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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없는 자본, 크라이슬러가 보여준 현실

독일, 미국, 이탈리아로 이어진 경영권 변화

초국적 경영의 이상과 현실

글로벌 경제에서 기업의 국적과 의미

조동현 기자 | 기사입력 2025/01/21 [09:12]

국경 없는 자본, 크라이슬러가 보여준 현실

독일, 미국, 이탈리아로 이어진 경영권 변화

초국적 경영의 이상과 현실

글로벌 경제에서 기업의 국적과 의미

조동현 기자 | 입력 : 2025/01/21 [09:12]

미국의 자동차 제조업체 크라이슬러는 1998년 독일의 다임러-벤츠와 합병을 선언하면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당시 이 합병은 두 기업이 동등한 파트너십을 형성했다는 점을 강조하며 '다임러-크라이슬러'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출발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다임러-벤츠가 크라이슬러를 인수한 형태에 가까웠다. 합병 초기에는 미국인과 독일인이 같은 비율로 이사진에 포함되며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는 듯 보였으나, 이러한 외형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 인수합병은 기대만큼 성공적이지 못했다. 2007년 다임러-벤츠는 크라이슬러를 미국의 사모펀드 서버러스에 매각했다. 다임러-벤츠는 19.9%의 지분을 유지하며 일부 대표를 잔류시켰지만, 크라이슬러의 경영진은 곧 미국인들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서버러스도 크라이슬러를 되살리는 데 실패했고, 결국 2009년 크라이슬러는 파산에 이르렀다. 이후 미국 연방정부의 지원과 이탈리아 자동차 회사 피아트의 대규모 지분 매수로 크라이슬러는 새로운 구조 개편을 거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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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라이슬러 사진    

 

피아트는 자사의 CEO 세르지오 마르치오네를 크라이슬러의 CEO로 임명했고, 크라이슬러 이사회에 피아트 임원을 추가로 배치하며 영향력을 확대했다. 피아트는 초기 20%의 지분을 확보했으나, 최대 51%까지 지분을 늘릴 권리를 보유하고 있어 향후 크라이슬러의 경영권은 점점 더 이탈리아로 넘어갈 가능성이 컸다.

 

한때 미국을 대표하던 크라이슬러는 지난 10여 년 동안 독일, 미국, 이탈리아의 손을 거치며 국적 없는 기업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 과정은 글로벌 자본의 성격과 그 영향력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국적 없는 자본이라는 개념은 환상에 불과하며, 대부분의 인수합병은 인수 기업이 인수된 기업의 경영권을 장악하고 최고 의사결정권을 자국민에게 맡기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기업의 경영 효율성을 유지하고 비용을 절감하기 위한 조치로 보이지만, 양국 간 물리적 거리와 문화적 차이가 큰 경우에는 경영 효율성이 저하되거나 비용이 증가할 가능성도 있다. 카를로스 곤과 같은 인물이 예외적으로 초국적 경영에 성공한 사례로 언급되지만, 이는 드문 경우다.

 

기업의 자국 편향성은 최고 경영진 임명에만 그치지 않는다. 연구개발(R&D) 활동에서도 이러한 편향성은 뚜렷이 드러난다. 대부분의 기업은 자국 내에서 연구개발을 수행하며, 해외로 연구개발을 이전하는 경우에도 특정 지역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하다.

 

예를 들어, 북미 기업은 북미 내에서, 유럽 기업은 유럽 내에서, 일본 기업은 아시아 내에서 주로 연구개발 활동을 진행한다. 중국과 인도와 같은 신흥 시장에 연구개발 센터를 설립하는 경우가 늘고 있지만, 이들 센터에서는 주로 낮은 수준의 연구개발이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연구개발 활동은 기업 경쟁력의 핵심 요소로, 본국에서 전략적으로 관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생산 부문에서도 기업들은 여전히 본국에 기반을 두는 경향이 강하다. 초국적 기업조차 대부분의 생산을 본국에서 진행하며, 해외 생산 비율이 높아 보이는 일부 기업들도 지역적 특성을 고려한 결과일 뿐이다. 네슬레와 같은 기업은 예외적으로 제품의 대부분을 외국에서 생산하지만, 이러한 사례는 극히 드물다.

 

미국에 본사를 둔 제조업체들의 해외 생산 비율은 전체의 3분의 1을 넘지 못하며, 일본 기업들의 경우에는 10%에도 미치지 못한다. 유럽 기업들의 해외 생산 비율이 최근 증가하고 있지만, 이는 유럽연합이라는 새로운 경제권 내에서 이루어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유럽 기업들이 진정으로 국적을 초월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진정한 의미의 초국적 기업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기업은 본국 중심으로 운영되며, 전략적 의사결정과 고급 연구개발 활동은 여전히 본국에서 이루어진다. 국경 없는 세계라는 표현은 현실을 과장한 것이며, 글로벌 경제에서도 국적의 중요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크라이슬러의 사례는 글로벌 자본의 흐름 속에서 기업의 국적이 어떻게 변화하고, 그 변화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는 단순히 경영권의 이동뿐만 아니라, 글로벌 경제의 복잡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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