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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시대 중앙정보부와 보안사... 권력의 양날검

12.12 군사 반란과 김진기 헌병감의 선택

배신과 트라우마: 한 군인의 생애와 권력의 대가

김학영 기자 | 기사입력 2024/11/25 [09:38]

박정희 시대 중앙정보부와 보안사... 권력의 양날검

12.12 군사 반란과 김진기 헌병감의 선택

배신과 트라우마: 한 군인의 생애와 권력의 대가

김학영 기자 | 입력 : 2024/11/25 [09:38]

 

김진기 헌병감의 삶과 행적은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와 보안사를 중심으로 한 권력 구조를 생생히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특히 그는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이후 12.12 군사 반란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으며, 이를 통해 당시 군부 내 권력 투쟁의 본질과 그 배후에 깔린 인간적 갈등을 조명한다. 그의 이야기는 단순히 한 군인의 개인적 여정을 넘어, 냉전 시기 대한민국의 정치적 실체와 권력의 잔혹성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통찰을 준다.

 

1961년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 직후 설립된 중앙정보부는 반공 세력의 총본산으로, 간첩 색출과 정보 수집을 명분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중앙정보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국가 안보를 넘어 정치적 목적에 더 치중하며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보안사 또한 군 내부의 방첩 활동을 명분으로 창설되었으나, 점차 정권을 지탱하는 도구로 변질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김재규는 박정희의 신임을 받아 중앙정보부장과 보안사령관을 역임하며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다. 김재규의 권력은 절대적이었지만, 그의 내면에는 박정희의 독재 체제에 대한 갈등과 고뇌가 싹트고 있었고, 이는 10.26 사건으로 폭발하게 된다. 김진기 헌병감은 바로 이 사건의 중심에서 김재규 체포를 주도하며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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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6 사건으로 폭발하게 된다. 김진기 헌병감은 바로 이 사건의 중심에서 김재규 체포를 주도하며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김진기는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며 군인으로서 경력을 쌓았고, 헌병 분야에서 전문성을 인정받아 다양한 직책을 역임했다. 10월 26일 박정희 서거 당시, 그는 김재규의 체포 작전을 지휘하며 사건의 진압과 정보 수집에 핵심 역할을 했다. 김재규는 체포 과정에서 비상한 경계를 보였지만, 김진기는 특수 헌병 부대를 동원해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는 박정희 체제 붕괴 이후 권력 공백 속에서 군 내부 권력 투쟁의 서막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김진기가 김재규 체포를 주도한 이후, 전두환과 그의 신군부는 이 사건을 기회로 삼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박정희의 서거 이후, 정승화와 전두환 간의 권력 다툼은 군부 내의 긴장을 극도로 고조시켰다. 정승화는 당시 군부의 정통성을 유지하려 했지만, 전두환은 보안사와 자신의 핵심 세력을 동원해 그의 제거를 도모했다. 12월 12일 밤, 정승화는 보안사의 일방적 작전에 의해 연행되었고, 이 과정에서 보안사는 선제적으로 무력을 사용하며 군사 반란을 일으켰다.

 

김진기는 당시 헌병감으로서 사건 현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려 했으나, 그의 부하들의 배신과 전두환 측의 압도적인 공작으로 인해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는 이 사건 이후 자신의 신념과 명예가 배신당했다는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했다.

 

김진기의 삶은 12.12 군사 반란과 함께 급격히 바뀌었다. 그는 당시 전두환의 만찬에 초대되었다가, 정승화 총장이 체포되면서 작전이 급변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부대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전두환 측 부하들에게 제압당했고, 이는 그의 헌병 조직이 사실상 무력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김진기의 부하였던 성환옥과 종 대령은 그를 배신해 전두환의 군부에 협력하며, 김진기에게 평생 동안 트라우마로 남을 상처를 남겼다. 이후 전두환의 신군부는 군사 정권을 공고히 하며 1980년 5월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를 단행했고, 이는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지연시키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김진기는 전두환 정권의 폭압적인 통치와 군부의 부패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법적 심판을 촉구했지만, 그는 오히려 감시와 고초를 겪으며 은둔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정병주 사령관의 의문사와 같은 사건들을 목도한 그는, 자신의 군 경력을 바탕으로 군부의 도덕적 책임을 묻고자 했으나, 역사의 흐름은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결국 그는 여러 보직 제안을 거절하며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 했지만, 끝내 군사정권의 철퇴를 피해갈 수 없었다. 김진기는 문민정부 이후 한국토지공사 이사장으로 재기하며 전두환을 고발했지만, 그의 말년은 여전히 쿠데타의 악몽과 배신의 기억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의 부하였던 성환옥 대령은 준장으로 승진하며 군에 잔류했고, 또 다른 배신자 조홍은 해외로 도피한 뒤 연금을 수령하며 생을 마감했다. 한편, 김진기는 2006년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정의를 향한 메시지를 남기며 자신의 생애를 마무리했다.

 

그의 이야기는 단순히 한 군인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는 박정희 시대와 전두환 정권으로 이어지는 권력의 구조적 문제, 그리고 그로 인해 희생된 개인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다. 이러한 역사를 통해 우리는 권력의 본질과 그에 따르는 책임을 다시금 깊이 고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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