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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하나로 만든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국가보다 주가 먼저였던 미국을, 주보다 국민이 우선인 미국으로 바꾼 지도자”

유경남 기자 | 기사입력 2025/06/19 [08:41]

미국을 하나로 만든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국가보다 주가 먼저였던 미국을, 주보다 국민이 우선인 미국으로 바꾼 지도자”

유경남 기자 | 입력 : 2025/06/19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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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1809년 2월 12일 ~ 1865년 4월 15일)은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으로, 남북전쟁 기간 동안 연방을 보존하고 노예제를 폐지한 업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리더십과 도덕적 신념은 미국 역사에 깊은 영향    

 

에이브러햄 링컨은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남북전쟁이라는 최대의 국난을 헤쳐나간 지도자이자, 노예제를 법적으로 폐지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리더십은 단순한 도덕적 상징을 넘어, 미국의 구조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편하는 전환점이었다.

 

링컨이 대통령이 되기 전의 미국은 각 주의 자율권이 강한 ‘연방’의 성격이 짙었다. 각 주는 스스로 법을 만들고 세금을 정하며, 연방 정부는 단지 이를 조정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나 남북전쟁을 거치며 링컨은 주보다 ‘국민’을 우선하는 체제를 구축했고, 오늘날의 미국은 그 틀 위에 세워져 있다.

 

그는 1809년 켄터키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목수였고, 링컨은 농사, 벌목, 철도 건설 등 여러 육체노동을 전전했다. 정규교육은 1년 미만이었으나, 독학으로 책을 탐독하며 학식을 쌓았다. 훗날 그는 자격시험을 통과해 변호사가 되었다.

 

일리노이 주로 이주한 링컨은 지역 정계에 발을 들였고, 점차 전국구 정치인으로 부상했다. 그는 유머와 대중 연설에 능했고, 자신을 ‘평범한 백성’과 동일시하는 소통 방식으로 지지를 얻었다. 이런 배경은 그가 대통령에 오르기까지 큰 자산이 되었다.

 

링컨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부인 메리 토드 링컨과는 성격, 환경, 가치관이 매우 달랐고, 결혼 자체도 파혼과 재결합 끝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메리는 남부 명문가 출신으로 교양과 체면을 중시했지만, 링컨은 소탈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정치 경력 초기, 링컨은 휘그당 소속이었지만 당내 분열과 해체 과정에서 그는 1854년 공화당 창당에 합류하게 된다. 공화당은 노예제 반대를 핵심 가치로 내세우며, 북부 산업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세력이었다.

 

1858년, 링컨은 민주당의 스티븐 더글라스와 상원의원 선거에서 치열한 토론을 벌이며 전국적 인물로 부상한다. 비록 선거에서는 패배했지만, 그의 연설과 정치적 철학은 대중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특히 "한 집이 노예와 자유로 나뉘어 설 수 없다"는 발언은 당시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1860년 대통령 선거에서 링컨이 당선되자, 노예제를 유지하던 남부 주들은 즉각 반발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를 시작으로 11개 주가 연방 탈퇴를 선언하고, 남부연합을 구성했다. 이로써 미국은 내전에 돌입하게 된다.

 

링컨은 로버트 리 장군에게 연방군 총사령관직을 제안했지만, 그는 고향인 버지니아 주에 대한 충성을 이유로 거절하고 남부군에 합류했다. 이는 남북전쟁의 향방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결정이었다.

 

전쟁 초반, 북부는 유능한 사령관을 찾지 못해 고전했다. 그러나 링컨은 집요하게 적임자를 찾아냈고, 마침내 율리시스 S. 그랜트를 발탁하면서 전세를 역전시킨다. 이 시기 링컨의 인내심과 인사 능력이 두드러졌다.

 

링컨은 전쟁 와중에도 민주주의의 가치를 강조했다. 1863년 게티스버그 전투 직후 행한 ‘게티스버그 연설’은 짧지만 강렬한 메시지로 미국 정치사에 길이 남았다. 그는 이 연설에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구절을 남겼다.

 

그의 개인적 고뇌도 크고 깊었다. 아들의 죽음, 부인과의 갈등, 끝없는 전쟁 책임 등으로 인해 링컨은 심각한 우울증을 겪었다. 영화 <링컨>은 이러한 내면의 고통과 그의 강인함을 균형 있게 묘사하고 있다.

 

전쟁 말기, 링컨은 노예제를 헌법적으로 폐지하기 위해 13차 수정헌법을 추진했다. 그는 의회를 설득하며 동료와 적을 가리지 않고 지지를 끌어냈고, 결국 법안은 통과됐다. 이는 그가 단순한 행정가를 넘어 전략가이자 도덕적 정치인임을 입증한 사건이었다.

 

1865년 4월 9일, 남부군은 항복했고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평화의 시작은 곧 비극으로 이어졌다. 5일 후, 링컨은 포드 극장에서 암살당했다. 범인은 남부 동조자인 존 윌크스 부스였다.

 

링컨 암살은 단독범의 충동이 아니라, 정치적 조직범죄의 성격을 띠었다. 부스 일당은 링컨을 비롯해 국무장관과 부통령까지 암살 대상으로 삼았으나, 성공한 것은 링컨 한 명뿐이었다.

 

부스는 도주 도중 추적자들과의 총격전 끝에 사망했다. 그의 시체는 공개되지 않았고, 음모론이 수십 년간 퍼졌다. 그러나 링컨의 죽음은 오히려 그를 ‘순교자’로 만들며 국민적 신화를 형성하게 했다.

 

링컨이 존경받는 이유는 단지 노예 해방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미국을 ‘주들의 연방’에서 ‘국민의 나라’로 변화시켰다. 연방정부의 권한이 강화되고, 미국은 이후 중앙집권형 국가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모든 평가가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일부 학자들은 링컨이 처음부터 노예 해방에 적극적이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흑인을 미국 밖으로 이주시키는 계획을 검토했으며, 백인 중심의 서부 개척을 고수했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그는 남북전쟁을 통해 행정부의 권력을 비대하게 만들었다는 비판도 받는다. ‘헌법을 지키기 위해 헌법을 위반한 대통령’이라는 회의적인 시선이 일부 존재한다. 그의 리더십은 민주주의적 요소와 비민주적 요소가 혼재돼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링컨은 미국 현대사의 핵심 가치인 자유와 평등, 그리고 통합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그를 이해하는 것은 곧 미국을 이해하는 것이며, 민주주의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국가가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하는지를 되묻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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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시민신문 대표
시민포털 전남 지부장
man908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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