판을 받지만, 자유무역 질서의 흔들림과 에너지·인구 구조가 국가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는 분석은 점점 현실화되고 있다. 각자도생의 시대는 이미 시작되었으며, 한국은 선택의 시간을 앞당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