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신장 통치, 끝나지 않은 억압의 역사위구르족 탄압, 자원 착취, 그리고 국제사회의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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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청나라의 쇠퇴와 함께 신장의 불안정성은 극에 달했다. 1800년대 들어 청나라가 아편전쟁과 태평천국 운동으로 쇠락하자, 신장은 제대로 관리되지 못했고, 이로 인해 위구르족의 반란이 빈번해졌다.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하고 신장이 중국에서 떨어져 나가면서 잠시 독립을 이루는 듯했지만, 이후에도 신장은 내외적으로 격동의 세월을 맞이하게 된다.
1920년대부터 신장은 중국의 여러 군벌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위구르족은 끊임없는 압박과 탄압을 받았다. 1933년에는 위구르족이 동트르키스탄 공화국을 세우며 독립을 시도했으나, 이는 다른 군벌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1944년에는 동트르키스탄 제2공화국이 재건되었으나, 중국 국민당과의 협상으로 연립정부가 구성되었고, 위구르족의 독립 시도는 또다시 실패로 돌아갔다.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과의 대립을 기회로 삼아 소수민족의 자결권을 내세우며 위구르족의 호감을 얻었다. 공산당은 "소수민족 자결권 보장"을 명분으로 위구르족의 지지를 이끌어냈고, 1949년 공산당이 중국 대륙을 장악하면서 신장은 중국의 일부로 다시 편입되었다. 1955년 신장은 신장 위구르 자치구로 공식적으로 편입되었으며, 이후 중국 공산당의 엄격한 통제 아래 놓이게 된다.
신장은 단순한 영토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우선, 이곳은 중국의 주요 자원 공급지이다. 중국 내 원유 생산량의 33%, 천연가스 생산량의 35%, 면화 생산량의 90%가 신장에서 나온다. 또한, 첨단 기술에 필요한 히토류와 금 등 중요한 자원도 신장에서 생산되며, 이는 중국의 경제 성장을 견인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신장의 지정학적 위치 또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지역은 유라시아 대륙의 중심에 위치해 있으며, 중국과 중앙아시아, 나아가 유럽을 잇는 교역로의 요충지이다. 최근 중국이 추진하는 '일대일로' 프로젝트에서도 신장은 필수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중국은 중앙아시아와 유럽으로의 진출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신장이 지니는 가치만큼이나 중국 내에서의 갈등도 심화되고 있다. 1955년 자치구로 편입된 이후 중국은 위구르족의 문화를 억압하고, 한족 이주를 적극적으로 장려하며 신장의 인구 구성을 변화시켜 왔다. 1953년 신장의 인구 구성에서 위구르족은 75%, 한족은 6%였으나, 2015년에는 위구르족 51%, 한족 44%로 급격하게 변화했다. 이러한 인구 변화는 위구르족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왔으며, 이로 인한 불만은 끊임없는 반란과 저항으로 이어졌다.
또한, 중국은 1950년대부터 신장에서 핵실험을 진행하며 많은 피해자를 발생시켰다. 이러한 억압 정책과 환경적 피해는 위구르족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이는 무장 봉기와 시위로 이어졌다. 특히 2009년 우루무치 시위에서 중국 정부의 강경 진압은 많은 인명을 희생시켰으며, 위구르족의 저항은 더욱 거세졌다.
중국은 위구르족의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 최근 수용소를 운영하고, 위구르족의 인구를 통제하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이러한 정책은 국제사회의 비판을 받고 있으며, 중국의 소수민족 탄압 문제는 점점 더 큰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중국이 신장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원과 지정학적 가치뿐만 아니라, 신장의 독립이 티베트, 네몽골 등 다른 자치구의 독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중국은 신장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강력한 통치를 유지할 것이다.
중국의 이러한 통치 방식이 과연 장기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지, 그리고 국제사회와의 관계에서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상황은 앞으로도 중국 내외에서 중요한 정치적, 경제적, 인권 문제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