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는 지금 새로운 화폐전쟁의 한복판에 서 있다.
디지털 시대의 패권을 쥐기 위한 싸움이다. 무기는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와 스테이블코인이다. 미국, 중국, 러시아 등 주요 강대국들은 각자 자국의 경제구조와 정치체제에 맞춘 디지털 통화 전략을 가동하고 있다.
미국은 민간 기업을 앞세운 스테이블코인으로 전 세계 결제시장을 블랙홀처럼 흡수 중이다. 세계 최대 스테이블코인인 테더(USDT)와 서클(USDC)이 모두 미국 기업이다.
이들은 이미 글로벌 디지털 자산 거래에서 ‘달러 표준’을 굳혔다. 페이팔조차 자체 스테이블코인(PYUSD)을 발행했다. 흥미로운 점은 미국 정부와 연방준비제도(Fed)가 직접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부는 민간에게 발행을 맡기고, 자신들은 규제와 관리에 집중한다. 이로써 민간 혁신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통제력을 유지하는 이중 전략을 구축했다. 미국식 금융제국주의의 디지털 버전이다.
중국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알리페이, 위챗페이로 대표되던 민간 결제 시스템을 정부가 통제권을 회수한 뒤, 인민은행이 직접 주도하는 디지털 위안화(e-CNY)를 확산시키고 있다.
공공버스와 지하철 등 국민 실생활 결제망을 디지털 위안화로 의무화하면서 전국적 확장을 꾀하고 있다.
동계올림픽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실사용 테스트까지 마쳤다. 중국은 디지털 금융에서도 국가 통제를 최우선으로 삼는다.
러시아는 제재 회피를 위해 디지털화폐 개발에 매달리고 있다. SWIFT 퇴출로 금융 고립을 겪은 러시아는 중앙은행이 개발 중인 디지털 루블을 통해 중국, 인도와 함께 국경 간 결제망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금, 석유 등 실물자산과 연동된 디지털화폐도 검토 중이다.
금융제재를 우회하는 국가주도형 전략이다.
유럽과 일본, 싱가포르는 이 두 강대국 사이에서 ‘하이브리드 모델’을 선택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디지털 유로 개발과 함께 민간 금융사의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허용하는 이중 전략을 택했다. 일본도 민간은행의 스테이블코인과 디지털 엔 개발을 병행 중이다. 싱가포르도 민관 협력형 디지털 통화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민간 혁신과 국가 감독을 결합하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민간 주도의 스테이블코인과 정부의 통제를 병행하며 디지털 금융 패권을 공고히 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여기에 맞서 중국과 러시아는 철저한 국가 통제형 CBDC로 방어하고 있다. 이른바 디지털 화폐 패권전쟁이 본격화된 셈이다.
한국은
세계가 화폐전쟁을 벌이는 사이, 한국은 아직 싸움터에도 나서지 못하고 있다. CBDC와 스테이블코인을 단순 결제수단으로 인식하거나, 두 개념을 별개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대로라면 한국 경제는 달러와 위안화, 미국과 중국이 구축한 결제망에 영원히 종속될 수밖에 없다.
한국도 선택해야 한다.
금융전략으로서 스테이블코인을 공식화해야 한다. 결제망과 금융 인프라를 디지털 시대에 맞게 재편하지 않으면 원화는 국제 무대에서 존재감을 잃게 될 것이다.
핵심은 발행 주체다.
민간 거래소나 코인기업에게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맡기는 것은 금융 리스크를 키우는 일이다. 테라 사태가 그 위험을 증명했다. 따라서 국가가 주도하는 공적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은행이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맡아야 한다. 은행은 준비금과 자산을 보유한 공식 금융기관이며, 기존 지급결제망을 통해 안정적인 코인 발행이 가능하다.
여기에 핀테크 기업이 기술과 서비스를 제공하고, 정부와 한국은행, 금융당국이 정책 설계와 규제·감독을 맡는 공공-민간 협력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은행은 더 이상 예금과 대출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디지털 결제와 국제 금융 시스템으로 업무를 확장해야 한다. 스테이블코인은 그 첫걸음이 될 수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무역결제에서도 한국의 돌파구가 된다. 한국은 무역으로 먹고사는 나라지만, 모든 대금결제가 달러망에 묶여 있다. 미국이 금융제재를 가하면 한국은 속수무책이다.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무역결제에 활용하면 달러 의존도를 낮출 수 있다. 동남아, 중동, 아프리카 국가들과 독립된 결제망을 구축할 수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관세전쟁과 금융제재를 피할 수 있는 수단이자 한국 경제의 자주성을 확보하는 무기가 된다.
무역결제용, 관광소비용, 복지전용 등 정책 목적에 맞는 맞춤형 스테이블코인을 설계해 산업과 지역경제 활성화에 직접 활용할 수도 있다. 이는 중앙은행이 통제하는 CBDC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한국은 투트랙 전략으로 가야 한다. CBDC는 국내 금융 안정망 유지용으로, 스테이블코인은 정책형 금융 플랫폼과 국제무역용 디지털 화폐로 설계해야 한다. 정부는 정책과 인프라를 지원하고, 실질적 발행과 운영은 은행과 핀테크 기업이 맡아야 한다.
스테이블코인이 확산되면 원화는 자연스럽게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기축통화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금융혁신이 곧 국가전략이 되는 전환점이 열린다.
CBDC만으로는 기축통화국이 될 수 없다.
한국이 선택해야 할 무기는 정책형 스테이블코인이다.
은행이 발행 주체가 되어야 하며, 정부와 한국은행, 금융당국이 이를 뒷받침해야 한다. 한국형 스테이블코인은 디지털 화폐전쟁의 실질적 무기가 될 수 있다. 지금이 싸움터에 나설 마지막 기회다. 한국은 언제 전쟁을 시작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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