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 때문에 망한 푸틴?겨울이 절반을 넘기고 있는데도 유럽 대륙은 늦가을 또는 이른 봄 날씨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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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들어 알프스 눈의 나라 스위스 취리히의 최고 기온이 20도를 넘었고, 서유럽에 비해 더 추운 겨울을 보내던 동유럽의 폴란드 바르샤바는 19도, 체코 자보르니크는 20도의 온화한 날씨를 즐기기도 했다. 북대서양 난류의 영향을 받아 유럽 대륙 가운데서도 가장 따뜻한 날씨를 보이는 스페인의 빌바오는 25도의 초여름 날씨를 보이기도 했다. 프랑스 파리는 이달 4일부터 15일까지의 예보가 최고 기온은 7~14도, 최저 기온은 4~12도로 나왔는데, 실제로 이른 봄 날씨 속에 이따금씩 눈 대신 비만 내리고 있다.
영국 BBC 방송은 이처럼 따뜻한 겨울이 이어지는 까닭은 유럽의 남서쪽, 즉 아프리카 서쪽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공기층이 유럽 대륙으로 계속 유입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세계기상기구(WMO)는 지난해 11월 “최근 30년간 유럽 지역의 기온은 세계 평균보다 두 배 빠르게 오르고 있다”는 보고서를 내놓기도 했다.
이처럼 유럽 대륙이 늦가을 날씨, 또는 이른 봄 날씨를 보여 ‘겨울 실종’의 기상 이변을 겪고 있는 가운데 유럽 여러 나라와 러시아의 현재 상황은 그야말로 ‘희비 쌍곡선’이다. 지난해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속전속결로 전쟁을 승리로 끝내겠다던 러시아는 미국과 유럽 각국의 적극적 우크라이나 지원으로 오히려 패색이 짙어지자 어서 빨리 겨울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난감한 형국이었다. 유럽 대부분의 나라가 주로 러시아의 천연가스에 의존해 겨울 난방을 해왔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유럽으로 가는 천연가스 밸브를 잠그기도 하고, 가격을 올리기도 하는 이른바 ‘에너지 무기화 작전’으로 유럽 대륙에 ‘난방 대란’을 일으켜 유럽 각국의 우크라이나 지원 의지를 꺾어 놓으려 했으나 유럽 대륙의 ‘따뜻한 겨울’로 에너지 무기화 작전은 완전히 실패하고 만 것이다.
거꾸로 유럽 국가들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크게 우려했던 ‘난방 대란’을 절묘하게 피해 가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독일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 주요국은 러시아의 천연가스 공급 중단과 원자력 발전소 가동 차질 문제 등으로 에너지 공급량이 평년의 75~85%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따뜻한 날씨 덕분에 에너지 수요가 크게 줄어들어 러시아의 당초 목표였던 ‘에너지 대란’을 멋지게 모면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의 천연가스 무기화 작전으로 천연가스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을 것이라던 당초의 우려와는 정반대로 국제 천연가스 거래가격은 오히려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보다 더 낮아졌다.
천연가스 2월물 가격은 뉴욕상업거래소에서 지난 6일 MMBTU(열량단위)당 3.72달러에 거래를 마감했다. 한 달 전과 비교하면 37% 떨어졌고 작년 최고치를 찍었던 지난 8월의 9.98달러와 비교하면 62% 하락했다. 천연가스 가격은 작년 최고치 대비 3분의 1 토막 수준까지 내려가면서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 수준보다 오히려 더 낮아졌다.
유럽에서는 가격폭락이 더 극심하다. 천연가스 가격지표인 네덜란드 TTF 선물 시장에서 천연가스 2월 선물 가격은 ㎿h(메가 와트시)당 70.8유로를 기록했는데, 이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날 기록했던 88유로보다 18유로 이상 낮은 수준이다. 천연가스 가격이 최고치까지 올랐던 작년 8월 350유로대에 거래되던 것과 비교하면 5분의 1 수준으로 폭락한 것이다.
한때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현금 창구로 불리던 천연가스 가격의 폭락은 유럽 등 서방의 러시아산 천연가스 가격상한제 설정과 더불어 이례적인 따뜻한 겨울 기온이 합쳐져 가격급락을 몰고 온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EU(유럽연합) 에너지 장관들은 작년 12월 19일 표결을 거쳐 가스 가격이 메가와트시(㎿h)당 180유로 이상이고, 글로벌시장의 액화천연가스(LNG)보다는 35유로 비싸지는 등 두 가지 요건이 3일 연속 지속되면 가격상한제를 발동하기로 했다.
천연가스 가격의 대폭적인 하락은 곧바로 러시아에 악재가 됐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국제 사회의 분열을 초래하기 위해 핵무기 위협과 천연가스 공급 중단,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 차단 등의 수단을 활용해 왔다. 그러나 핵무기 사용은 자신의 운명을 걸어야 할 만큼 비현실적이고, 곡물 수출은 여러 가지 요인으로 가로막기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따뜻한 겨울까지 닥치면서 천연가스 공급 중단의 효과마저 사라지게 됐다.
이처럼 러시아의 당초 계획이 크게 빗나가자 미국의 CNN 방송은 “에너지 무기화를 통해 유럽의 우크라이나 개입을 막겠다는 러시아의 계획이 차질을 빚고 있다”고 분석했다. 또 미국 블룸버그 통신은 “올해 이상난동을 일으킨 기후변화의 최대 피해자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라고 지적했다.
21세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이 따뜻한 겨울 날씨로 인해 공격자에게 매우 불리한상황이 전개되자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19세기 프랑스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과 20세기 독일 히틀러의 러시아 침공이 모스크바의 혹한으로 참패한 사실이 거꾸로 들먹여지기도 한다.
1789년 7월부터 시작된 프랑스혁명의 결과에 따라 혁명군의 장군으로 혁혁한 전과를 올리다가 결국 1804년 황제의 자리에 오른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독일 오스트리아 스페인 네덜란드 등 주변국들을 모조리 정복하고, 영국마저 치려 했으나 ‘바다’라는 장애물에 걸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나폴레옹은 영국을 경제적으로 무너뜨리기 위한 대륙봉쇄정책을 폈으나 그때까지 정복당하지 않은 러시아는 나폴레옹을 비웃듯 여전히 영국과 거래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급기야 러시아 침공을 결정한다. 그동안 나폴레옹 군대에게 정복당하거나 스스로 굴복한 20개국에서 끌어모은 병력을 합친 60만 명의 대군으로 1812년 6월 러시아 국경을 넘은 프랑스군은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진격하여 드디어 10월 수도 모스크바까지 점령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모스크바에서 후퇴하면서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잠잘 곳을 거의 모조리 불 질러 버리는 도시 초토화(焦土化)작전으로 모스크바를 폐허로 만들어 놓고 동쪽 우랄산맥 방향으로 후퇴, 항복을 거절하고 러시아에게 유리한 겨울 전쟁에 대비하였다. 그런데 평년과 달리 너무나 일찍 몰아닥친 모스크바의 추위로 프랑스 군인들은 그야말로 ‘춥고 배고프고 졸린’ 최악의 환경에 내몰려 나폴레옹은 어쩔 수 없이 후퇴를 명령하였다. 퇴각하는 과정에서 12월 영하 39도의 강추위가 엄습했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고 자지 못해 스스로 패잔병이 되어버린 프랑스 대군의 뒤로는 러시아 사령관 쿠투조프 장군이, 위로는 하늘의 동장군(冬將軍. General Winter)이 막강한 군대를 휘몰고 달려들어 프랑스군을 산산이 부수어버렸다. 퇴각을 거듭한 나폴레옹 군대가 서쪽 끝 발트해의 리투아니아까지 밀려났을 때는 당초의 60만 대군 중에서 수만 명만이 나폴레옹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특히 부상하거나 스스로 지쳐 뒤처진 패잔병들은 러시아 농민병들에 의해 처참한 죽임을 당했다.
이렇게 모스크바의 추위에 처절히 패배한 나폴레옹은 파리로 돌아와 간신히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1814년 3월 파리에 입성(入城)한 반프랑스 동맹군에 의해 엘바섬으로 추방되었다가 신출귀몰하게 탈출하여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1815년 워털루전투에서 영국에게패하여 대서양의 절해고도(絶海孤島)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폐되어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또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 나치 군대도 소련의 동장군에게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1939년 8월 소련과 ‘독소불가침조약’을 맺은 독일은 한 달 뒤인 9월 폴란드 침공으로 2차대전을 일으켰다. 그리고 2년 뒤인 1941년 6월에는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을 깨고 동부전선에서 이른바 ‘독소전쟁’을 일으켰다.
불과 10주 만에 소련 모스크바를 함락하겠다고 공언한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파죽지세로 프랑스 파리를 점령했던 것처럼 물 밀듯 동부전선으로 전진해 나아가 10월 13일 주력부대가 모스크바 120㎞ 전방 방어선까지 도달했다. 일부 부대는 모스크바 크렘린궁 30㎞ 앞까지 진격하여 망원경으로 크렘린궁을 정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동유럽 대평원의 특이한 기상현상인 ‘라스푸티차’ 즉 ‘진흙의 계절’이 시작되었다. 이른바 ‘가을 장마’가 지속되어 진흙으로 덮인 땅이 그만 온통 수렁으로 변하고 말았다. 차량이 한 번 빠지면 도저히 자력으로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에 독일 기갑부대는 그야말로 ‘고철 덩어리 부대’로 전락하였다.
라스푸티차가 끝날 무렵에는 영하 20도 이하의 ‘동장군’이 급습하여 미처 겨울옷과 장비를 갖추지 못한 독일군은 동상에 걸리거나 얼어 죽는 일이 태반이었다. 그 유명한 독일의 기갑부대는 허수아비 꼴이었고, 용맹을 떨치던 독일 나치군은 추위 속에 오들오들 떨었다.
초여름에 소련과의 전쟁을 시작한 독일은 한여름쯤에 모스크바를 점령할 줄 알았다가 소련군의 맹렬한 저항에 직면하여 가을을 넘겨 겨울을 맞은 것이다. 이 당시 독일군은 소련군 전사자와 부상자의 겨울옷을 벗겨 자신들이 입기에도 안절부절못하는 형국이었다고 한다. 소련군의 옷을 빼앗지 못한 독일군들은 여전히 여름옷 차림으로 모스크바의 겨울을 맞았다. 반면에 자국의 겨울에 단단히 대비한 소련군은 ‘독소전쟁’ 개전 이래 처음으로 독일군의 진격을 멈추게 할 수 있었다.
이것이 이른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별도의 전쟁으로 분류되는 ‘독소전쟁’의 ‘모스크바공방전’이다. 이후로 독일은 서쪽으로 후퇴하였고, 소련은 서쪽으로 진격하는 양상의 전쟁으로 방향이 바뀌었다. 모스크바공방전에서만 독일군은 40만 명, 소련군은 100만 명이 전사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19세기 초반 나폴레옹 군대에 이어 20세기 중반 나치 독일군에게 함락될뻔했던 모스크바를 구한 ‘영웅’ 가운데 하나로 모스크바 하늘의 ‘동장군’이 추켜세워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